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어떤 입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살짝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살짝 보여준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표현을 했는데, 그 이유는 이 본문의 주된 메시지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본문의 주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 있는 악한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를, 주된 메시지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안 들려요? 어떻게 하라고요? 내쫓아라! 출교 시켜버려라!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쫓아내 버려라. 그렇게 교훈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부터 13절까지에서 들려주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주된 메시지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생각해야 될 지점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은 어떠한 곳인가?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데, 우리 모두가 다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다 죄인들로서, 죄인을 부르시는 우리 주님에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온 다 죄인들인데, 죄인을 쫓아내라. 악인을 쫓아내라고 하는 이 말씀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어떤 시점에 쫓아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질문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본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주된 메시지를 다루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주된 메시지에 대해서 한번 다루게 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은 이 주된 메시지를 말씀하면서, 살짝 스쳐 지나가면서 해주신 그 말씀을,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합니다. 살짝 스쳐가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과연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정말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 악이 판치는 세상, 온갖 나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 악한 세상에,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악한 세상과 우리는 어떤 스탠스(stance)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악한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지나가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야말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어떤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까?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 속여 갈취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이 세상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하면서 살아야 될 것인가? 이런 악한 사람들이 들끓는 이 세상과 우리가 어떤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그 당시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어쩌면 오늘날에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려고 한다면,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세상에는 온갖 악이 판치는 세상인 것이죠. 이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동성애자가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단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런 이 세상과 우리는 어떤 관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인데, 이런 이 세상과는 다른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과연 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오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선택의 옵션(option)들이 우리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선택의 길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악한 사람들을 아예 상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음행을 저지르고, 우상숭배를 하며, 탐욕을 저지르고 속여 갈취하고 악을 행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우리가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도 물들을 위험이 있으니까,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 보면, 우리도 그런 죄악에 빠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과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선택한 사람들 가운데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교회사적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세상에서 정말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다가는, 우리도 그렇게 어울려 살다가, 악을 저지르게 될 것만 같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 그런 악한 사람들로부터 떠나서, 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수도원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기도원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나쁜 것들은 보지 않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런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른 곳이 천국이 아니라, 이렇게 정말 믿는 사람들끼리, 겸손하게 서로 함께 격려하면서, 그런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수도원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가 있을 겁니다.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며 살아가는 그곳이, 어쩌면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아니라,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냐 하면, 악을 행하는 이 세상과 싸우는 방법입니다. 도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수도원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방법은 이 세상과 맞짱을 떠서 싸우는 것이죠.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더불어 싸워서 이겼던 것처럼, 이 세상과 싸워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영적인 정복을 해나가려고 하는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베드로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그냥 맥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무장을 하고, 공격해 오는 저 이교도들을 악한 무리들과 맞짱을 떠서,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인 것이죠. 중세시대 때 십자군의 선택이 바로 그런 선택일 겁니다. 저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힘을 다해서 싸워서,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 집중해서, 저 이슬람교도들과 함께 싸워서, 그래서 그들을 정복해 버리고, 이 세상을 무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버리겠다”라고 하는 그런 정복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번의 방법과 2번의 방법, 도피의 방법과 정복의 방법, 이 둘 중에서 어느 방법이 좋을까요? 1번 한번 손 들어주세요. 도피의 방법 아무도 없습니까? 2번 방법, 싸워서 이기자? 2번 손 들어주세요. 한 명 나왔어요. 두 명 나왔어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해 주시는가? 이 시간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5장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음행 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 세상이 너무나도 더러우니까. 아이고 이 세상과는 내가 도무지 어울려 살 수 없겠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방법이 괜찮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라는 얘기입니까? 아니라는 이야기예요. 도피하는 게 방법이 아닌 겁니다. 이 세상 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거니와, 아무리 도망해 간다고 한들, 수도원에 가면 더 이상 더러운 꼴 안 볼까요? 