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잠 6:12-19)

게으름의 죄 (잠 6:6-11) +++ 불을 품으면 (잠 6:20-35)

잠언서 6장 12절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악한 자는, 누가 악한 자인가? 구부러진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구부러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말을 가리켜서 구부러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곡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그리고 악을 꾀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악한 자요. 불량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량한 자,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15절 말씀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악을 행하는 자, 불량한 자, 구부러진 말을 하는 자, 즉 왜곡하는 말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악을 도모하는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에게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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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반면에, 포악하고 악을 행하고 술수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잘 나가고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에 모든 것을 심판하셔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는 재앙을 내리실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공의대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마음의 양심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가는,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악을 행하는 길을 멈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또 잘못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대적하고 악을 꾀하면서 이간질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왜?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죄를 지어도 결코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과도하게 절망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모든 일들이 다 막혀버렸을 때 정말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니, 그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은밀하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한다고 한다면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보지 않을 거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과도하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라고 하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분이 계신데요. 이 마틴 루터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개혁의 운동을 하는데, 카톨릭의 박해가 너무나도 심해서, 그래서 그 카톨릭의 박해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정말 참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데 카톨릭의 세력이 너무나도 큰 거예요. 그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이나 그런 종교 권력들이 너무나도 강하게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종교 권력과 결탁하고 있는 세속 정부의 그 강력한 그 권세 밑에서, 너무나도 힘들고 두려워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하루는 그 마틴 루터를 일깨우기 위해서, 이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어?’ 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느냐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틴 루터의 아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무슨 소리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 마틴 루터의 아내가 마틴 루터를 향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이 그렇게 절망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겁나며, 무엇이 슬픈 일이 있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이 마틴 루타가 그때 큰 충격을 받고, 다시 종교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하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행동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자, 불량한 자, 악한 자들이 왜곡된 말을 하며, 또한 여러 가지 잘못을 끝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매번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을 보는 것이죠. 우리들의 말로서는 예수님 믿으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크리스찬의 행동을 보니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행동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외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어려운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뻔뻔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잘못을 범하면서도, 그렇게 후안무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보시지 않는 것인 양,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뻔뻔하게 악을 행하면서 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싸우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가운데, 악한 길에서부터 떠나고 왜곡된 말을 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길에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여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7가지를 열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미워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한 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어쩌면 가장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인 양,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그리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의 그 결과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인 양,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이 뛰어나고 내 모든 수고와 내 모든 노력으로 다 된 것인 양 그렇게 마음을 품는 교만한 마음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높은 성과를 이루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기쁨이 넘치는 것까지는 괜찮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나와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경멸의 태도를 가지게 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웃들을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왜 내게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사명으로 주신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잘하는 것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특별한 재능과 많은 것들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렇게 얻었다기보다는,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교만하라고 선택해 준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이 되게 만들도록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온 세상 열방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선택해 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이 교만함이 되어서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멸시와 차별로 행동했고, 감사의 마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멸시로 나아갔던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나도 좋아서 기쁨이 생기는 것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한 내가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넘어서서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로 바뀌고, 나 자신에 대한 교만의 태도로 바뀌어 버리게 된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점도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가 다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인데, 교만한 눈으로 교만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거짓된 혀를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 될 경우에 내게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을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물질이라든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내가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계속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얻기 위해서, 그래서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게 되면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거짓을 말해서라도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러한 탐욕의 마음에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적군에 잡혀가서 그래서 적군으로부터 취조를 당하는데, 그 순간에 우리 아군의 모든 정보를 다 상대방에게 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그런 정도까지 정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거짓을 통해서 우리가 이익을 추구하고, 하나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모든 잘못된 말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진짜 진실을 말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말이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마음, 말들이 우리들의 말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맹세를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모면, 거짓을 추궁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모면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말은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죄 있는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잠언서의 말씀이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법이 있냐면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법. 라틴어로 lex talionis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었는데, 그 법은 만일 누군가 우리 친족을 죽인다고 한다면, 친족 중에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어 죽여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끝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는 것은 그 당시에 법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살인자를 찾아가서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피를 흘리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방법을 그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니죠. 오늘날에는 살인자든 살인자가 아니든 우리의 손으로 원수를 사적인 복수를 하면 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이웃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이웃에게 상해를 가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배려를 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회복해야 될 그런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늘 실수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언제 하죠? 