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 1:27-28)

여호와께 드리나이다(삼상 1:27-28)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이 말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자식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한 서원 때문에 신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래서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맞는지 여부도 따지지도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절대로 목회자의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 했던 사람들마저도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들이 과잉 공급되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의 성도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목사들의 수는 넘쳐나는 상황입니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되는 모순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회에서 2/3의 투표를 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목사가 되는 것은 그러한 투표도 없이 공부만 하면 목사가 되는 모순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무자격 목사의 배출이 교회를 썩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한 원인이 부모들의 무분별한 서원입니다.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는 않고, 대신 자식을 목사로 바치겠다고 헌신해버린 부모들 때문에 검증받지 못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쏟아져 나오는데, 본인도 큰 손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교회도 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서원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목사의 길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소명도 있어야 하는데, 교회라는 공동체가 목사로서의 은사가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런 외적 소명을 확인하지 않고 단순히 내적인 소명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 섣불리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단순히 성직자의 길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나 집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서에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모독하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성을 욕보인 악당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사가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유다처럼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을 뻔했던 사람들이 목사가 된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 바쳐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아니 크리스천들이라면 모두가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결단입니다. 사무엘이 가장 예쁠 때, 가장 귀여울 때, 한나는 하나님께 사무엘을 바쳤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한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사무엘을 놔두고 오는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혹은 서원)을 하셨습니다. 한나처럼 마음이 다급해서 하신 약속이 아니라, 아무런 다급함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만 할까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떤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사장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님이 자신을 놓고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부모님은 초태생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장자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분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목회자의 길로 가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드렸던 그 서원기도 때문에 자신이 회사를 그만 두고 결국은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하면서 제시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약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 초태생을 모두 죽여서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도 금전으로 대신 바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졌다고 해서 반드시 죽여서 드린 것이 아니라, 대체할 방법을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모님이 했던 서원기도는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고 욕심이 많고 죄성이 많은 상태에서 드려진 어설픈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번 기도하면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기도한대로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가면서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는 점점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게 되면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복종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입다의 서원이 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께 섣부르고 옳지 않은 서원을 했습니다.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 예라기보다는 잘못된 예로 보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당시에 왕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사사였던 입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데에는 실패했던 것입니다. 입다는 그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무지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었습니다.

물론 서원을 했지만 나중에 마음대로 그 서원을 번복해도 좋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가 드린 서원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잘못된 것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된 서원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서원했으니까 끝장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며 더 바람직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기도하면 반드시 그 여자랑 결혼을 해야만 할까요? 아닙니다. 결혼은 한 사람의 일방적인 결단이나 서원으로 이루어질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 대한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놀라운 계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의 알량한 생각으로 드려진 서원이 있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서원했다고 해서 무조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가 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부르심도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이라고 서원한다면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원수를 갚는 것보다 오히려 사랑하며 감싸주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는 원수를 갚지 않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게 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맞추어져 가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어리석고 미숙했던 시절에 했던 생각들에 따른 섣부른 서원들이 절대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해가 될지라도 서원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신실하게 약속을 지켜야 하며 거짓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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