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길을 잃었나? (히 12:1-2)

오늘은 먼저 그림을 하나 보고 설교를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림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그림이겠습니까? 무엇이 제일 먼저 눈에 띄십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번 지나가 보죠.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혹시 그림을 보면서 코끼리를 제일 먼저 보신 분 계십니까? 한번 잠깐 손 들어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코끼리가 보인 분이 계십니다. 혹시 나무를 보신 분 계십니까? 예, 나무를 보신 분도 계십니다. 새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새도 많이 보셨네요. 집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예, 집을 보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이냐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림입니다. 코끼리가 보인다고 한다면, 코끼리가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엄격하고 빈틈 없는 성격이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지적받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자신에게 엄격한 스타일의 사람인데요. 능력이 뛰어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들을 다 자신이 하기 때문에, 일들이 늘어나 불안감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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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제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의 잘못과 실수들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미래에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걱정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새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이 좀 희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그런 사람이지만,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또 희생에 비해서 사람들의 인증이 부족해서 좌절하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작은 집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버럭하고 욱하는 성격의 사람일 수가 있다는데요. 일처리가 빠르고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급해지고 욱하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 자신의 성격과 유형과 비슷한가요? 전혀 다른가요? 1부에 물어보니까, 다 신기하게 맞는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여주었는데요. 사실 이건 제 생각인데, 이건 그냥 재미삼아 하는 것이지,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금 설명한 모든 유형은, 어느 한 유형만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 놓으면, 다 맞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지, 이것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나는 이런 성격인가? 이런 유형인가 고민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성격의 유형이 다르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그림이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 먼저 보는가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그림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 거예요. 어떤 그림을 보면 똑같은 그림인데, 어떤 사람들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고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노파가 보인다고 말하는 그런 그림도 있고요. 똑같은 사진인데 어떤 사람은 어떤 잔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 말씀이 있는데요.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도,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바라볼 때도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똑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보고 다르게 접근하는 겁니다. 그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창고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발견해가지고 나오는 것이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것이죠. 그런데 이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보물 창고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셨을 때에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별로 내 인생에 중요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한 것들만 가지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서 저주를 받은 상태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성경 말씀이 우리들 눈 앞에 있지만, 이 성경에 보물 창고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만, 정말 귀중한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엽적인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좋은 것이 놓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개와 돼지는 자신 앞에 진주가 놓여져 있으면 좋아하고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고 오히려 그 진주를 내놓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죠. 시골 쥐는 서울에 올라가서 화려한 모습 멋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망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보배로운 그 선물들을 발견해 나와야 되는데,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더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예수님이고요. 또 그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성경을 읽으나 마나 하는 것이 되죠.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 교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이슬람 교도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은 그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핵심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성경 속에서 발견해야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하셨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서 이야기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성경에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쓴 것인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미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구약 성경을 모세와 모세의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로 이렇게 삼 구분할 수 있겠는데, 이 구약 성경 전체가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모두가 다 이루어져야 했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무슨 책입니까?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인데, 그 영생을 얻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냥 읽고 듣기 좋으라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말씀은 그냥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 영생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누구를 발견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발견해야죠.

