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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유언 (왕상 2:5-9)


오랜만에 우리 열왕기상의 말씀을 살펴보게 됐습니다. 열왕기상 2장 1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서 전반부의 내용이었고,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했던 유언 가운데 후반부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지난 시간이 약 한 달 정도 됐었던가요? 두 달 정도 됐었던가요? 아무튼 지난 시간에, 우리가 열왕기상 2장 1절에서부터 4절까지 살펴보면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했던 그 유언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 그 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그 유언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간단하게 말하면 “솔로몬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게, 형통한 길이다.”라고 유언해 주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도 우리 자녀들, 손주들을 향해서 유언해 주거나, 또는 영적인 교훈을 해줄 일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그게 복된 길이고 형통한 길이라고 하는 그런 말씀들을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해주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그 유언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이제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하면서 유언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유언의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 장군이 있는데, 그 요압 장군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 길르앗의 바르실래의 아들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있는데 그 시므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하고 하면서, 그 유언을 해주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4절까지는 좀 추상적이고 큰 원칙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면, 오늘 읽은 5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구체적인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각각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유언을 하고 있는데요. 스루야의 아들 요압 장군에 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 요압 장군으로 하여금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스올에 내려간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냥 죽는다는 얘기죠. 스올에 내려간다고 하는 이야기는 “죽는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나라 표현의 황천길로 갔다든지, 뭐 돌아가셨다든지, 아무튼 뭐 등등 여러 가지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많은 표현들 중에 “이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냐면, “스올에 내려갔다”라고 하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스루야의 아들 요압으로 하여금, 그의 백발이 편안하게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다시 말하자면 죽을 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하게, 아주 행복한 가운데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뭔가 징계를 하고 벌을 내려서, 이 요압에게 어떠한 벌칙을 가해줘야 되는 것이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징계도 받지 않고, “그냥 편안히 잠들게 만들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유언해 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길르앗의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은총을 좀 베풀어라. 이 말이에요. 은총을 베풀어라. 다윗이 피난길을 갈 때 이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싸가지고 나오면서, 이 다윗을 엄청나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서 내려온 그 다윗, 아무런 힘도 없는 그 다윗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놀랍게도 이 바르실래라고 하는 사람은 다윗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 선대 했던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어서 다윗이 말하는 겁니다. 이 바르실래의 아들들을 아주 존귀하게 여겨 주어라. 이 바르실래의 아들들을 왕자의 식탁에 초대해서 같이 먹게 만들고, “최고의 존엄을 갖춰서 대우를 잘해줘라.”라고 부탁을 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게라의 아들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유언을 해줬는데요. 시므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므이가 누구죠? 다윗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에 욕을 하면서,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렸던, 어쩌면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참 원수와 같은 사람이 누구였는가? 이 시므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서 돌을 던지면서 비난하고 욕하고 있을 때, 다윗은 그 시므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가만 내버려 둬라.” 그러면서 다윗이 했던 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시므이의 일로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실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 시므이를 보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해 내고, 내가 정말 바세바와의 그런 추문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을 죽이는 일까지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한 그 저주와 욕을 하나님께서 이 시므이 입을 통해서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사람이 욕하는 것은 그냥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욕하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다윗은 시므이에게 원수를 갚지 아니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부탁하기를, 이 시므이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죄 없는 자처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다윗이 했던 이 세 가지 유언을 우리가 한번 살펴보고 있는데요. 어쩌면 두 번째 유언은 누구나 다 이해할 만한 유언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바르실래의 아들들을 잘 대우해 주어야 한다.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사람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누구나 다 이해할 만한 부탁이라고, 이해할 만한 유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해봐야 되는 유언이 무엇이냐면 요압에 대한 유언과 시므이에 대한 유언입니다. 과연 이렇게 다윗이 요압을 그냥 편안히 죽게 만들지 마라. 시므이를 죄 없는 자로 생각하지 말고, 시므이가 편안히 죽게 하지 말라.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처벌해야 된다.”라고 하는 식으로 유언을 해주고 있는데, 다윗이 이렇게 유언한 것은 바람직한 유언이었을까요? 잘못된 유언이었을까요? 어떤 것이겠습니까? 다윗이 유언을 잘한 겁니까? 유언을 잘못한 겁니까? 잘 모르겠죠? 잘 모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했던 말,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했던 행동, 이것들이 그냥 무비판적으로 우리가 그대로 받아서 따라 해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생각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둘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 이 사람은 악한 사람,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을 하는 거죠. 