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데가 어디냐? (롬 3:19-31)

의인은 없다 (롬 3:9-18) +++ 하나님을 믿으매 (롬 4:1-8)

지금 중국의 베이징에서는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 네. 텔레비전을 보시는군요.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우연치 않게 개회식 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요. 첨단 영상 기술을 사용해서 멋지게 개회식을 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참 중국이 많이 발전했고, 또 문화적인 그런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어쩌면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 선수들이 모여서 경쟁하게 될 텐데,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될 텐데, 우리나라가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기대하는 마음이고, 도대체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지 관심이 많이 가고, 또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싸운 그 보상이 있는 그런 좋은 경기가 되는 마음입니다.

이번에 동계올림픽에 어떤 선수들이 참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제가 잘 모르는데요. 예전에 보니까, 이상화 선수라고 한 8년 전에 나왔던 선수였던 것 같은데요. 500m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선수가, 이상화 선수가 얼마나 빨리 세계 신기록을 세웠는지, 그것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를 보니까, 신문 기자가 제목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이상화, 지하철보다 빨랐다.” 지하철 2호선의 평균 속도가 8.09초에 100m를 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화 선수는 7.272초의 100m를 달렸다고 하니까 정말 놀라운 실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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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가능성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평범했던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연습을 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하면서 정말 최선의 연습을 다하게 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을 해내게 되는 것이고, 또한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스포츠 분야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노력하고 애를 쓰면 많은 진보와 발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술문명의 발달도 아주 대단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장 활발하게 기술 문명이 발달되는 그런 시기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발전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화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 다들 다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이 휴대폰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불과 몇 년 전에는,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생각하지 못하던 일들을 이 휴대폰으로 다 해내고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영상 통화는 해보셨습니까? 예. 해봤을 거예요. 저도 이 한국 땅에 살고 있지만, 저 미국 땅에 있는 우리 딸아이들하고 영상 통화를 하면 떨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냥 마치 내 옆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매일매일 그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것을 보면서, 참 문명의 발달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 정말 놀랍기가 그지없습니다.

전화기로 은행 업무도 다 보고요. 방역 패스 출입 인증도 다 하고요. 고속버스 예매나 기차 예매도 휴대폰으로 다 하고 있고, 저는 휴대폰으로 무슨 일까지 하냐면, 제가 했던 설교 영상 음성을 활자화 하는 것도 휴대폰으로 합니다. 저는 설교 노트를 아직도 연필로 씁니다. 볼펜으로 씁니다. 타이핑을 하지 않고, 늘 쓰면서, 수기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 아날로그로 쓴, 이 수기로 했던, 그 설교 원고를 어떻게 활자화할 수 있을까 했는데, 휴대폰에 음성을 집어넣으면, 단 몇 초 만에 글자로 쫙 나오는 거예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의 발달이 불과 몇 년 전 몇십 년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전화기로는 전화만 걸었었죠. 아니, 그 이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삐삐가 있었습니다. 전화번호를 남기면, 삐삐를 보고, 전화를 해주는 그런 시절이 있었고요. 그것보다 훨씬 전에는 전화기가 어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전화기가 어떤 것이었냐면, 돌리는 전화기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전화기를 가지고 돌리면, 그걸로 전자 신호가 가게 돼서, 그래서 전화국에 있던 전화 국원이 전화를 받아가지고, “손님, 어느 집으로 연결해 드릴까요?” 물으면, “아무개 집으로 연결해 주세요.” 얘기하면, 전화 교환원이 잭을 꽂아서 전화 연결을 해줬어요. 그래서 제 어렸을 때는 전화를 하면, 그 전화 통화를 전화 교환원이 다 들었어요. 비밀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면, 엄청난 실력을 키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계속 발달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걸어가다가 허공에 손을 싹 흔들고 비밀번호 눌러서, 아니면 이 허공에다 무얼 다 해서, 그런 시절이 과연 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스포츠 선수들이 정말 열심히 하게 되면, 100m를 7.272초가 아니라 0.1초에 달리는 때가 올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의 기술이나 실력들이 진보하고 또 발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있기는 합니다. 선수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100m를 7초 혹은 6 몇 초까지는 주파할 수 있겠지만, 100m를 0.1초에 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겁니다. 그것은 백만 년이 지난다고 할지라도 이룰 수 없는 목표인 것이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육상 선수가 아무리 빨리 달리기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42.195 킬로미터를 0.1초에 달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이 뛰기 선수가 열심히 높이 뛰는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선수가 단 한 번의 도움 받기로 롯데월드 빌딩을 건너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수련을 하고, 마음을 닦고,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많은 진보를 이루게 될 겁니다. 그냥 주일날 한 번 예배만 드리는 사람보다는, 수요일 날도 나오고, 새벽도 나오고, 좀 더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하면, 훨씬 더 많은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될 겁니다. 성경 책을 하나도 읽지 않는 사람보다는,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또 큐티를 하고, 성경을 계속해서 통독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훨씬 더 많은 영적인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부흥회, 말씀 사경회에 많이들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오지 않는 것보다, 참여해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가운데서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회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수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올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기준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나아질 수 있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영적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너그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그 높은 그 수준까지 우리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문제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는데요. 