기도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악한 모습을 보지 않게 될까요? 그곳에 가면 천국일까요? 그게 아니라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다 마찬가지인 것이고,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도망가면서 도피하면서, 그렇게 패배자처럼 도망 다니며 사는 것이 가장 멋진 선택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5장 10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도피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럼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요? 그 악한 사람들과 우리가 실력으로, 내가 최고의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내가 높은 고지를 점령해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이 고지로 올라가십시오. 여러분들이 고지에 올라가서, 방송국을 장악하고, 그리고 법원을 장악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거기서 이 세상 사람들을 정복하고, 그래서 다스리십시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지론을 가르친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과 싸워서, 내가 사장이 되어서,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다 교회로 이끌어오고, 내가 어떤 기관의 장이 되어서, 그 사람들을 다 내 힘과 권력으로 다 데려오고, 그런 식으로 해서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세상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라고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오늘 고린도전서 5장 13절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5장 13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저처럼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는 그것을 보면서, 이 저 나쁜 놈들, 저 악한 사람들, 그 악한 사람들과 싸워서, 우리가 승리하고, 저 악한 사람들과 대적해서, 우리가 무엇인가 성취해 내는, 그런 입장을 취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오늘 말씀에서는 저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둬라.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며 살아가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온갖 악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 우리가 가서 정복해 버리고, 그래서 그들을 완전히 무찔러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두고, 교회 안에서 그런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쫓아낼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이 세상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도록 그냥 내버려 둬라.
길을 지나가는데,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사람을 보면서, 분노하면서 그 우상을 부서뜨리면서, 왜 우상을 섬기느냐고, 그 우상을 부서뜨릴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무슨 악한 짓을 하든지, 그냥 내버려 두고, 교회 안에 문제만 해결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거꾸로 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거꾸로 해요.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교회 안의 죄인들을 엄격하게 다루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는 가만 놔둬.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야. 성추행을 저지른 목회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니까 그냥 내버려 둬. 우리가 왜 가만히 나서? 우리가 그것을 왜 그러고 있어?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건드시건 건드실 테니까, 그냥 내버려 둬 하면서, 두둔하고 있고, 오히려 밖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 나쁜 놈아, 왜 너희가 악한 짓을 했냐? 왜 이 나쁜 놈들아, 왜 너희가 이런 짓을 하느냐? 왜 법을 그런 식으로 만드느냐? 밖을 향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핏대만 높이고 있는, 거꾸로 하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시는지, 듣고 깨닫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원하는 대로, 우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이 세상의 방법대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칼을 빼들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정말 악을 행하며,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그 나쁜 놈들을 향해서, 칼을 빼 든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맙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의 말씀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빼고 싶은 게 많아요. 우리에게 칼이 있으면, 칼을 빼고 싶고, 우리에게 힘이 있으면, 그 힘을 보여주고 싶고, 우리에게 돈이 있으면, 그 돈을 보여주고 싶고, 우리에게 숫자가 많으면, 그 숫자를 보여주고 싶고, 우리가 가진 그 칼을 이용하여, 이 세상을 정복해 버리고, 그래서 보란 듯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은, 그런 열망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빼고 싶어 하는 그 칼을 도로 집어넣어라. 세상을 그렇게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내 능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면 이 악한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어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아니 이 세상을 말씀 한마디로 좌지우지하실, 우리 주님께서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죠. 그러면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군대를 조직해서 이 세상을 점령한 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죽으신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그래서 갈보리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그 주님은, 처참하게 마치 개죽음을 죽은 것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을 무시를 당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었지만, 그래서 저들이 승리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정복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며 영광 올려드리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하늘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십자가의 길이 이 세상을 정복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부터 35절의 말씀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방법으로 세상에게 말하는 거예요.
또한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관계하면서 이 악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켜갈 수 있습니까? 착한 행실을 통해서인 것이죠.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부터 16절 말씀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5장 13절에서 16절인데요. 제가 미리 안 알려줬나 봐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도록 하는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길이 효과가 있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는 게, 이 세상에 정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상이 꿈쩍 안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정말 선한 행실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주님께서 알려주신 방법대로 하고 있는데,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이 꿈쩍도 안 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이 세상은 더욱더 악한 모습이 계속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은 오히려 교회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이 세상이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더 악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여요. 과연 주님께서 알려주신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요?