종종 예술 작품 같은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혹시 그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예술 작가가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예술 작품이 탄생되는 그 순간 예술 작가와 작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버려서, 그래서 그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자율적인(autonomous) 그 자체로 “의미가 열려 있는” 그런 것이 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의미가 예술 작품에 반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하는 사람이, 자기의 처지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그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내가 보면서 사랑을 느끼면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 작품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작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작품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래서 수천 수만 가지의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미학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유엔 본부에 가면 그림이 UN본부 회의장 양 옆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이 그림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요. 프랑스 작가가 그림을 양 옆에 그려서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도대체 이 작가는 무엇을 그리겠다고 해서 이것을 그린 것일까요? 그때 UN 본부에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이것은 “무제”다 그랬어요. 제목이 없다. 그냥 보는 사람이 알아서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감상하고 싶은 대로, 감상하면 되고, 그래서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좋게 느끼면 되는 것이고, 그 의미는 마음대로 열려 있다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그림이 어떤 그림으로 보이십니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만 대통령, 트루만 대통령은 유엔 본부에 가서 이 그림을 보고 하는 말이, “아, 저건 꼭 계란 후라이 같이 생겼네요.” 또 다른 그림을 보고 “저건 토끼같이 생겼네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해석을 자유롭게 해도 괜찮은 것이 예술 작품인 것이죠. 음악을 듣든, 시를 듣든, 영화를 보든 그 작품이 탄생이 되면 보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을 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즐기고 자신의 입장에서 누리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그런 미학적인 이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무슨 이야기들을 많이 하냐면, 성경도 그런 거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성경도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내가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그런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술 작품처럼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어서, 마음대로 해석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대부분의 것은 제대로 잘 이해해야 돼요.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돼요. 예를 들자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법률이라든가, 계약서라든가,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니요. 계약을 같이 맺어놓고, 내가 이해하기를 돈을, 굳이 내가 이 금액을 다 안 줘도 괜찮지 않을까? 좀 돈을 늦게 줘도 되지 않을까? 계약을 해놓고도,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무난하지 않을까? 마음대로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이면 되는 게 아니라, 결국 법적인 그런 절차에 들어가게 되고,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내가 말하고 듣는다고 한다면, 말한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는가를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지, 그 사람이 말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마음대로 이해해 버리면, 결국 관계가 깨어지고,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그런 아주 위험한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예술 작품의 경우야 이렇게 해석해도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내 마음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정확하게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학생이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해서 답을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대로 쓰면 오답이 되어서, 결국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성경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엉뚱한 것만 보게 된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망하게 되는 것이죠.

불가에는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 달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달을 보고, 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을 불가에서 종종 하는데요. 성경 밖에서 만나는 진리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진리가 다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고, 일반은총(common grace) 차원에서의 진리이기 때문에, 아주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달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무엇을 봐야 되는가? 달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우리가 읽는다고 한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것, 성경이 의도된 것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되는가? 누구를 바라봐야 되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래야 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성경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성경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한다면, 그 신앙 교육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들이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야 될 내용인데요. 오늘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누구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어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바라봐야 될 대상이 누구냐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요. 제대로 된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고, 헛된 믿음이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보고 난리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를 두 개 말씀드리겠는데, 첫 번째는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바로 그 떡을 봤습니다. 그 물고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 떡만 있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게 부족해서 힘들었거든요. 우리가 육신이 배고파서, 배고파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를 보면서 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그 떡과 물고기 자체가 아니라, 떡과 물고기는 하나의 표지판이고, 그걸 통해서 보기를 원하시는 진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기적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표적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표적,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표적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표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표적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표지라고 하는 말이 훨씬 더 맞는 원어에 맞는 말일 겁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이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인(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지라고 하는 말이죠.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가리켜서 표지라고 하는데, 예를 들자면 표지판이 뭐죠? 저기에 뭐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표지판입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게 뭐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뭐냐? 그 기적을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누구를 보라 예수님을 바라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서울에 갔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다 보면, 반가운 표지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표지판이죠? 전주 표지판이 있습니다. 먼 길을 오다가, 언제 전주가 오나 하고 운전하고 오다가 보면, 전주라고 하는 표지판이 딱 보이는 순간에, “이제 다 왔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표지판이 전주입니까? 표지판을 따라 더 가면 전주가 있습니까? 표지판이 전주가 아니에요. 표지판은 전주가 아니고, 그 표지판을 보고 저기에 전주가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 교회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비전 교회라고 하는 간판이 붙여져 있습니다. 주춧돌에 예수비전교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지판 간판을 보면서 이 건물이 예수비전교회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아니요. 여기에 예수비전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고 있구나. 이게 공동체고, 이게 교회고 모임 자체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봐야 되는 것이지,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해서 아 이게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예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읽으면서 그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율법만 보았습니다. 율법이 손가락으로써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율법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 율법주의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그 안타까운 일들을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반복해 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설교에서,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율법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고 율법만을 보여주게 되어서, 결국 그런 바리새인들과 같이 생각하고, 바리새인들처럼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었고 바리새인처럼 성장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완벽하고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고, 더욱더 철저하게 종교적인 열심을 내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주일성수하고,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결과,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어 버린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와서,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암송하면 그게 잘 된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기도를 많이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그게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전도를 더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하면, 그게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될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한 결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첫 번째 결과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졌어요. 왜?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고,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고, 내가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고 가르쳐준 그 시스템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교회 교육에서, 설교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살라고 신앙적으로 살라고 하면, 그러면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고 말았어요. 우리가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겁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옆에 서 계시는 거죠? 왜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오셔야 될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린 것이죠. 다윗처럼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살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을 바친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바치면 성공하게 됩니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면 엄청난 결과를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설교에서 교회 교회에서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설교하지 않고, 한 번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두 번째로 영적인 교만함이 생겨버렸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에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내가 열심히 경건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영적으로 교만함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더 전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영적인 교만이 생기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깔보고 무시하고, 저딴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정지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죠.

