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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폭풍의 이유 (욘 1:9-12)

오늘 요나서의 말씀을 읽어주셨는데, 요나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라고 하는 곳으로 파송하시고 보내셨는데, 이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가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도망가는 이 요나를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풍랑을 일으키며, 바다에 던지게 하시고, 또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그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또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울며 회개하는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니느웨 성에게 내리기로 하셨던, 그 심판을 내리지 않고, 그들을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고요. 또 그 후속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불쾌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그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니느웨 백성을 얼마나 소중하게 아끼고 있는가? 내가 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가에 대해서, 정말 박넝쿨의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요나에게 들려주셨다고 하는, 참 감동적인 이야기가 요나서의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요나 선지자가 왜 그 명령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스라고 하는 말로 도망가려고 했던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나 선지자가 아주 나쁜 선지자였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요나 선지자가 그렇게 사악하고, 요나 선지자가 마음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그런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역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반대일 것 같아요.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이라고 한다면,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요나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것만큼은 좀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게 있는 거죠. 하나님 다른 명령은 다 괜찮은데, 그런데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 “이것만큼은 저한테 시키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거부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니느웨라고 하는 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이 성은 어떤 성인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철천지 원수와 같은 그런 민족이거든요. 적군입니다. 늘 미워하고 싸우고 그 니느웨 백성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게 되는, 그 철천지 원수와 같은 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할 때, 이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가 그것만큼은 하나님 제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이것만큼은 안 되겠다 하면서,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간다고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할 수 없는 겁니다. 시편 139편 7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지옥 속에 들어가서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시거든요.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은, 우리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성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거거든요. 내가 치료를 받기 위해서 수술대 위에 올라갈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는 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게 될 때, 그들을 그곳에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그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함께하신다고 하는 이 사실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엄청난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인데요.