다윗 그러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사울 그러면, 나쁜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 가롯 유다 그러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 베드로 하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 말하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나쁜 사람이 말하면 그 사람은 다 나쁘다고, 이렇게 너무나도 단순화시켜서 성경을 읽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경을 읽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첫째로 왜 바른 방법이 아닌가?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나요? 어떻습니까? 그런 법이 없어요. 소설에는 그렇게 나오지만,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에게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겁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어요. 저는 어때요?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몰라요? 오늘 집에 가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나를 모른다고 했다?” 근데 근데 그게 정답이에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어요. 항상 좋은 게 아니에요. 항상 나쁜 게 아니에요. 나쁜 사람도 좋은 일을 할 때가 있고, 좋은 사람도 나쁜 일을 할 때가 있고, 의도적으로 나쁜 일을 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아도 나쁜 일을 할 수도 있고, 실수로 나쁜 일을 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또한 선한 말을 할 수도 있고, 바른말을 할 수도 있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은 겁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편, 나쁜 사람 편, 선한 사람, 나쁜 사람, 우리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단순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게 사람이 아닌 거예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은 복잡해요. 좋은 면이 있으면서도 나쁜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서도 좋은 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행한 행동들이 다 좋은 행동인가? 나쁜 행동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입다라고 하는 사사가 자신의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리며 서원을 갚았는데, 그 행위는 좋은 행위였을까? 나쁜 행위였을까? 사울이 제비를 뽑아서 모든 일을 판단했는데,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항상 모든 일들을 우리가 판단할 때 이것이 과연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성경에 명확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판단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둔 것은 다윗이 했으니까 괜찮은 것이 아니라, 왕이 여러 명의 첩을 두지 말라고 했던 하나님의 드러난 뜻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나쁜 일인 것이죠. 그래서 이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예수님을 제외하면, 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동이 잘한 행동인지 못한 행동인지, 우리가 따라도 되는지, 따르지 말아야 될 행동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판단을 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러한 유언을 한 것이 과연 바람직한 유언이었는지, 바람직하지 않았던 유언이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열왕기상 2장 1절에서부터 4절까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형통하는 길이라고 유언했을 때, 그것은 바른 유언이라고, 그것은 우리도 해야 될 유언이고 따라 해야 될 말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요압에 대해서 바르실래에 대해서 시므이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과연 어떤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되는지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바르실래에 대한 유언은 그것은 맞는 것 같아요. 바르실래가 은혜를 베풀었고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사랑의 빚을 지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선대하고 은혜를 갚는 것은 그것은 다윗의 때뿐만이 아니라, 솔로몬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져서, 그렇게 은혜를 갚는 일이 지속된다고 하는 것은 바른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요압에 대한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서 시므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징계해서 그리고 벌을 내려서, 그냥 편안히 죽음을 죽게 만들지 말고, 반드시 그 죗값을 물으라고, 다윗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는데요. 특별히 시므이에 관한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가 혼란스러운 겁니다. 왜 혼란스럽죠? 왜냐하면 다윗은 예전에 용서해 줬어요. 시므이가 욕할 때, 자신의 신하들한테 “가만 내둬라. 시므이 죽이지 마라. 시므이가 욕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시킨 일이다. 가만 내버려 둬라.” 하면서, 죽이지 못하게 했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 과정 가운데, 시므이가 빨리 눈치를 채고 다윗 왕 앞에 엎드리면서, “다윗 왕이시여,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엎드렸을 때, “내가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 용서해 주겠다.” 하면서, 아주 너그럽게 용서를 해준 일이 있었고, 우리가 사무엘서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다윗의 그 용서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성경적인 가르침이었는가! 우리가 예전에 사무엘서를 수요일마다 살펴보면서 이 부분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몰라요. 다윗이 자신을 저주했던 이 시므이를 용서해 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다윗의 모습을 본받아야 되겠고, 우리도 나를 미워하고 나에 대해서 그냥 나쁜 악한 말을 해대고,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정말 악하게 행하는 그 나쁜 사람들을 내가 친히 원수 갚을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던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서, 이 다윗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고,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서, 이제 세상 떠나기 전에, 솔로몬을 향해서 유언하기를, 그 시므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처벌해서 그의 죗값을 치르게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겁니다. 다윗이 이중인격자였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위선적으로, 마치 마음이 너그러운 것처럼 표현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없는, 그저 속마음까지 진실하게 토할 수 있는 자기 아들에게는, 다윗의 본심을 솔로몬에게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게 맞을까? 다윗이 유언한 게 정당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될지 잘 모를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다윗의 이 유언이 정당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보면서, 다윗이 이중인격자였다거나 다윗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과연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본다고 한다면,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서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잘못했어요. 어떤 사람이 심각한 죄를 저질렀어요. 그러니까 용서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니까, 다 용서하자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까요? 생각을 해봐야 된다 이 말이에요. 용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했으니까, 그냥 뭐 도둑질했든, 무슨 악한 짓을 했든, 그 잘못들을 전혀 다루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종종 있습니다마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면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지 않아요. 