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왕을 찾아서

진짜 왕을 찾아서

사무엘서를 통해서 찾는 참된 왕 이야기

사무엘은 아주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 사이에 때로는 황당한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깊은 신학적 사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이 히브리 문학의 독특한 표현 방식입니다. 철저하게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데, 놀랍게도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잘못 읽어내면 부작용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위험할 수도 있는 책입니다. 저는 사무엘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신 그 완성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눈으로 보아야 비로소 그 가치가 더 뚜렷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무궁무진한 스토리의 세계로 독자들과 함께 탐험하며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저는 구약학자가 아니고, 사무엘 전공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서 여행은 저도 이번이 첫 걸음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알뜰신잡에 나오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서 각각 자신들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그 지역을 탐험하듯, 저는 저의 관점으로 사무엘서를 보면서 촌평을 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을 전공하신 분들이 보면 오류도 있을 것이고, 말도 안 된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해설은 완벽한 것을 내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비평을 부르는 과정이고 그걸 통해서 더 나은 지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에 겁나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제 떠나볼까요?

두 아내를 둔 엘가나(삼상 1:1-2)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사무엘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사무엘서는 시작됩니다. 사무엘은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특별하게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라는 사람을 소개하면서,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 동네 사람이라 소개하고, 또한 여로함의 아들, 엘리후의 손자, 도후의 증손, 숩의 현손이라고 소개합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손자, 증손, 현손으로 의역했지만, 원문에서는 모두 “아들”이란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1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한 것과 같은 형식의 표현으로, 실제로 엘가나가 여로함의 아들인지, 엘리후의 손자인지, 도후의 증손인지, 숩의 현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숩, 도후, 엘리후, 여로함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태어난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들”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아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폭넓게 “자손”이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마다임 소빔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 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실로에 가까운 곳입니다. 영어번역에서는 각각 이를 다르게 번역하였는데, NIV 성경에서는 엘가나를 라마다임(Ramathaim) 사람, 숩 족속(a Zuphite)으로 해석하였고, NLT에서는 에브라임(Ephraim) 산지의 숩(Zuph) 지역에 있는 라마(Ramah) 사람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어 원문이 허용하는 것으로, 모두 가능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번역은 “숩 사람들의 라마다임”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엘가나는 라마다임(두 고지대라는 뜻)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 라마다임은 숩의 가문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엘가나는 레위 지파의 그핫 사람으로, 에브라임 지역에 할당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대상 6:22-28).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레위인들에게는 따로 땅을 분할하지 않고 각 지파에 흩어져서 그 가운데 거하도록 하였는데, 그핫 자손들은 에브라임 지파 가운데 성읍을 얻어서 살도록 하였습니다(수 21:20-24). 엘가나는 그렇게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서 성읍을 얻어 살던 레위인의 후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는 사무엘에게 레위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켰을 것입니다(cf. 삼상 3:1-3).

그런데 바로 그 레위인 엘가나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나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한나가 첫 번째 아내였을 가능성이 많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두 명의 아내를 거느리기 시작한 사람은 가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이었습니다(창 4:19). 그는 아다와 씰라라는 두 사람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가인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는 창세기 4장에서는 죄가 어떻게 더욱더 심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혈통에서 라멕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라멕은 아내를 둘씩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살인을 하고서도 전혀 뉘우침이 없이 뻔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베푸셨던 자비를 악용하면서,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4)

창세기에 등장하는 라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사람 원래 악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하면서 넘어가곤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충격적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에 파견된 레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별된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아내를 둘씩이나 두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보면 두 번째 아내를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경우를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업을 이을 자녀를 낳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1 그렇다면 성도들도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레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할 레위인이 당대의 문화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모습을 보였습니다(1:3). 하지만 그의 모든 삶이 거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신앙의 거장(?)들에게서 아내가 둘씩 혹은 그 이상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어떤 기독교 이단교파는 일부다처제(polygamy)가 가장 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2 또는 구약 시대에는 첩을 두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스토리(story)들은 우리들에게 항상 규범으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신앙의 거장이며 위인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죄인이며 연약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참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스토리들은 하나님의 규범적인 말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죽여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해도 무방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며, 살인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가나가 두 명의 아내를 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죄악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창 2:24). 놀라운 것은 중혼(重婚)의 죄악이 레위 지파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사람에게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 이런 죄악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현실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처럼(롬 3:10), 이 세상에 죄로부터 면역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죄악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가질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에게서 소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서를 읽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죄로 얼룩진 사람들에게서 소망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실 구원자이신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다음 글 읽기 – 엘가나 가정의 문제(삼상 1:3-8)

--[註]---------------------------
  1. James B.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University, 1950), p. 154.[]
  2. 이러한 주장은 www.biblicalpolygamy.com에서 볼 수 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