누군가 힘들어서 있으면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저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교사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이 학생들을 보면서 자녀들을 보면서 지각한다고 혼내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혼내고, 예배 시간에 태도가 불량하다고 혼내고 자꾸만 혼내는 일들이 반복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녀들은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실증나게 되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러한 교육을 받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나지 않기 위해서, 눈가림만 하는 신앙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죠. 완벽하게 바리새인처럼 행동하게 된 겁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상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일학교 학생들이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더 이상 교회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매력이 없어지는 거에요. 주일 학교에서 장난감을 주고 피자를 주고 상을 주면 그러면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했었는데, 어느 정도 키가 크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이상 피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안 가르쳐도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누가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욕 먹기 때문에, 혹은 칭찬받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율법주의적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님도 완벽하지 않고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교사 선생님도 완벽하지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이 많아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들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숨겨요. 잘 포장하고 잘 행동하면, 그러면 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존경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 위선의 모습 뒤에 엄청난 죄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고, 우리가 완벽하게 변화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근데 우리 자녀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거죠. 엄마 아빠를 보면서, 교사 선생님을 보면서, 지도자들을 보면서 말로는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교사 선생님이, 지도자들이 사실은 뒤로 호박씨 까고 있는 모습을 다 알고 있어요.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골리앗을 무찌르지 못하는 그 부모님, 선생님을 보면서, “왜 당신들은 그렇게 못하느냐?”라고 의구심을 품는 거죠. 의혹을 품는 거죠. 요셉처럼 꿈을 꾸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별 볼 일 없잖아요? 교사 선생님이 별 볼 일 없고, 부모님이 별 볼 일 없고, 목사님도 겨우 그만한 조그만한 교회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그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가 아니라, 아 저 말을 하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서 율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목적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서 예수님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고 완벽하게 살아서 그래서 우리가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따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는 다 연약해서 할 수 없는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셨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 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가서 훌륭한 선배들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 학생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선배들처럼 나도 성공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반에 한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다 실패하는 거에요. 다 들러리 서는 거에요.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살면 여러분도 요셉처럼 살면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생활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거에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면서, 저 사람은 요셉과 같다는 그런 헛소리를 하고, 저 사람은 다윗과 같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높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안 됐어요. 엄청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이었고, 엄청난 죄 가운데 거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면서, 너는 빵점짜리 인생이니 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라고 내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구원의 길로 초대해 주셨어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삭개오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온갖 많은 죄를 지었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보시면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너는 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빵점짜리”라고 하면서 낙인을 찍어버리고, 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케와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신다고 보여주셨을 때, 그 삭개오는 동료들에게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았다”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자기 동네에 가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셨다”고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눈이 번쩍 뜨이게 되는 겁니다. 나도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나도,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위인들처럼 열심히 살면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팽개치지 아니하시고 죄인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 자격 없는 자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해 주고 계시다고 하는 은혜의 메시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나도 욱하는 성질이 있고, 나도 여러 가지로 나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늘 실수가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 아들을 내어주셔서 그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단다. 너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신단다. 자격이 없어도 주님께서는 받아주신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지는, 놀라운 은혜가 넘쳐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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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영적인 선물 (롬 1:8-15) +++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이 되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까지 건너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한다고 하는, 그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이 무엇인가? 그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6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않는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로마 교회에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비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예수 믿어? 저런 바보 같은 놈!’ ‘너, 교회 다녀? 