내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리고 내가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 폭력을 쓰기도 하고, 폭언을 하면서 갑질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까?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이든 아니면 시장에서 만난 사람이든, 어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이든, 내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식당 주인 주인이 나에게 뭐 잘못을 한 것이든, 뭐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분노하고 이렇게 내 화를 막 내버리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시기를 제발 부탁드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종 우리 교회 교회에 찾아와서 요즘 코로나 상황이니까 코로나 상황이 돼서 코로나 확진을 방지 해보겠다고 공무원들이 나와서 교회를 점검하고 돌아가는 케이스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못마땅한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나온 공무원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대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해대고 화를 내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이렇게 통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해야 돼요. 정말 연약한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도 배려해서 그들을 위하고 이해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줘야지, 우리가 갑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악을 행하면서, 그래서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재정을 맡으신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연세가 좀 많이 드신 분인데 은행에 가서 우리가 매주 돈을 현금을 저축하고 저축하고 이렇게 예금하고 예금하고 하는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그러니까 은행에 은행으로 보면 우리가 큰 고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헌금을 많이 예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큰 고객도 아닌데 아무튼 예치하는 그런 손님은 왕이다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뭔가 가서 좀 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뭐 하나 서비스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하자면 돈, 돈을 묶는 띠를 좀 달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근데 그 띠를, ‘이것은 우리가 제공하는 게 아닌데요’ 하면서 안 주는 거예요. 또 달라고 하니까, 겨우 몇 개 주니까, 기분이 나빠가지고, 그러면서 막 화를 내고 나와버린 거예요. 한국식으로 생각한 거죠. 미국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다 돈 주고 사야 되는 건데, 그런데 한국식으로 생각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온 뒤로 제가 은행에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 담임 목사님이시죠?’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고 한다면 우리와 거래를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행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그런 식으로 반응 안 할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너 손님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게 했냐?’ 하면서, 아마 직원이 우리나라는 혼날 것 같은데, 그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 직원을 두둔하면서 그런 손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좀 창피하기도 했었고 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갑질의 향기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화내고 성질 부리고 욕하고 하는 그런 포악한 모습의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의 모습들이 연약한 자들을 안아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말씀 보면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지 몰라요.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누가 좀 선한 일 좀 하게 할 수 있나요? 누가 좀 이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나요? 하면 왜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는데, 악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열정적인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데에는 자기 돈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나서서 정말 그 열정이 식어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끌어내리고 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열정을 다해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좀 일해달라고 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를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사람을 돕는 일인가? 사람을 해하는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질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언을 주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한 자를 죄로 만들거나, 악한 자를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7번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장점을 말하고, 그래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돼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단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분열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웃들을 볼 때 우리 교우들을 바라볼 때 단점을 보지 마시고 칭찬할 점이 무엇인가를 보시고 그 칭찬할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다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일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일일까를 질문,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질문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늘 넘어집니다. 늘 쓰러집니다. 그 누가 완벽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또 쓰러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또 나가고 또 나가서, 하나님 실수했던 모든 죄악들 다시 한번 회계케 하시고 씻어내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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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 24:8-15)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굴에서 나갔을 때, 다윗도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외쳤습니다. 사울의 양심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닙니다. 제가 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공의를 이루어주실 것을 바랄 뿐, 제가 왕을 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른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라고 다윗은 물었다. 즉 사울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에 대하여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서, 다윗을 조력자로 보지 않고 원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간질은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은 그 옛날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간질한 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숨기고 계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이간질에 하와가 넘어갔습니다. 그게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울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을 믿고 신뢰하고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운다면, 사울 왕은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나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그릴라 백성들을 침공했을 때, 사울 왕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동지였다면, 쓰지 않아도 될 헛심을 쓴 것입니다. 실패한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협력해야 할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감싸주고, 함께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들은 사탄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배우자를 원수로 대하라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런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러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대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친구로 부르면, 친구가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친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친구의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생각해서 싸우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가 함께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원수처럼 대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이간질이라는 점을 알아채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할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간주하면서 죽일 듯이 덤벼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끼리 함께 협력하면서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게 다른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시기하면서 어시스트를 하지 않으면, 그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여, 믿음의 눈을 주옵소서. 사람을 원수로 보지 않고, 동역자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보다 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원수로 생각하거나 싸우려 든다면 결국 함께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원수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죽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지만, 다윗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도 사울처럼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사울을 죽이려 달려들었다면,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승자는 사탄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A. J. Muste라는 사람이 한 말 중에,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의 방법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같이 치고받고 싸울 게 아닙니다. 칼을 들이댄 사울이 이긴 것이 아니라, 칼을 들이밀지 않은 다윗이 승리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런 사울을 죽여버리라고 충동질하고 미워하라고 충동질하는 사탄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1-4) 다윗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를 갚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권세자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물질을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답답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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