그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In the Grip of Grace, 번역하면 <은총에 붇들려>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맥스 루케이도라고 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달까지 가보려 했으나 땅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했다. 대서양을 헤엄쳐 건너려 했으나, 모래톱조차 넘지 못했다. 구원의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으나, 비탈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 베이스 캠프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넉넉한 양식이나 근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헬리콥터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대서양을 건너갈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까지 갈 수는 없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갈 수는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달까지 가려면 우주선이 필요한 것이고, 대서양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에베레스트 산을 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필요한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 정복해 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착한 면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서 좀 더 거룩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의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허물이 많고 죄가 많고 흠이 많다는 겁니다. 다 감춰놓고 있어서 그렇지, 다 멋진 옷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고, 다 허물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태양까지 갈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 있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그건 젊은 관원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했던 말 속에서 알 수가 있는데요. 그 젊은 관원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랍비님, 제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족한 게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부족하다”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하고 똑같은 단어입니다. 혼인 잔치의 이야기에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모자라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모자랐다”고 하는 그 단어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가야 되는데, 모자란 것이고, 부족한 것이고, 아무리 영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까지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상시에는 그걸 잘 느끼지 못합니다. 평상시에는 우리들이 괜찮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괜찮아 보입니까?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대로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주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 주변에 흉악범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사기꾼들도 많고, 악한 사람들도 많은데, 저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고, 그래도 나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인 것이죠.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장 칼뱅이 선생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내 자신이 진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에요.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내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내가 여러 가지로 모자란 사람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나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만을 보고 있으면, 우리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해요. 하나님을 봐야,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보는 거에요. 이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내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교해 보면서, 내가 괜찮아 보이거든요. 내가 그런 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나아 보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빛에 우리를 비추어 보게 될 때, 우리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들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인데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 앞에 서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서야 되는 거죠. 하나님 앞에 서야, 우리가 우리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내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고, 내가 정말 죄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로마서 3장 20절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무엇을 깨달음이라?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셨는데요. 성경을 주셨는데, 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거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성경이고, 율법인 것이죠. 그래서 이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봐야 되냐 하면, 우리들의 더러운 모습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내가 더럽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잘못 사용합니다. 어떻게 사용합니까? 성경을 보면서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봐요? 옆에 있는 사람들을 자꾸만 비춰 보는 것이죠.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보면서, 정죄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결국 다른 사람을 보면 우리가 영적인 소경이 되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영적인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나 자신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봐야 하고, 내가 누군가를 봐야 해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해요. 거기서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그 얘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갈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가 없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런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우리들의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의인이라고 인침을 받게 되었다”라고 오늘 2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속량”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속량”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평상시 “속량”이라고 하는 말을 써서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번 지난 한 주간 동안 살면서, “속량” 좀 해줘. “속량” 좀 나한테 줘. 내가 “속량” 줄게. 이런 말하면서 대화하신 분 계신가요? 한 분도 없어요. 제가 성경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번역을 하나마나한 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 제일 안타까워요. 우리가 사용하지도 않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외계어 같은 그 단어를, 성경으로 번역해놓고, 이해하라고 하니, 도대체 이해가 됩니까? 안 되는 것이죠.