머저리 같은 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저 예수 믿는 놈들, 저 더러운 놈들’ 하는 그런 비난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로마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런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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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나는 금메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학교에서 전교 1등한 사람이, ‘나는 전교 1등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자식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자식이 이런 애예요. 저런 애예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하고,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해야 될 때가 언제이냐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실을 당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렇게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요. 학교에 가면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3% 이하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학교에 가면 전부 다 다 불신자들이고, 교회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학교 내에서, 아이들이 말하기를,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래, 나, 교회 다녀’라고 말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쉽고, 그리고 그 반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말을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즘 한참 핫한 것이 넷플릭스에서 나온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못 보신 분도 있을 것이겠지만, 뉴스로서는 아마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더니, 커다란 미국 백화점 안에 오징어 게임 상품을 파는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 그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뻔뻔하고 위선적인 그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고, 그 상황 가운데서도 아주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으로, 정말 싫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아주 나쁜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작가가 안티 크리스천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저 더러운 놈들, 저, 위선자들, 저 나쁜 놈들, 저 더러운 더럽고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감사할 정도인데요. 부모님들이,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혼내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 교회 상황이 어쩌면 우리 한국의 지금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박해를 당하며, 사회적으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읽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마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위로의 메세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를 16절 말씀에서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이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돈이 있으면 물론 편리합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져낼 수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주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곡식을 쌓아놓은 그 부자를 향해서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셔요. 돈을 아무리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그냥 모든 것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권력이 있다고 한다면 좋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편리한 것이고, 그동안 잘 안 되었던 것들도 맡겼던 것들도 다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부터 살려낼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에게 뛰어난 정치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인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구세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다가, 오히려 망해버리고 마는데요.

오히려 우리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 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고전적인 예화이기 때문에, 아마 신앙생활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들은 예화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꼬마 아이가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엄마가 이 꼬마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부모님들을 오라고, 학부모 면담을 하라고 해서 오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예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리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자기 엄마라고 자신 있게 소개를 하는데, 자기의 엄마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엄마를 학교에,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에게, 어느 날 자기 어머니가 왜 그런 상처를 화상을 입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때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집에 불이 났을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 화마에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그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너는 가슴에 꼭 안아서 아무 흠집 없이 내가 살려냈지만, 그러나 내가 그 불로 인해서 얼굴이 다 화상을 입어버리고, 내 몸이 망가져 버려서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 아이는 어머니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나 같은 죄인을, 내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늘 행동하는 것이 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멀리 떠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형벌 가운데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이고, 사랑해야 될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참된 지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지폐를 오용하기 위한 위조 지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 위조지폐 때문에, 그래서 비난을 받게 되듯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고, 목사는 먹사가 되어 버렸고, 오징어 게임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치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불신자들 앞에 가서 막 윽박지르면서, ‘나는 복음을 안 부끄러워해’ 하면서 윽박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핍박을 당하면, 오히려 겸손하고, 핍박받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온유하게, 이 세상 앞에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라고 하는 한자를 생각하며. 그것은 공의, 정의 이런 말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나?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나? 도대체 정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로 약속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아, 이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의로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그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오늘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는 것, 잘 지키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 것이 나타나냐면,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출발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게 될 때,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아,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라.’ ‘다른 신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섬겨라’고 하는 그 명령이고, 만일 너희가 그렇게 나를 나만을 섬긴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래서 너희를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약속한 것,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결혼 약속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할 때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에 서약을 하는 것이죠. 약속을 하는 것이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서로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요. 그 계약서가 무엇이죠? 바로 10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10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위해서는 너희가 이 10계명의 말씀을 지키라고, 옛 계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인데, 계약서를 쓸 때 몇 장을 쓰죠? 2부 작성하기 때문에, 두 개의 돌판에 계약서를 써서 10계명을 써서, 그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약속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약속을 잘 지켰냐면,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 신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을 맺었지만, 그 약속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약속을 맺었는데, 계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그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그 계약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계속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계약이 파기가 되는 겁니까? 파기가 되는 것이죠. ‘이제는 계약 끝났다.’ ‘계약이 이제 완전 파기됐다’라고 선언해도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계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계약을 파괴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죠. ‘너희들이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이 계약은 끝난 거야’ 하면서 그 계약을 찢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계약을 다 지키도록 너희가 지키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시고, 그 대표 되신,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 대신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복종을, 그 순종을 다 하셔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깨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 호세아서의 말씀에 보면,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라.’ 그래서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인 호세아와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금세 바람이 나버리고 외도를 해 버립니다. 결혼 관계가 깨어져버리고, 파괴되어 버리고,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혼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정상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호세아야, 너는 그 고멜을 버리지 말고, 다시 데리고 와라.’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시 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가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다시 아내를 삼습니다. 또 집을 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을 나간 고멜이 어디에 가 있는가? 사창가에 가 있는 거예요. 사창가에 가 있는 그 여인에게, 여인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결국 그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결국 그 아내를 끝까지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어떻게 그 서약을 깨지 아니하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인간 편에서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길로 나가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깨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계약 끝났다’ ‘더 이상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면서 계약을 박차버리고 도망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약속을 버리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로,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해서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아주 놀라운 소식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인데요. 이 은총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 선물은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믿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징의 게임의 드라마를 보면, 거기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우라고 하는 사람과 그리고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 상우라고 하는 사람은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차비가 없을 때 상우는 자신의 돈을 꺼내서 알리에게 돈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알리의 가족을 걱정해 줍니다.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말 친절한 사람을 알리는 만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알리는 상우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의 한 에피소드 가운데 구슬 따먹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서 서로 구슬을 따내면 승리한 사람은 살아남는 것이고, 구슬을 다 빼앗긴 사람은 죽게 되는 사느냐 죽느냐 그 게임에서 상우와 알리가 한 편 한 편이 되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우가 구슬 따먹기를 하는데, 다 지는 거예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다 빼앗기면,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알리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 방법 쓰지 말고, ‘우리가 같이 사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제안을 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구슬을 함부로 갖고 다니다가 빼앗길 수 있으니까,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 줄게’ 제안을 하는데, 알리는 그 상우를 믿어요. 나에게,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지폐를 건네준 사람, 내 가족을 걱정해 준 그 상우를 믿으면서, ‘그래, 형, 내 구슬을 보관해 달라’고,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구슬을 맡겼는데, 상우는 그 구슬을 돌과 바꿔치기 해버리고, 가짜 구슬을 알리에게 주고, 그 알리의 구슬을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관리자에게 가서 말하는 거죠. ‘봐요. 내가 저 친구의 구슬을 다 차지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결국 알리는 자기가 믿었던 상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오징어 게임이 센세에이션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 일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현실인 거에요.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당하고, 믿었는데 나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상황 가운데서, 늘 배신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정 주었지만, 배신당하고, 표를 주었지만 정치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에 보면 또 다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영이라고 하는 사람과 새벽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슬을 서로 두 사람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지영이가 구슬을 따는 게임을 설계합니다. 설계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우리 구슬을 그렇게 쩨쩨하게 하나씩 둘씩 따먹지 말고, ‘한 번에 끝내버리자.’ 