이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시다고 하는 것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과 저주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면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피해서 저쪽으로 도망가고, 하나님의 피에서 저 나 혼자 골방에 쳐들어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기서 안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은밀한 가운데서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요나 선지자가 이렇게 도망간 것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스로 간다고 해서, 그가 무사히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요나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어쩌면 이 요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주님의 뜻대로 따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요나와 같은 마음들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 다 좋은데요. 제발 이것만은 저한테 시키지 말아 주세요. 그게 있어요. 하나님 예배드리려고 하면 예배드릴게요. 하나님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면 섬길게요. 무엇이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제발 이 말은 좀 하지 말아 주세요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사람마다 다 다를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인데 무슨 이야기가 예를 들자면 이런 말씀을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거죠. 원수도 사랑해라. 너를 미워하고 너를 향해서 비난하고 너를 배신했던 그 사람을 용서해 줘라. 너를 향해서 뒤에서 욕하고 침 뱉었던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해 줘라. 제발 그런 얘기 좀 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하나님의 말씀 다른 건 다 듣고 싶은데, 이것만큼은 내 마음에서부터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도망가게 되는 겁니다. 그 옛날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했지만 다시스로 도망가면서, 그렇게 도망가면 하나님에게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리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마치 그 말씀을 읽지 않은 것처럼, 오늘 그 말씀이 나에게 들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냥 그 말씀을 그냥 귀로 흘려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이 말씀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딴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버리고, 그냥 흘려버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쫓아오시는 모습이 요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시스로 향해 가는 그 배를 하나님께서 흔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풍랑을 일으키시고 그 배를 흔들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게 만드시면서, 그 요나가 탄 배를 흔들어버리는데, 그 흔들리는 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멀미해 보신 적 있습니까? 배 타고 저는 예전에 한 번 그런 적 있었는데, 얼마나 죽을 것 같은지. 지난번에 우리가 서울에 가서, “아바”라고 하는 뮤지컬을 봤는데, 거기서 그 광야 극단 대원들이 요나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는, 뮤지컬로 표현하는데, 얼마나 리얼하게 뱃속에서의 그 풍랑 만난 장면을 묘사하든지 기가 막히게 표현을 잘하더라고요. 막 이러면서 한 몇 분 동안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하는데, 보고 있는 제가 멀미가 날 지경으로, 그렇게 연기를 잘하던데, 그 상황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그 상황 가운데, 도대체 마른하늘에 왜 이런 풍랑이 다가오게 됐는가 분명히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항해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고, 천지를 분간할 줄 알고, 날씨를 분간할 줄 알고,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과학적으로 모든 기상을 살펴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옛날 사람들도 다 지혜가 있어서, 지금 이 상태면은 우리가 항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가 항해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안심하고서 출항을 했을 것인데, 그날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불어닥친 그 풍란 가운데서, 모든 선원들이 난리가 난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도대체 이게 누구 때문인가? 누가 잘못을 해서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인가 했을 때, 그때 요나 선지자는 그 순간에 자기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요나서 1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암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풍랑들이 사실은 전부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요셉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 사도가 고난을 당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이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난이 오기도 하고, 다양한 고난에 대한 다양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우리가 특정해서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 문제가 누구에게 있는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하지만 요나는 자기 때문이라고 하는 걸 알았어요. 내가 하나님을 피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내가 다시스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흔드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어쩌면 만일 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깨달음을 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다시 나아가고 돌이킬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영적인 고난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유익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결국 요나는 바닷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자로 다시 사용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이야기가 요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야 될 텐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도망갔을 때, 그 요나를 굳이 쫓아가서, 요나 선지자를 회개시키고, 그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시면서까지, 요나를 회개시켜서, 반드시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이렇게, 억지로 막 회개시켜서, 왜 억지로 안 가겠다고 하는 요나를 굳이 사용해서, 그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 맞아! 요나가 니느웨 말을 할 수 있는 외국어 능통자였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외국어는 필수야! 그렇게 결론을 내리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론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백성들을 회개시키려고 한다면 요나가 반드시 필요했을까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요나가 안 가겠다고 하면 누구 보내면 되나요? 다른 선지자 보내면 돼요. 이사야 선지자 보내든지, 예레미야 선지자 보내든지, 아니면 문갑열 장로님 보내든지, 회장이니까 가라. 그러든지, 근데 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가겠다고 하는 그 요나를 붙들고, 다시 끌고 와서, 니느웨로 보내시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은 니느웨를 회개시키고, 니느웨를 온전하게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것만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요나 한 사람 변화시키고, 요나를 온전하게 바꾸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를 사용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부르시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 사명과 그 의무와 책임들이 사람들마다 다 다를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로 만드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사람의 친구로 만들고,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교회에서 이런 사명을 감당하도록, 또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그 자리로 불러주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없어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 하나님은 아무도 필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자체로 충만하신 하나님이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그 사명을 맡기시고, 강도 만난 자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연약한 자들의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만드시고, 힘든 자들에게 증거가 되어 주게 만들어주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고, 성숙시켜 나가시고, 그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더욱더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마치 거지인 것처럼 우리의 물질적인 헌신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우리의 힘을 요구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것들을 요구하시면서, 주의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이유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부요하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님의 그 가난하신 것과 같은 일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만드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엘리야 선지자를 사르다 과부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것이죠. 그 엄청난 기근 속에서 무엇 하나 먹고살 수 없는 그 심각한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엘리야 선지자를 먹이시고 살리시게 하시다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한 가정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보내려면 좀 부잣집에 좀 보내지, 보내려면 좀 잘 사는 집에 좀 보내야지. 하나님께서 실컷 보냈다고 하는 집이 망하는 집이에요. 하나님께서 엘리아 선지자 살리겠다고 보내신 집이 과부 집이에요. 그날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밀가루로 마지막 기름으로 이거 먹고 이제 죽자. 아무것도 더 이상 남아있는 그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보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부잣집이 아니라 그 집으로 보내셨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에 매일매일 은혜로 공급해 주신 거예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은 엘리아 살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과부의 가정, 기근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 연약한 가정을 살리시고 돕기 위해서, 그 가정에 엘리아를 돌보는 사명을 부여해 주신 것이죠.


그 옛날 요나를 추격하시면서 다시 회복시키신 우리 주님께서 여전히 오늘날에도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이 일까지 해야 되나 이런 힘든 일 내가 해야 되는가? 왜 실컷 일하고 욕먹고, 아무 일도 안 했으면 욕먹지 않을 텐데, 오해받고 미움을 받고 손가락질당하고, 비아냥거리고 그런 일들을 왜 내가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데 바로 그 길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로 부르시는 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그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길이 은혜의 길이오, 축복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반응하며, 믿음으로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우신 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니 외로 내려가신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았는데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를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신 하나님, 오늘 하루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 나에게 치료할 환자들을 보내주시고, 나에게 배울 아이들을 보내어 주시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어 주시고, 우리 가족들을 내가 돌볼 수 있게 해 주시고, 울고 보채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 그 사명을 내게 주시고, 또한 우리들 가운데 주신 그 모든 그 사명이 사람들마다 다 틀릴 텐데 아무 힘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할 수 있는 그 기도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고, 내게 마지막 힘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인 것 같지만, 그 모든 사명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부요케 하시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고백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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