이 세상이 너무나도 꿈쩍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조바심이 생겨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좌절감이 생겨요.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해요. 이 방법 갖고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이 세상은 우리가 이렇게 겸손하게 낮아지는 것을 전혀 돌아보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세상은 우리의 “점잖고 조용한 방법”으로는 이 세상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의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드냐면, 이 방법이 아니라 칼을 빼서 한 번 휘두르면, 그때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아는 척해줘요? 막 울고 떼쓰고, 그러면 아는 척해주지만, 착하게 행동하면, 아무도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방법에 대한 회의론이 너무나도 강하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주님께서 알려주신 이 방법은, 이 방법 갖고는 안 돼요. 점잖은 방법 갖고는 안 돼요. 조용한 법 방법 갖고는 안 돼요. 우리가 좀 돈을 동원해 봅시다. 우리가 사람을 동원해 봅시다. 우리가 권력을 한번 동원해 봅시다. 그래서 엄청나게 한번 칼을 한번 휘둘러 봅시다. “그래야 이 세상이 우리들에게 주목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는 패배주의가 우리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이죠. 놀랍게도 목사님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는 그런 반성경적인 고백이 나오는 것이 놀랍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26절에서 29절의 말씀에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의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씨앗을 뿌렸는데 그다음 날 나가봤더니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씨를 뿌렸는데, 아무런 열매가 안 맺혔네. 씨를 뿌려놓고, 그다음, 다음 날 나갔더니,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그냥 황량한 들판일 뿐이에요. 아이고 소용없나 보다. 아무런 의미가 없나 보다. 우리가 씨를 심은 게 무슨 능력이야? 아무런 효과가 없네.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는 것을 보세요. 씨가 자라는 걸 한번 보시라고요. 아무것도 없던 그 밭에서 싹이 나고 잘하고 열매가 맺히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엄청난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효과가 없는 줄 알았는데 효과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끝났구나 했는데, 온 세상을 점령하는 복음의 능력이 온 세상을 정복하게 된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조급해요. 마치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도 조급해서, 계란을 보고 빨리 깨뜨려서, 그 계란을 깨면 뭔가 병아리가 나올까 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깨뜨려버리는 거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는 너무나도 조급해버려요. 하지만 이 세상을 우리가 가진 돈과 힘과 능력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희생으로 섬김으로 따뜻하게 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미녀와 같아요. 야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미녀와 야수> 보셨습니까? 한번 포스터를 한번 봅시다. (제가 안 줬나요? 안 줬군요. 제가 만들어놓고 안 줬어요.)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자기 명령 하나면 모든 것을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모든 파워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미녀를 잡아다 놓고, 내 아내가 되라고 말하면, 그러면 내 아내가 되어지나요? 아니요. 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그 야수가 부드러워져야 돼요. 마음을 열도록, 미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사랑을 고백해야 되고, 친절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죠. 이 세상의 마음을 여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는 거룩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온유함과 너그러움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죠. 원수까지라도 치료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배워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게 아니라, 완고한 바리새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정말 중요한 가르침인 정의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믿음은 다 내팽개쳐버린 채, 종교적 형식만 잘 지키는 것 가지고, 그것으로 나의 의로움을 자랑하면서, 그런 종교적 형식을 제대로 잘 따르지 못하는 세례와 죄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는 바리새인들로 우글거리는 한국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세리와 창기들을 향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너희들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면, 그들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너희들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비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히려 되려 공격만 당하고, 모욕만 당하는 그런 참 비참한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모습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런 귀중한 교훈을 주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기 전까지는 어차피 이 세상 속에 발을 내딛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사는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이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 모두가 다 이 세상입니다. 그 세상 사람들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거나 혹은 절망하거나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그 가르침을 마음속에 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이 역사하는 그런 경험들을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