누가 저 벽에 제일 가까이 던지는가? 구슬을 던져서 제일 가까이 던지는 사람이 구슬을 다 빼앗는 것으로 하자 약속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벽은 구슬을 던져서 어느 정도 가까이 붙였습니다. 근데 그 지영은 그 구슬을 어떻게 이길까를 설계했던, 그 구슬을, 지영은 구슬을 잘 던져서 벽에 가까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땅에 떨어뜨립니다. “내 구슬 네가 다 가져.” “너는 살아. 나는 살 이유가 없지만, 너는 살아. 그래서 엄마도 만나.” 이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예요. 그런 엉터리 같은 크리스천들 말고, 정말 참된 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구슬을 다 내어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고통과 우리들의 모든 슬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지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너, 교회 갔다 왔느냐?’라고 하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대답하기 힘든 말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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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신약의 빛 아래서 복음을 선포해야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성경 전체의 가르침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한다. 설교를 전할 때에도 역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의 빛 아래에서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회복했던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이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gospel)이다. 복음은 우리 인생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받을 길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바로 그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서,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지 않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이다. 마치 불치병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과 같다. 이러한 메시지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 짓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종교(religion)를 전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종교는 우리의 노력으로 신에게 도달하려는 시스템이다. 그러한 노력에는 종교적인 헌신이 포함될 수도 있고 윤리적인 거룩이 포함될 수도 있다. 성경에는 종교적 헌신과 윤리적인 거룩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기도를 해야 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하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이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종교적 교훈만을 전하는 것은 성경 전체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에서 한참 미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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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지적한다.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미 부패한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고 누군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 편 뺨을 돌려대고, 누군가 억지로 오리를 걷게 한다면 십리를 걸어주라는 말씀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C.S.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그런 말씀이 감동적인 것은 우리에게 실제로 용서를 해야 할 대상이 나타나기 전까지일 뿐이다.1 실제로 우리들에게 원수가 생긴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런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종교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셨다는 소식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요구만을 전하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메시지일 수 없다. 우리는 복음까지 전해야 한다. 더 나아가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는 아무리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한다 할지라도 사탄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이것을 설교학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부른다.2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종종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예표 되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오해되곤 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억지로 비틀어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어떤 한국의 유명한 목사는 시편 127편을 강해하면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잠은 곧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인간의 모든 경영과 도모가 헛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셔서 죽게 만드셨다고 해석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가상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해석은 아무런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알레고리 해석에 지나지 않고, 결국 이러한 억지 알레고리 해석은 이단들이 성경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성도들이 무방비 상태가 되게 만드는 위험마저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억지풀이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란 구약의 구절들에서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브라이언 채플이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복음을 설교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철저하게 우리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러한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가리켜 the fallen condition focus(타락한 상황에 초점 맞추기)라고 한다. 그러면 결국 그러한 타락한 상황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데, 바로 그런 구세주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무엘서의 엘리 제사장 가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을 읽게 된다. 우리는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들은 그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처럼 죄악을 저지르면 안 된다고 설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죄악을 저지름으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들은 그렇게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설교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설교가 끝난다면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올바로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더 근본적인 성경의 메시지를 설교에 담아내야 한다. 성경은 엘리 가정을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준비시키는 이야기를 대조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거기서 우리는 소망을 본다.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죄를 짓고 멸망당할 때 우리를 절망적인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절망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사무엘이라는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무엘은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역시 그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그는 늙어갈 수밖에 없었고,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처럼 이스라엘을 공평하게 다스릴 수도 없었다. 결국 인간은 소망이 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완벽하신 분을 준비하셨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한다.

