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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나라 (잠 14:28-35)

비교적 좀 긴 본문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왕이 되는 사람을 위한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영화로운 나라, 좋은 나라, 좋은 국가는 어떤 나라인가? 어떻게 하면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왕이 가져야 될 덕목은 어떠한 것인가와 같은 주제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실 잠언서 전체가 왕이 될 사람을 가르치는 그런 주제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 왕자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왕이 되어야 할 것인가? 어떤 임금이 되어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면, 잠언서 전체가 왕의 덕목, 왕이 어떻게 통치하고, 어떤 나라를 만들어가야 될 것인가? 그런 주제와 전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것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왕이 될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주은 교훈이라고 한다면, 왕과는 전혀 관계없는 우리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말씀인가요? 그래도 좀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말씀입니까?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그런 말씀일까요?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에게도 유용한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아니겠지만, 우리들에게도 우리만의 조그마한 왕국이 있습니다. 우리만의 내가 통치하는 작은 그런 나라가 있는 것이죠. 적게는 내 마음의 왕국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그런 공동체, 그리고 내가 하는 그런 사역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내가 그곳에서 왕적인 그런 권위를 발휘해야 하는 조그마한 왕국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또한 우리들은 그런 조그마한 왕국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과 하와를 그냥 하찮은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할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고, 온 우주의 왕이신데, 그 왕권을 아담에게 주시면서, 그 왕권을 사람에게 부여해 주시면서, 너희가 이 세상을 다스리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왕으로 세워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인생 자체가 온 세상을 다스릴 그런 왕과 같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 우리의 각자의 영역 가운데서, 내가 하는 그 사역의 현장, 내가 맡게 된 그 사명의 현장들이 사실은 우리들의 조그마한 왕국이오, 또 거기서 우리가 왕처럼 사역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고 하면, 오늘 잠언의 말씀, 그리고 잠언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말씀들이 사실은 왕이 될 사람들을 위해서 주는 교훈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누굽니까? 왕이에요. 우리 옆 사람 한 번 보고, “전하, 납시었습니까?” 인사 한번 하십시오. 맞아요. 웃을 게 아니고, 왕 같은 존재들이에요. 이 말씀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부여받은 우리들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이 반드시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번 오늘의 말씀들을 살펴보겠는데, 전부 다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 몇 구절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그 지혜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4장 2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오.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백성이 많아야, 왕이 영광을 받는 것인데, 백성이 없으면, 백성이 줄어들면, 그것은 그 왕국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 왕의 모습도, 정말 패망한 왕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잠언서 14장 28절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그 당시에 한 나라의 국력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죠. 그 옛날에는 어떤 나라가 정말 강력한 나라인가? 아닌가? 이 나라는 정말 힘 있는 나라인가? 힘이 없는 나라인가를 판단하는 그 아주 중요한 기준이 백성이 많은가 적은가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가 백성이 많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강대국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실 때, 사람이 별로 없는, 얼마 인구가 없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그런 나라를 선택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텐데, 아무튼 백성이 적으면, 그 나라는 힘이 약한 나라 약소국이고, 뭔가 부족한 나라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러니까 언제든지 이 기준이 통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다른 것으로 국력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단순히 그 나라의 인구가 얼마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국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요소들이 많이 고려가 될 것입니다. 얼마나 산업이 발달했는가? 얼마나 경제력이 있는가? 군사력이 어느 정도인가? 또는 외교 능력이 어느 정도 있고,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어떤 지도력을 발휘하는가? 문화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등등 다양한 지표로 그 나라의 힘과 국력을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강력한 나라, 정말 좋은 나라, 힘 있는 나라, 그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왕이 만들 수 있습니까? 왕이 만들 수 없는 것일까요? 간단하게 문제를 좀 단순화시켜서 오늘 28절의 말씀대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백성이 많으면 왕의 영광이라고 했고, 백성이 별로 없으면 그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라고 했는데, 인구가 많아지고 적어지고 하는 게, 왕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냥 인구가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하는 것입니까? 왕의 역할이 있는 것인가요? 없는 것인가요? 있어요? 왕이 어떻게 인구를 늘리죠?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할 겁니다. 그건 왕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인구가 자꾸자꾸 줄어들어서 걱정이잖아요. 결혼도 안 하고, 결혼해도 안 낳고, (그런데 아기를 낳으니 얼마나 좋아요. 애국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애국하고 있다고 칭찬도 좀 해주시고), 그런데 아기 낳으라고 얘기한다고 해서, 아기를 낳습니까? 그게 안된단 말이죠. 왕이 인구를 늘리고 싶다고 해서 늘릴 수 있는 게 아니고, 왕이 인구가 줄어드는 걸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왕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별 의미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왕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죠. 