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이 죽는 날이 임박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 된 솔로몬을 향해서 마지막 유언을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했다”라고 하는 이 표현을 보면서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에게도 죽는 날이 찾아온 겁니다. 그 옛날 골리앗을 무찌르며 민족의 영웅으로 한 순간에 나타나게 되었던 이 다윗이,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와 압살롬의 손에서 구원을 받고 살아남았던 용사 다윗이,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하는 그 말처럼,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잊고 살지만, 우리 모두는 다 한 가지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죠. 안 그럴 수 있는 사람, 손 들어주세요. 나는 안 그럴 것 같아. 나는 계속 살 것 같아. 그렇습니까? 아니죠. 누구나 다 모두가 다 가야만 하는 길이 바로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떠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안 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한 번 반드시 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안 겪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겪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것들을 피해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모든 경험이 다 똑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것은 그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늘 잊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반드시 우리의 인생을 마감할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알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아, 나는 그런 거 준비 안 해. 아, 나는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 나는 그런 거 염려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해서 안 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이 죽음이란 것이죠.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의 날을 계수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시편 90편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의 날을 계산할 수 있는, 내 인생이 천년만년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산하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자신의 마지막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망각하고,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나온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해주셨는데, 그 어리석은 사람은 풍년이 들게 되자 곳간을 헐면서 새로운 곳간을 짓고, 그리고 모든 곡식들을 거기 속에 쌓아두면서 “내 영혼아, 이제는 평안히 먹고 쉬자. 이제는 평안히 즐기자.” 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이 어리석은 사람아,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 내 영혼을 하나님께서 불러가신다고 한다면, 네가 오늘 쌓아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쌓아놓았는데,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주님께서 질문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누가복음 12장 20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 하나님께 헌신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지혜로운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첫 번째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이고요. 두 번째는 그 솔로몬을 향해서 유언을 해줍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경험을 볼 때, 무엇이 형통한 길인가? 무엇이 복된 길인가? 무엇이 정말 좋은 길인가를 너무나도 뼈저리게 알았던 이 다윗이 자기 아들을 향해서 유언을 하며 권면하는 겁니다. 왕으로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형통할 수 있는가? 어떤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런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인가? 그 비결을 이 솔로몬에게 알려주었는데요. 열왕기상 2장 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무엇이 되라? “대장부가 되라.” 이렇게 솔로몬을 향해서 이야기해 준 거죠.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대장부가 되라니 어? 대장부가 된다고 하는 말은 우리 한국적인 문화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인데, 어떻게 이 다윗이 솔로몬을 향해서 대장부가 되라고 많은 말을 했을까? 대장부가 되라. 대장부가 뭡니까? 대장부 대장부를 뭘 대장부라고 하죠? 건강하고 씩씩하고 용맹한 사나이를 가르쳐서 가리켜서,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죠. 남자다운 남자, 용맹한 자, 건장한 자, 아주 씩씩하고 용맹스러운 자를 가리켜서 대장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윗도 솔로몬을 향해서 정말 우리 한국적인 그런 개념으로 대장부가 되라고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하면 무엇을 봐야 되죠? 히브리 원문이 그렇게 돼 있나? 한번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원문을 살펴보니까 “나는 간다. 모든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간다. 그러므로 강하라. 남자가 되라.”라고 이 다윗이 솔로몬을 향해서 말한 거죠. “너는 강해져라. 너는 남자가 되어라.”라고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것을 약간 의역해가지고,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라고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되라고 하는 얘기는 무슨 얘기냐? 강해져라 이 말이죠. 강해져라. 강해져야 살아남습니다. 유약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강해져야 된다”라고 그렇게 권면하고 있는데, 강해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유약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무엇이 강해지는 비결입니까?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잘 확실하게 잘 모른다고 한다면, 그다음 구절 읽어보고, 앞의 구절 읽어보고, 전후의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 단어의 의미가 설명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솔로몬을 향해서 다윗이 하는 말이 “너는 강해져야 한다.” “너는 남자가 돼야 된다”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도대체 남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강해져야 된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그다음 구절을 살펴보면, 강하게 되는 그 길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 3절의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윤리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켜라. 그리하면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형통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모든 일에 강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담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가? 강해져야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강해지는 게 무엇이냐? 다윗은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그 성경 말씀 계명의 말씀들이 있는데, 이 성경의 말씀을 네가 지켜야 한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강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강해지는 길이 될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나 주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나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교회에 와서 앉아 있다는 걸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을 사랑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게 뭐죠? 그 말을 듣고 그 말에 따라 해주는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얘기해 놓고, 아내가 말하면 듣지도 않는 사람은 사랑한다고 얘기할 수 있나요? 아니요. 사랑은 무엇이냐? 사랑은 그 말에 내가 복종하는 거예요.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는 게, 어디서 나타납니까? 이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자녀들의 말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죠. “아빠,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러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을 수밖에 없어요. 아이스크림을 사주려고 하는 그 마음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어요. 오늘 내가 집에 들어갈 때,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들어가야 되겠구나. 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가 하는 말이 그냥 흘러가는 게 아닙니다. 아이의 말이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의 그 행동을 딱 구속해 버려서, 아이의 말대로 하고 싶은 그런 행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게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의 말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내가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렸으니까, “하나님과 함께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는,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나서 그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무엘서의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울왕의 문제가 바로 그 문제였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싶었어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쟁 가운데 함께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케 해 주기를 원했어요.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셔 주세요.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해 주세요. 그런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뭐예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겠는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그게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저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만을 바랄 뿐, 그래서 제사를 드려보려고 하고, 뭘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 쓰고 싶지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고, 그 사울 왕 가운데는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 순종한다고 하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어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시옵소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멀리하실 것만 같아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회개하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말라고 외치면서, 그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나와 함께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고백했던 것인데요. 그 경험을 가지고 있던 다윗이 이 솔로몬에게 권면하는 겁니다. 너는 강해져야 되는데, 어떻게 강해져? 하나님이 함께할 때, 강해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기도에 응답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까? 이사야서 59장 1절, 2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오.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 나의 기도에 함께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면 그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하시길 원하신다고 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그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지난번에 안재우 소장님이 오셔서 복화술로 이렇게 해 주셨는데 너무나도 재미있었죠.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는 분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인형이 실시간으로 이렇게 반응을 하면서 말을 하지 아직도 모르시는 분이 계시는데, 아무튼 그 안재우 소장님이 그 하면서, 참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하나 했던 것 같아요. 그 깡 여사가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아도, 그 뒤에 있는 그 손을 빼버리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그 모습 그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강해져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겠는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와 함께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마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보면 그 길이 손해 보는 것 같고, 세상적으로 보면 그게 참 자존심 구기는 일 것 같고, 너무나도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한다면, 믿음으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오늘 열왕기상 2장 4절 말씀 가운데서는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내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진실이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내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강하게 되는 것이고, 그럴 때 왕조가 끊이지 않을 거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이 다윗의 유언대로 살았을까요? 살지 못했어요. 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을까요? 살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오는 왕들도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똑같이 실패하고 있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저주받은 인생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을 다 순종할 수 있고 대장부가 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왕으로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연약함 가운데서 건져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험하고,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강하고 능력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 순간순간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