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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가난과 부 (잠 10:1-5) +++ 말이 많으면 (잠 10:13-21)

오늘 말씀 6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이고, 악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매절 매절 대비시켜서, 악인의 모습과 의인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말씀이 쭉 연달아서 나오고 있습니다. 한 절씩 한 절씩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예로 들면서,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한다고 그랬는데, 악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아니라 입을 언급하면서, 그 입은 독을 머금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독을 먹으면, 머금으면 어떻게 되죠? 죽는 거죠. 사망에 이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지만,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 독을 머금었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데요.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악인의 경우에는 입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 수사적인 표현법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어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서양의 어법 같은 경우는 같은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말을, 다른 단어를 써서 다르게 표현하기를 잘 합니다. 따라서 한 번은 머리를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도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입도 복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머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는 화가 임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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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표현은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표현을 보면서, “아, 그러니까, 의인에게는 머리에만 복이 임하고, 악인에게는 입에만 독이 임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도 복이 임하고 입에도 생명이 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도 화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인을 이야기할 때는 칭찬한다는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칭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악인의 경우에는 그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름이 썩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음식이 아닌데, 그냥 물질이 아닌데, 왜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했을까요? 그리고 도대체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있는 말을 보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인의 이름이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의인의 이름이 칭찬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과 대조되고 있는, 대비되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이름이 썩을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당하게 되고, 의인의 이름의 경우에는 칭찬을 받게 되겠지만, 악인의 이름의 경우는 비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고, 싫어하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계명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의인이죠. 계명을 받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 계명을 받는 자가 곧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그런데 정반대로 악인의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악인은 입이 미련하게 되고, 곧 멸망할 거라고 했는데, 그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인과는 반대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이 지혜롭고, 그 마음에서 계명을 받게 되지만, 미련한 자는, 악한 자는 그 입이 미련해서 멸망할 거라고 하는데, 역시 의인의 경우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입과 마음 전부를 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계속해서 9절 말씀에서도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의인을 이야기하는 거죠. 의인은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 계명의 말씀에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텐데,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평안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고,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옳은 길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편법의 길로 가는 것이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죠. 굽은 길로 가는 것이죠. 바르지 못한 길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굽은 길로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드러나리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드러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그 악행이 발각되고, 그 악행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발가 벗겨져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그런 대로 나는 잘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면서 발각되지 않으면서 그래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그래서 괜찮은 줄 알지만, 그러나 잠깐의 성공처럼 보이는 것도 금방이고, 얼마 뒤에 가면 결국 그 악행들이 하나씩 둘씩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숨기운 것이 감추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여기서 눈치 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눈짓 하는 얘기는 속임수를 쓴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눈짓을 하면서 모략을 저지르고,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으로, 그래서 악한 일을 하려고 눈짓을 하고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속임수를 쓰게 되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인 반면에, 또 근심을 끼치게 되고 입이 미련한 자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는 결국 그 입이 생명의 샘이라. 살아나는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는, 결국 독을 머금고 죽을 수밖에 없는 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읽은 6절에서부터 11절의 말씀에까지 의인과 악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강조하고 이렇게 강조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의인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형통함이, 복이, 생명이, 칭찬이, 평안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오 미련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는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화가 있을 것이고, 근심이 있을 것이고, 비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극명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오늘 저녁 시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사실을 그게 복된 것이고, 그게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잠언서를 살펴보면서 뭔가 기발한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잠언서에서 일관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말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게 그게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또 귀 기울이고 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다시 또 듣고 또 들어야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이 말씀과는 정반대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많이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만, 우리가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우리들의 집 안에서 우리들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 현장 속에서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런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죠. 의인의 머리에는 화가 있을 뿐이고, 이 세상에서 재주껏 악을 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의인의 이름은 무시당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게 되느니라가 이 세상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때그때 순발력을 발휘해서 이득을 취하는 게 그게 가장 현명하니라 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것이죠. 바른 길로 가면은 멸망할 뿐이고, 이리저리 묘수를 찾아 다녀야 결국 성공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를 듣는 것입니다. 눈치껏 해야 근심이 없이 사는 것이지, 눈치 없이 직진만 하고 성경 말씀대로만 살다가는 멸망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 압수수색 당하기도 하고, 패가망신 당하기도 하겠지만, 악인들과 함께가 되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귀에 들리게 되는 것이죠.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똑같이 들 것이라고 유혹했던 그 사탄의 유혹이 그때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해서 내용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또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이 세상에 잘못된 길로 미혹을 받아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주님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매일 아침마다 저녁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우리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이 있어서 다툼이 일으켜지는 그런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을 가리는 그 상황, 이 두 가지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미움을 통해서 다툼이 나타나는 그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이 가려지는 이 두 극단적인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완전히 다른 상황인데,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앞에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미움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사랑을 가지고 모든 허물을 가릴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허물이 있는 사람을 볼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 두 가지 반응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미움을 미움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사랑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이 두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허물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허물 투성이의 인간들입니다. 허물투성이의 인간과 허물 투성이의 인간이 만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요. 이 허물 투성이에 인간들이 서로 만나 살아가는 가운데, 그 허물을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하나는 미움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는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냐면, 미움으로 반응합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늘 우리가 쉽게 나타낼 수 있는 반응이 미움의 반응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예가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바리세인들의 경우를 볼 수가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잘못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세리를 보면서 세리들의 잘못을 지적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비난했고, 여러 가지 잘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그들의 허물을 지적한 것이죠.