종종 어떤 사고가 터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그 일을 맡은 실무 책임자들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지휘 계통 선상에 있는, 가장 높은 최고 책임자에게 그 책임을 묻고 문책하는 일이 있을 겁니다. 어느 회사의 창고가 불이 났다고 한다면, 아니면 어느 부대에서 어느 한 병사가 탈영을 하거나, 어느 부대에서 사고가 터지게 된다고 하면, 그 병사들이 그 내부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문제들 때문에, 사단장이 옷을 벗게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실 사단장이 그것을 어떻게 말려요? 사람이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수고한다고 애써도, 일일이 일이 다 간섭할 수 없잖아요? 사람이 아무리 밤을 새워서 지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고 한다고 하면, 그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집 짓는 자의 수고가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리 지휘관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저 말단의, 저 내무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일들까지 어떻게 사단장이 일일이 다 간섭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지만 우리는 그 최고 책임자에게 문책을 합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어떤 최고 책임자가 있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많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의 역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최고 책임자의 역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좋은 지도자가 있느냐? 좋지 못한 지도자가 있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똑같은 자원을 가지고도, 똑같은 사람들을 가지고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예를 들어서, 합창이라든가 오케스트라 같은 경우에서 정말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똑같은 멤버를 가지고 있는 합창단, 똑같은 멤버를 가지고 있는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그런데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소리가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예전에 어떤 교수님이 지휘를 잠깐 하게 되는 것을 제가 옆에서 바라보게 됐는데요. 똑같은 성가대였어요. 똑같은 성가대인데, 그런데 어떤 성악과 교수님이 딱 오셔서, 들어보더니만 지적하면서 딱 연습을 시키는데, 정말 짧은 시간에 정말 다른 소리가 확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정말 지휘자가 엄청난 역할을 하는구나! 그냥 똑같은 그 멤버들인데, 지휘자가 누구냐에 따라, 음색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아주 실감 있게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합창과 오케스트라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팀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죠. 똑같은 스포츠팀인데, 똑같은 멤버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스포츠팀을 지도하고 있는 감독이 어떠냐에 따라서, 능력에 따라서, 정말 형편없었던 팀이 좋은 팀으로 변하기도 하고, 좋은 팀이었던 팀이 나쁜 팀으로 변하기도 하고, 좋은 지휘자, 좋은 감독, 좋은 지도자가 있는 것이 사실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왕이 좋은 왕국을 만드는 것이죠. 좋은 왕이 있을 때,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인데요. 백성이 많아지는 것, 그것은 왕의 영광이라고 했는데, 그냥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아지게 만드는 왕의, 또 다른 특별한 모습들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나라를 만들고, 정말 좋은 나라라고 하는 것은 국가로서의 나라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정이라든가, 우리의 사업체라든가, 우리가 하는 그런 어떤 사역이나, 영역, 그 모든 것들이 모든 분야들이 나아질 수 믿기 위해서는, 좋은 사역자가 필요하고, 좋은 사람들이 필요할 텐데, 잠언서에서는 그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일들이 필요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29절의 말씀에서는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왕이 노하고 화를 내면, 그러면 무엇인가 잘 돌아갈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노하는 자가 그 일을 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급하고 화를 내기 시작하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만일 지도자가 화를 내고 분노한다면, 그 아랫사람들이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빨리빨리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겠지만,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다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 같고, 그래도 어떤 성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되겠지만, 사실은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분노하는 것으로, 그리고 조급하게 모든 일을 해나가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뿐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면, 그때서야 사람들이 주목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내는 것을 너무나도 종종 애용할 때가 있습니다. 잠잠하면 아무도 아는 척을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면, 사람들이 반응하기 때문에, 그게 정답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이 있지만, 성경은 일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화를 내는 것이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화를 내게 되면 조급한 마음에서 화를 내게 되면, 결국 어리석은 일을 하게 되고, 잘못된 결과를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노하고 화를 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잠언서 15장 1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언서 15장 18절의 말씀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분을 내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툼을 일으키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잠언서 29장 22절의 말씀 가운데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하는 자는” 무엇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무엇이 많다? “범죄함이 많으니라.” 노하고 성내면, 선한 일을 이루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을 일으키기만 하고, 범죄를 만들기 하는, 그런 잘못된 결과만 가져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30장 33절의 말씀 가운데서도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무엇이 남이라? “다툼이 남이니라.” 