“속량”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이냐면, 이런 상황에서 쓰는 말입니다. 어떤 인질범들이 인질을 잡았는데, 인질을 잡아놓고 이 인질을 풀어줄 테니까, 풀어주는 대가로 돈 내놔라 했을 때, 풀어주는 대가로 받게 되는 돈을 가리켜서 “속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가 됩니까? 내가 돈이 없어서, 전당포에 들어가서 내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맡기고, 혹은 반지를 맡기고, 목걸이를 맡기고, 또는 시계를 맡기고, 그래서 돈을 얼마를 빌려왔는데, 그리고 그 돈을 급전을 잘 썼다가, 그런데 내가 전당포에 맡겨놓은 그 반지가 내 결혼 반지니까, 다시 찾고 싶을 때, 그냥 달라고 하면 줍니까? 안 주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돈을 가지고 가서, “내가 예전에 맡겨놓았던 그 반지 다시 주세요”라고, 돈을 내놓고 다시 그 반지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그때 다시 찾기 위해서 맡겨놓는 돈을 “속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속량”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하기보다,는 무슨 말로 번역하면 훨씬 더 좋을까요? 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좀 알려주십시오. 저는 “교환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석방의 대가”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석방 요구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냐면,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떤 상태인 것을 나타내는 것인가요? “속량”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떤 상태인 것을 말합니까? 우리가 사탄의 포로가 되어 버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지옥의 자식이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우리가 수렁텅이에 빠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 멸망에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 구렁에서, 구렁텅이에서 꺼내기 위해서, 우리를 저 영원한 지옥에서부터 꺼내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었는데, 우리를 찾아오기 위한 “교환금”을 지불해야만 했었는데, 그 “교환금”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다는 겁니까? 예수님을 내어주셔서, 예수님 우리를 찾아오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어줬다는 거에요. 우리를 꺼내오기 위해서, 예수님을 다시 죽음에 내모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일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좀 더 거룩해지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인 훈련을 많이 하고, 도를 닦고, 또 도를 닦고 또 도를 닦아서, 내가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면 “속량”이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우리가 노력하면 되니까요.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종교들입니다. 거봐라. 이상화 선수가 100m를 7.272초에 주파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열심히 노력하면 0.1초에 주파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주장입니다. 열심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면, 열심히 마음을 비운다고 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기만 한다고 하면, 당신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되나요? 안 되는 거죠. 어느 정도는 조금 개선의 여지가 있고, 조금 발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부처와 같은 모습의 그런 영적인 최상위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에 피 흘려주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이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냐면, 내가 죄인인데,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다. 나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면서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면서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나도 구원받을 수 있겠네.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당신 같은 더러운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도 사랑을 받을 수 있겠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복음이 전파가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반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반응이 돌아오나요? “너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불신자들이 크리스천들 앞에서 역겹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치 무엇인가 영적인 높은 위치에 올라간 것처럼 거룩한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리고 당신같이 그런 더러운 사람들은 예수 믿어야 된다고 말할 때, 기분 나쁘고, 또 우리들을 바라볼 때, “아, 저분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로구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똑같거든요. 목사라고 해서 거룩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똑같이 탐욕적이고, 똑같이 더럽고,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욕하게 되는 것이죠. 장로요, 권사요, 집사이고, 또 교사이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똑같이 더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사람들이 너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비아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내가 이만큼 거룩한 사람이니까, 내가 이만큼 멋진 사람이니까, 당신도 예수 믿어서 행복해 보세요라고 말하면,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말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이렇게 요리를 잘하기 때문에, 내가 만든 요리 잘 먹어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요리를 못하지만, 저 식당에 갔더니 맛있더라 라고 말하면 귀를 기울이는, 내가 음식을 아무리 못한다고 할지라도, 저 식당은 정말 맛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이게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인데요.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오셨는가? 내가 이만큼 거룩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받아준 것이 아니라, 나 같은 망할 사람도, 나 같이 연약한 사람도,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해주셔서 받아주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게 될 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져야 될 마땅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입니다. 로마서 3장 27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런 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신앙생활하면서, 이내 교만해져 버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전도를 많이 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헌신을 하고, 내가 수고하면, 이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교만한 마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만함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이고 독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말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이냐면, 바로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늘 망각해 버리고, 늘 교만해지기 쉬운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자신들만큼 지키지 못하는 이웃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 세리들.” “저 창기들” 하면서 비난했고, 세리 창기들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일반인들을 가리켜서 “암하아레츠”라고 했습니다. “암하아레츠”라고 하는 말은 “땅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인데, 히브리어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저 땅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들을 제대로 잘 지키지 않은 저 평민들,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그들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대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바리새인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조금만 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하면, 늘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나는 주를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아침부터 나와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게을러 터져가지고 무슨 신앙생활을 하는가? 저 사람은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저 모양 저 꼴인가? 저 모양인가? 저 사람은 왜 집사 장로 권사라고 하는 사람이 왜 저 모양 저 꼴인가? 