용서는 용서이고,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바로잡아주는 일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용서한다고 하는 얘기는 내가 그 사람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용서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사적으로 그 사람을 향해서 복수해 버리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이 행한 악대로, 그 사람의 방식대로 똑같이 갚아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잘못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됐어. 뭐. 신경 쓰지 말자.” 그런 일, 나쁜 일 있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냥 내버려 두자.”라고 하는 것이 용서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을 베푼 자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justice)이죠? 그 선에 대해서 갚아주는 것이 정의(justice)입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에게 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선을 행한 자에게는 그 아들들에게 갚을 것을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을 행하는 자를 내가 마음으로 용서하고 미워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는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가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방치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요압과 시므이의 경우, 다윗이 개인적으로 복수해 버리고,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아버린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게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여서 과도한 반응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다윗이 자신의 왕위를 솔로몬에게 내 물려주면서, 솔로몬으로 하여금 왕으로서의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왕의 일이 무엇입니까? 왕의 일은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악을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을 철저하게 해주는 것이 왕의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개인적인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실은 개인적인 차원과 왕의 차원이 뒤섞여 있어서,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그 미완의 공의의 문제를 솔로몬에게 넘겨주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공의를 잡으라고 말씀해 주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늘 한쪽으로 치우쳐요. 용서를 안 하면서 정말 미워하고, 그러면서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정반대로 용서한다고 하면서 뭐 아무것도 징계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 사람을 바로잡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제대로 바른 길로 서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죄를 짓고 있어도, 그냥 아무런 상관이 없이 방종으로 흐르는, 양 극단으로 흐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는 그 중간을 해야 되는데,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잘못을 바로잡아서, 그 사람이 선한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일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걸 하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양쪽으로 치우치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팔복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폭력적이 되기 쉽고, (그림이 있으면 한번 보여주세요.)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이 폭력적이 되기 쉽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불의 앞에서 무기력해지기 쉽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정의를 추구하되 평화의 방법을 사용해야 된다.”라고 몇 년 전에 제가 팔복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역시 용서도 마찬가지예요. 용서도 무엇인가? 우리는 용서를 안 하고 원수를 갚고 복수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에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공의를 실천한다고 하는 것이 미워하고 복수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는 용서한다는 것이 공의는 사라져 버리고, 정말 하나님의 공의가 땅바닥에 떨어지도록 방치해 버리는 결과로 나타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의 유언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자면, 솔로몬으로 하여금 왕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교훈해 주는 겁니다. 우리가 교훈하는 방법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원칙을 말함으로써 교훈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의 방법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언급해서 하나의 원칙을 유추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1절에서부터 4절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큰 원칙을 말하면서 훈계했던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요압의 케이스는 이렇게 해결하고, 바르실래의 케이스는 이렇게 해결하고, 시므이 케이스는 이렇게 해결하라고 하는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수립하도록 하는 것이 왕의 역할인데, 그 역할을,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다윗은 유언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권력자가 악을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그 피해는 백성들이 다 당하잖아요? 그런 나라는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온갖 비리와 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처벌되지 않고 그냥 잘 나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는 정말 절망적인 사회가 되는 겁니다. 예전에 온두라스라고 하는 곳에 갔더니, 거기는 조폭들이, 갱단들이 그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데, 경찰인력이 그들을 제어하지를 못해요.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은 정말 불안하기 그지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솔로몬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정의가 바로 서도록 왕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 여러 가지 케이스들을 이야기하면서 유언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그 자리에서 솔로몬이 적절하게 선을 행한 자에게 선을 베풀고, 악을 행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일을 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사입니까? 그러면 교사로서의 사명이 있을 겁니다. 의사입니까? 그러면 의사로서의 사명이 있을 겁니다. 공직자입니까? 공직자로서의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사명을 맡겨주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펼쳐지도록 우리 모두가 다 수고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부모입니까 우리가 구역장입니까? 우리가 권사요 장로입니까? 그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감당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심판자 되시는 주님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이런 다윗의 유언대로 안 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결국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해결해 주시고 판단해 주실 것을 기억하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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