노하게 되면 다툼을 유발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노함으로써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사람들을 동의하게 만들고, 그리고 설득하고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오늘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쉽게 분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날마다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저의 이 분노하고 화를 내는 저의 못된 성격을 고쳐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루를 천년같이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며 참아주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참고 인내하며 주의 선한 일들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을 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선한 결과가 나타날 수 없고, 성을 내는 것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낼 수 없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4장 3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분노하지 말고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또한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왕 같은, 우리들이 마음 가운데 너그럽고 사람들을 인정해 주고 포용하고, 그리고 평온한 마음으로,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는 그런 온화한 성품을 가져야 될 것이고,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미워하는 마음들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제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은 뼈를 썩게 한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사울왕이 떠오르게 되는 거예요. 사울왕은 누굽니까?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지만, 실패한 왕이었던 것이죠. 왜 사울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의 마음 가운데,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누가 나타날 때 시기했습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한 용사가 등장하게 되었을 때, 사울왕은 기뻐하고 감사하며 좋아한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그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안타깝게도 이러한 결정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결정인 것이죠. 다윗을 인정하고, 우리 신하 가운데, 우리 가운데 이런 어마어마한 용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와 함께 같이 그 나라를 만들어갔다고 한다면, 사울왕의 길도 성공의 길을 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행보를 하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다윗으로 인하여 잘 되면, 누가 잘 되는 거예요? 사울 왕이 잘 되는 거잖아요? 다윗, 다윗이 적군을 무찌르고, 다윗이 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그래서 이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해진다고 한다면, 사울왕이 높임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왕은 그 다윗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해 버렸고, 그래서 그 다윗을 밟아버리기 시작한, 그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다윗을 죽이려고 하면서, 결국은 누가 죽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뼈도 썩고 속도 썩고, 나라는 망하게 되고, 다윗을 무찌르면서 자기 자신을 무찌르는 거예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자기 몸을 자기가 망가뜨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라는 하나의 몸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유기적인 그런 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몸의 이 한 일부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팔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내 팔을 보고, “이게 너무 힘이 세네?” 하고, 내 팔을 잘라버리면 내가 불구가 되는 거예요.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다 한 가족이요. 한 지체요, 한 몸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잘하면, 그게 나의 자랑거리가 되고, 내가 행복해야 되는 거죠.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누가 높아지면, 누가 좋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같이 즐거워해야죠. 같이 좋아해 줘야죠. 왜? 나에게 좋은 일이니까, 우리 가족이 있어도, 좋은 일이고, 한 몸이 좋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가운데 있는 어떤 사람들이 잘 된다고 하면, 시기하고 질투도 하고, 그리고 깎아내려야 됩니까? 아니요. 그것은 우리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된다 이 말이에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은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 누군가 박수받으면, 함께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닫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1절 말씀 잠언서 14장 31절 말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이니라.” 왕이 해야 할 그런 일들을 또 3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가난한 자가 있으면, 왕은 그 가난한 자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돌봐줘야 되는 거죠. 불쌍히 여겨야 되는 것이죠. 그를 학대할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그래서 그 가난한 자의 아픔들을 달래주고 해서, 그 사람을 가능하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들이 필요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다 이 말이에요.

가난한 자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됩니까? 도움이 안 됩니까? 가난한 자가 무슨 도움이 돼요? 옛날에는 옛날 독재 시대 때는 가난한 자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의 얼굴에 먹칠하는 저 가난한 사람들, 우리나라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저 가난한 사람들은 올림픽을 해야 되니까, 쫓아내 버려야 되겠다. 쓸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우리나라가 멋있는 나라로 보여주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그런 정책들을 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사람들을 수단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가 누굽니까? 가난한 자도 가난한 자도 다 포함된 게 우리나라예요.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다, 그 영남 사람이든 호남 사람이든, 연약한 형편에 있는 사람이든지, 모두가 다 우리나라 사람들인 것이고, 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잘 되는 것을 꿈꿔야 하는 것이죠. 그게 아니고, 어느 한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인데, 이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시킨다 하면서, 이 사람들을 학대하고 없애버리고 하면,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제거해 버리면 좋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라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은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관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더러워졌을 때, 영원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 팽개쳐버리고 지옥불에 처넣어버리고 끝낸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가족은 무엇인가? 