이러한 사무엘서의 메시지는 요즈음 지도층의 타락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 큰 소망의 메시지로 다가갈 것이다. 유명한 정치인들의 추문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낙마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의 성적인 타락과 탐욕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는 절망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위대한 어느 목사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어느 정치 지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겐 오직 예수님만이 소망이 되실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타락해서 심지어 하나님을 무시하면서까지 죄를 짓는다. 그래서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무엘서의 메시지를 통해서 전해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함을 역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저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사무엘서에서의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대체로 설교자들은 어떻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는지 그 방법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했기 때문에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었다. 다윗은 사울의 갑옷과 투구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물맷돌을 선택했기 때문에 잘 싸울 수 있었다. 이런 노하우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만 전하고 끝낸다면 성경적인 복음의 메시지와는 무관할 것이다. 그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런 방법을 사용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영적인 골리앗을 무찌를 것이라고 다짐하게 되겠지만, 실제로는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윗을 닮은 게 하나도 없다. 다윗처럼 용감하게 믿음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 보고 싶지만 언제나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서 우리들은 다윗에 비유되는 것이 아니라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숨었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유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골리앗 앞에 나가서 싸울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각오하고 골리앗에게 달려들어 물리치고 나라를 구했다. 우리가 다윗처럼 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분이 계신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윗은 영원한 이스라엘의 구주가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소망처럼 보였던 그 다윗이 결국은 신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신하를 죽이는 파렴치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다윗을 뛰어넘는 구주가 계시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십자가에 가셨다. 그래서 죽는 것 같았으나, 결국 부활하셔서 사탄을 물리치고 최후 승리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에겐 골리앗 앞에 서 있는 상황들이 있다. 그때마다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바로 그 주님만을 말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우리가 연약하여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메시지는 그러한 성경적 복음의 메시지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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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2003), 182.[]
  2. 브라이언 채펠,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은성, 2016), 브라이언 채플,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CUP, 2015),[]

재미도 없고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기독교 영화

문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가운데 영화는 대중들이 쉽게 접하면서 막강현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영화는 세속적인 아젠다로 우리 사회를 점점 더 타락한 세속문화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크리스천들은 아예 세속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런 영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화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더러운 문화에 노출되면 결국 영적인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문화의 영역을 포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적 정신을 표방하는 카운터 문화를 만들어 세속적이고 타락한 문화를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기독교 영화이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기독교 영화를 만들려는 분들을 보면 너무 고맙고, 그러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마음껏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기독교 영화들은 한결같이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뻔한 스토리에, 뻔한 결말, 억지로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어색함 때문에 기독교 영화들은 거의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에는 제작비, 배우의 캐스팅, 플롯의 창의성 등등 여러 요소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적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최고의 배우들과 최첨단 장비들을 사용하면서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쏟아붓는 세속 영화와는 달리,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제한된 인력과 자금을 동원하여 만드는 것에서 처음부터 영화의 수준이 갈리고 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라 할지라도 재미있어서 영화를 찾기보다는, 기독교 영화의 명맥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관람하는 지경이다. 한마디로 불쌍해서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탄생한 소위 기독교 영화가 사실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영화에 목사님이 등장하고, 교회가 등장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적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복음과는 상관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회심한 이야기, 시련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에 대한 이야기, 선교를 위해 어떤 놀라운 일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서 어떻게 희생적인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기독교 영화에 등장한다.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엘리엇 선교사님, 옥한흠 목사님, 교회 오빠, 등등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런대로 꽤 괜찮은 종교이고 멋있는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을 어필한다. 하지만 이런식의 접근은 전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사실 불교 쪽 영화에서는 어떤 스님이 정말 차원이 높은 경지에 올라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한다. 조폭들을 한 없이 품는 스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산 스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 등 불교 영화는 그야말로 불교적이다. 불교는 위대한 스승의 모범을 제시하면서 누구든지 그 위대한 스승의 뒤를 따른다면 똑같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부처의 길을 간 사람의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길은 감동을 주곤 한다.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마다 불교적 가르침을 확신한다. “그래, 나도 수도를 하고 또 하면 나도 그런 부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영화라고 나온 영화들은 등장인물과 배경은 기독교인들이고 교회이지만, 그 영화의 메시지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불교적이다. 즉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사랑의 실천을 하는 삶을 살았는데, 여러분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의 열정을 가지고 살았는데, 여러분도 그렇게 주의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사랑의 교회 비슷한 규모의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는 “적어도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선하게 살 수 없는 죄인이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기독교 영화에서는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가 실종되어버렸다. 사실 그 복음이 먼저 사라진 것은 교회의 강단에서부터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전혀 발견할 수 없고, 그냥 우리도 열심히 잘 살면 보다 더 나은 삶을 얻게 될 것이라는 불교적 메시지만 보인다. 위대한 선각자나 위대한 스승,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 메시지만 보인다.

크리스천과 교회가 등장하고 대화 중에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기독교 영화가 되는 게 아니다. 놀랍게도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안에는 전혀 기독교적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감동도 넘친다. 안타깝게도 한국 기독교 영화는 7,80년대 문학의 밤 수준보다 더 나아진 것은 규모와 재정 정도일 뿐이다. 물론 그 책임은 잘못 가르친 목사들에게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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