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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을 잊지 않은 한나(삼상 1:21-26)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23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서원하며 기도했던 한나에게 기적처럼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언제 서원하며 기도했느냐는 듯, 자신이 서원한 것을 잊기 쉽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다급함이란 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화장실 가기 전의 마음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밧단아람으로 갈 때 하나님께 세 가지 세원을 한 바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하는 서원과,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할 것이라는 서원과,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창 28:20-22). 하지만 그는 라반의 집에서 돌아온 후 벧엘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의 가족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다급한 상태에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으며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다는 서원을 합니다. 하지만 다급하고 긴급한 문제가 사라지면, 언제 그렇게 서원했느냐는 듯, 다 잊기 쉽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자신이 했던 서원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을 낳고 첫 번째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러 가게 될 때, 한나는 엘가나에게 자신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1:21-22). 서원제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것을 갚는 제사인데, 한나는 그 해에 올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서원을 갚지 않거나 미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사무엘이 어리기 때문이며, 아직 젖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마카비서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보통 3년 동안 아기에게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오늘날보다 수유 기간이 비교적 긴 이유는 그 시대에는 아기들에게 먹일 대체 음식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무엘이 한나의 젖을 먹고 자라야 하는 한,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1:22). 한나는 자신의 서원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한나가 하나님에게 흥정과 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서원을 하였다면, 자신의 서원을 금방 잊었을 것입니다. 흥정의 목적은 상대방에게서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내는 목적을 이루고 나면 자신이 받아내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이 했던 말들은 생각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받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말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짐을 하였습니다. 은혜의 감격 가운데 감사로 드린 서원을 한나는 생생하게 기억하였습니다.

사무엘의 젖을 뗀 후, 가장 사랑스러울 그 때에 한나는 어린 사무엘(1:24)을 데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한나는 엘리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6-28).

시편 15:4에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 가운데 하나로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것을 갚는 것이 해로운 것일까요? 물론 세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손해보는 것일 수 있고 해로운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해로운 것이 아니라 복된 것입니다. 한나가 손해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21),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이끈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올인해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가하게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손해일까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보다 쉬면서 할 때 능률이 더 잘 오르도록 만드셨기에 결코 손해만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오히려 채식만을 하고도 더 건장했던 것처럼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좋은 대학에 반드시 들어갈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복이고, 그것이 옳다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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