모두가 다 가족인 거예요. 가족 가운데 연약한 자가 있으면, 그 사람 없애버리고 그 사람을 빼버리면 우리 가족이 행복해지는 것인가요? 가족 가운데 연약한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우리 가족의 장애물이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좋은 사람이든, 좋은 형편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형편에 있는 사람이든, 함께 돌보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런 관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왕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돈 많고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고, 그것이 왕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들의 교회나 사회나 우리의 사명의 현장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 주는 그런 역할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서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까? 공의가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공평함, 공정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공정이 무엇입니까?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보상을 해주는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게, 그게 공정함인 것이죠. 행한 대로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공정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모습은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래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서, 자기들 편은 잘 봐주는 반면에, 자기들 편이 아니면 모질게 대하고, 돈의 힘에 따라서 그래서 억울한 자들을 양산하거나 또 탐욕으로 치던 자들이 마음껏 활개를 쳐도,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그런 불공정한 사회가 벌어지는 일들이 많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의 힘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가 된다고 한다면, 영화로운 나라가 아니고, 정말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라가 되는 것인데, 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교회든 가정이든 우리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대할 때 공평하게 공의롭게 정당하게 대해야 될 것이고,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참 신실하게 공정하게 하는 일들이 이루어져야, 그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아주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지도자 한 사람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또 누가 좋아야 되나요? 모두가 다 좋아해야 되는 것이죠. 3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왕만 좋으면 그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왕은 누가 만듭니까? 왕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왕을 만드는 것이죠. 모든 관계가 다 마찬가지요. 남편과 아내가 한 사람만 좋으면 되나요? 서로가 좋아야 돼요. 서로가 함께 같이 발전하는, 지도자와 일반인들이 함께 같이 성장하는 것이죠. 교회 공동체도 역시 마찬가지죠. 한 사람만 세워놓고 그 사람들 어디 잘하나 보자 하고 팔짱 끼고 보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함께 협력하고 도와주고, 좋은 신하가 왕을 좋은 왕을 만들고, 좋은 신하가 있어야 좋은 지도자가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공동체든지 어느 사회든지, 한 사람 아주 중요한 지휘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지도자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똑같은 지도자도 똑같은 그런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좋은 사람들이 구성되어 있는 곳에서는 더 힘을 100% 120% 150% 발휘할 수 있는 반면에, 그러나 그 구성원들이 지도자를 깎아내리고 협조하지 않고, 또한 여러 가지 힘들게 만드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80프로 60프로 50프로 30프로 힘밖에 못 내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왕이 좋은 왕이 있어야 좋은 나라 영화로운 나라가 만들어진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니까 왕 하나만 잘 뽑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왕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필요하고, 또한 그 좋은 사람들 앞에 또 좋은 왕이 있어야 되고, 모두가 다 유기적으로 함께 가는 가운데, 팀워크가 이루어지는, 귀하고 복된 그런 공동체 그런 가정 그런 우리나라 온 세계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10년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까? 2013년에 9월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벌써 2023년이에요. 세상에, 놀랍죠? 10년이 확 지나간다는 게? 그래서 지금은 아직 9년째고, 9월 달이 되면은 만 10년이 되는 것인데, 참 너무나도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온 성도들이 함께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좋은 교회를 만들어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여러분은 안 감사합니까? 감사해요. 저는 여기 있을 때는 잘 모르는데, 밖에 나가 보면은 얼마나 제가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우리 교인들처럼 좋은 교인들이 없고, 아 정말 늘 감사가 나와요. 그래서 제가 밖에 나가면 미움을 좀 받아요. 제가 좀 고생해야 막 불쌍히 여길 텐데, 아우 세상에… 우리 교인들은 이렇게 좋아요. 우리 장로님들은 이렇게 좋아요. 그러면 다들 안 좋게 생각해요. 그런데 정말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10년 동안 정말 한 마음 한 뜻이 돼서 여기까지 오게 됐고, 또 설교 잘하라고 저 뒤에 앉아 있던 분들이 앞으로 다 나오고, 세상에, 힘이 팍팍 나요. 힘이 팍팍 나. 막 웃어주고 농담도 뭐 별로 재밌지도 않은 거 막 웃어주기도 하고, 예전에 어디서는, 막 아무리 막 얘기를 해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고, 저 뒤에 앉아 있고, 팔짱 끼고 있고, 그러니까 힘이 빠지던데, 우리 교회는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팀워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좋은 지도자와 좋은 성도들과 좋은 아버지 어머니와 좋은 아이들과 모든 우리 사회도 공동체도 우리 모든 그 영역들이 다 함께 만들어져 가는, 귀하고 복된 구성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 2절 3절 말씀, 우리 한 목소리로 같이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아멘!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우리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그 하나 됨을 힘써 지키는 가운데, 우리의 영역이 우리의 왕국 우리의 영역 우리의 area에서, 정말 영화로운 그 교회 영화로운 가정 영화로운 공동체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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