왜 크리스천 학생이 크리스천 학생답게 살게 못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단점들만 자꾸만 바라보고, 그리고 정죄하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만해졌음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저버리고, 마치 내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그리고 내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겸손하게, 다시 한 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는 그런 귀한 믿음의 역사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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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영적인 선물 (롬 1:8-15) +++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이 되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까지 건너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한다고 하는, 그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이 무엇인가? 그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6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않는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로마 교회에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비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예수 믿어? 저런 바보 같은 놈!’ ‘너, 교회 다녀? 머저리 같은 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저 예수 믿는 놈들, 저 더러운 놈들’ 하는 그런 비난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로마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런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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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나는 금메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학교에서 전교 1등한 사람이, ‘나는 전교 1등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자식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자식이 이런 애예요. 저런 애예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하고,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해야 될 때가 언제이냐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실을 당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렇게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요. 학교에 가면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3% 이하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학교에 가면 전부 다 다 불신자들이고, 교회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학교 내에서, 아이들이 말하기를,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래, 나, 교회 다녀’라고 말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쉽고, 그리고 그 반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말을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즘 한참 핫한 것이 넷플릭스에서 나온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못 보신 분도 있을 것이겠지만, 뉴스로서는 아마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더니, 커다란 미국 백화점 안에 오징어 게임 상품을 파는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 그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뻔뻔하고 위선적인 그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고, 그 상황 가운데서도 아주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으로, 정말 싫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아주 나쁜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작가가 안티 크리스천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저 더러운 놈들, 저, 위선자들, 저 나쁜 놈들, 저 더러운 더럽고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감사할 정도인데요. 부모님들이,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혼내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 교회 상황이 어쩌면 우리 한국의 지금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박해를 당하며, 사회적으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읽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마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위로의 메세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를 16절 말씀에서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이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돈이 있으면 물론 편리합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져낼 수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주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곡식을 쌓아놓은 그 부자를 향해서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셔요. 돈을 아무리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그냥 모든 것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권력이 있다고 한다면 좋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편리한 것이고, 그동안 잘 안 되었던 것들도 맡겼던 것들도 다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부터 살려낼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에게 뛰어난 정치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인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구세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다가, 오히려 망해버리고 마는데요.

오히려 우리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 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고전적인 예화이기 때문에, 아마 신앙생활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들은 예화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꼬마 아이가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엄마가 이 꼬마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부모님들을 오라고, 학부모 면담을 하라고 해서 오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예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리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자기 엄마라고 자신 있게 소개를 하는데, 자기의 엄마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엄마를 학교에,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에게, 어느 날 자기 어머니가 왜 그런 상처를 화상을 입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때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집에 불이 났을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 화마에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그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너는 가슴에 꼭 안아서 아무 흠집 없이 내가 살려냈지만, 그러나 내가 그 불로 인해서 얼굴이 다 화상을 입어버리고, 내 몸이 망가져 버려서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 아이는 어머니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나 같은 죄인을, 내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늘 행동하는 것이 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멀리 떠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형벌 가운데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이고, 사랑해야 될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참된 지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지폐를 오용하기 위한 위조 지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 위조지폐 때문에, 그래서 비난을 받게 되듯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고, 목사는 먹사가 되어 버렸고, 오징어 게임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치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불신자들 앞에 가서 막 윽박지르면서, ‘나는 복음을 안 부끄러워해’ 하면서 윽박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핍박을 당하면, 오히려 겸손하고, 핍박받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온유하게, 이 세상 앞에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라고 하는 한자를 생각하며. 그것은 공의, 정의 이런 말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나?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나? 도대체 정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로 약속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아, 이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의로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그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오늘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는 것, 잘 지키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 것이 나타나냐면,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출발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게 될 때,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아,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라.’ ‘다른 신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섬겨라’고 하는 그 명령이고, 만일 너희가 그렇게 나를 나만을 섬긴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래서 너희를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약속한 것,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결혼 약속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할 때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에 서약을 하는 것이죠. 약속을 하는 것이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서로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요. 그 계약서가 무엇이죠? 바로 10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10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위해서는 너희가 이 10계명의 말씀을 지키라고, 옛 계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인데, 계약서를 쓸 때 몇 장을 쓰죠? 2부 작성하기 때문에, 두 개의 돌판에 계약서를 써서 10계명을 써서, 그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약속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약속을 잘 지켰냐면,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 신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을 맺었지만, 그 약속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약속을 맺었는데, 계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그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그 계약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계속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계약이 파기가 되는 겁니까? 파기가 되는 것이죠. ‘이제는 계약 끝났다.’ ‘계약이 이제 완전 파기됐다’라고 선언해도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계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계약을 파괴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죠. ‘너희들이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이 계약은 끝난 거야’ 하면서 그 계약을 찢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계약을 다 지키도록 너희가 지키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시고, 그 대표 되신,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 대신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복종을, 그 순종을 다 하셔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깨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 호세아서의 말씀에 보면,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라.’ 그래서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인 호세아와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금세 바람이 나버리고 외도를 해 버립니다. 결혼 관계가 깨어져버리고, 파괴되어 버리고,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혼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정상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호세아야, 너는 그 고멜을 버리지 말고, 다시 데리고 와라.’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시 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가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다시 아내를 삼습니다. 또 집을 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을 나간 고멜이 어디에 가 있는가? 사창가에 가 있는 거예요. 사창가에 가 있는 그 여인에게, 여인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결국 그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결국 그 아내를 끝까지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어떻게 그 서약을 깨지 아니하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인간 편에서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길로 나가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깨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계약 끝났다’ ‘더 이상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면서 계약을 박차버리고 도망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약속을 버리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로,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해서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아주 놀라운 소식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인데요. 이 은총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 선물은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믿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징의 게임의 드라마를 보면, 거기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우라고 하는 사람과 그리고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 상우라고 하는 사람은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차비가 없을 때 상우는 자신의 돈을 꺼내서 알리에게 돈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알리의 가족을 걱정해 줍니다.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말 친절한 사람을 알리는 만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알리는 상우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의 한 에피소드 가운데 구슬 따먹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서 서로 구슬을 따내면 승리한 사람은 살아남는 것이고, 구슬을 다 빼앗긴 사람은 죽게 되는 사느냐 죽느냐 그 게임에서 상우와 알리가 한 편 한 편이 되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우가 구슬 따먹기를 하는데, 다 지는 거예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다 빼앗기면,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알리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 방법 쓰지 말고, ‘우리가 같이 사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제안을 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구슬을 함부로 갖고 다니다가 빼앗길 수 있으니까,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 줄게’ 제안을 하는데, 알리는 그 상우를 믿어요. 나에게,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지폐를 건네준 사람, 내 가족을 걱정해 준 그 상우를 믿으면서, ‘그래, 형, 내 구슬을 보관해 달라’고,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구슬을 맡겼는데, 상우는 그 구슬을 돌과 바꿔치기 해버리고, 가짜 구슬을 알리에게 주고, 그 알리의 구슬을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관리자에게 가서 말하는 거죠. ‘봐요. 내가 저 친구의 구슬을 다 차지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결국 알리는 자기가 믿었던 상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오징어 게임이 센세에이션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 일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현실인 거에요.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당하고, 믿었는데 나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상황 가운데서, 늘 배신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정 주었지만, 배신당하고, 표를 주었지만 정치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에 보면 또 다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영이라고 하는 사람과 새벽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슬을 서로 두 사람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지영이가 구슬을 따는 게임을 설계합니다. 설계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우리 구슬을 그렇게 쩨쩨하게 하나씩 둘씩 따먹지 말고, ‘한 번에 끝내버리자.’ 누가 저 벽에 제일 가까이 던지는가? 구슬을 던져서 제일 가까이 던지는 사람이 구슬을 다 빼앗는 것으로 하자 약속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벽은 구슬을 던져서 어느 정도 가까이 붙였습니다. 근데 그 지영은 그 구슬을 어떻게 이길까를 설계했던, 그 구슬을, 지영은 구슬을 잘 던져서 벽에 가까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땅에 떨어뜨립니다. “내 구슬 네가 다 가져.” “너는 살아. 나는 살 이유가 없지만, 너는 살아. 그래서 엄마도 만나.” 이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예요. 그런 엉터리 같은 크리스천들 말고, 정말 참된 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구슬을 다 내어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고통과 우리들의 모든 슬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지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너, 교회 갔다 왔느냐?’라고 하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대답하기 힘든 말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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