왜 바리새인들은 그 허물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잘못들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그렇게 다툼을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던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잘못을 비난하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적어도 내가 비난하고 그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될 거라고 하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나는 공정과 상식의 사람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에요. 남을 비난하면 나는 그 비난에서부터 면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착각일 뿐, 그렇게 된다고 해서 자기가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예전에 우리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데려다 줄 때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 아이를 고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둘째 아이를 중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리고 교회로 출근을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했었는데요. 하루는 고등학교에 가게 됐는데,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 건물 밖에 줄을 쫙 서 있는 거에요. 이상하다. 왜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이렇게 학교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밖에 저렇게 서 있나?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날 그냥 아무튼 돌아갔습니다. 근데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와서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전날 어느 학생이 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했다는 거예요. 뭐라고 낙서를 했냐면, “나는 내일 총을 가지고 와서 누구를 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낙서를 화장실 벽면에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녁 때 청소부들이 학교 건물들을 청소를 쭉 하는 가운데, 그 화장실에 있는 그 낙서를 보고, 교장 선생님에게 보고를 했고, 학교가 발칵 뒤집혀진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학교 문 앞에 메탈 디텍터(metal detector)를 설치해 놨습니다. 마치 공항의 검색대와 같이,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메탈 디텍터를 학교 문 이곳저곳에 세워놓고, 학생들 한 명씩 한 명씩 그 메탈 디텍터를 통과하게 만들면서, 가방을 조사하고 한 명씩 한 명씩 혹시 총 가져왔는지, 다 검사하고, 그리고 그 학교로 모든 학생들이 들어가게 됐는데, 입장하는 데만 한 2시간 3시간 걸려서 그 학교 안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다 불러놓고, 왜 오늘 아침에 이렇게 학교 들어올 때 이렇게 검사를 했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낙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보완 조치로 인해서 이렇게 하게 됐다라고 학생들한테 설명을 쫙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세상에 어떤 그런 나쁜 놈이 그런 낙서를 한 거야?” 하면서 막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그런데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 들어 오라고 할 때, 알고 보니 그 학생이 낙서를 한 거예요. 도둑이 제발 저린 거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나는 그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남을 비난하면서 나는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정죄하면, 그러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게끔 착각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속는 그런 반응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그런 생각입니다. 결국 그 학교는 그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학생은 영국 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추방돼서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왜 허물이 있는 모습을 보면, 왜 비난하는가? 비난하면서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그런 자기 착각을 하면서 자꾸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9절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라고 하는 말씀처럼, 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잠깐 동안 속일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고, 더더욱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는데요. 결국 그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변화시킬 수 없고, 바로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잘못한 것을 책망하고 지적하면, 그러면 그것을 고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툼만 일으킬 뿐이고 미움만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모른 척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방치해 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나 혹은 우리들의 자녀들이나 우리 성도들이나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모른 척 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냥 옳은 말을 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복시켜주고, 돌이키게 만들기 위해서 정말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사랑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한 여인을 끌고 오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돌 하나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저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 여인을 향해서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몰려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그렇게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 돌을 들어야 내가 자신들의 죄가 감추어지기 때문인 것이죠.

그들을 향해서 돌을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 여인만 죄인인 줄 알았는데, 나도 죄인이구나! 나도 허물이 많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사람들, 한 줄기 예수님의 말씀의 빛의 줄기가 그들의 양심에 전달되게 될 때, 그들의 양심에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게 하게 될 때, 결국 그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물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허물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죄만 해서는 그 여인을 살릴 수가 없고, 사랑으로 그 여인을 회복시켜주시고 살리기 위해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접근해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봤던 만화 중에 하나가 있었는데요. <목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잡지에 간단하게 성경을 소재로 한 만화가 네 컷짜리 만화가 수록돼 있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한 한 30년 전에, 아마 그때 나왔던 만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바로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화를 그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 컷에서 돌이 하나 날아갔습니다. 돌이 날아왔는데 어디서 날아왔을까요? 하늘 위에서 날아, 하늘 위에서 날아와서 그 여인의 머리를 탁 때리고 돌이 떨어지니까, 그 다음 장면에 그 여인의 머리에 혹이 이만하게 나고, 그다음에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 장면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보시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발 제가 하는 일에 방해 좀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재밌게 웃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만든 만화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왜곡할 수가 있을까?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의견에 통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신성 모독적인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 이거 항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 만화를 생각하고 있는데,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는 만화예요. 그게 맞는 만화에요. 우리들은 그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돌을 던지지 않으셨어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지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을 살리신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난 거예요. 우리가 허물이 있을 때, 우리의 허물을 보고, 하나님께서 심판해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잘못됐다고 심판해버리고 죽여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을 감싸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의 매닮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볼 때마다, 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비난하고 욕하면서, 미움이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결과를 나타낼 게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모든 허물들을 덮으며, 또한 회복시켜 나가는 그런 믿음의 귀한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질 때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주옵소서. 사랑으로 허물을 덮을 수 있고, 그리고 따뜻하게 반창고처럼 붙여서 회복시키는, 그런 평화의 도구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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