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길을 잃었나? (히 12:1-2)

오늘은 먼저 그림을 하나 보고 설교를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그림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그림이겠습니까? 무엇이 제일 먼저 눈에 띄십니까?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한번 지나가 보죠. 여러분들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혹시 그림을 보면서 코끼리를 제일 먼저 보신 분 계십니까? 한번 잠깐 손 들어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코끼리가 보인 분이 계십니다. 혹시 나무를 보신 분 계십니까? 예, 나무를 보신 분도 계십니다. 새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새도 많이 보셨네요. 집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예, 집을 보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 그림이냐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게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그림입니다. 코끼리가 보인다고 한다면, 코끼리가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엄격하고 빈틈 없는 성격이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지적받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자신에게 엄격한 스타일의 사람인데요. 능력이 뛰어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것들을 다 자신이 하기 때문에, 일들이 늘어나 불안감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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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제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의 잘못과 실수들을 곱씹어 생각하면서 미래에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걱정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새를 먼저 보신 분이 있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이 좀 희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그런 사람이지만,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또 희생에 비해서 사람들의 인증이 부족해서 좌절하기 쉬운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작은 집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버럭하고 욱하는 성격의 사람일 수가 있다는데요. 일처리가 빠르고 자기 관리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급해지고 욱하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시 자신의 성격과 유형과 비슷한가요? 전혀 다른가요? 1부에 물어보니까, 다 신기하게 맞는 것 같다고 하는 그런 반응을 보여주었는데요. 사실 이건 제 생각인데, 이건 그냥 재미삼아 하는 것이지, 과학적인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지금 설명한 모든 유형은, 어느 한 유형만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 놓으면, 다 맞는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지, 이것 때문에 집에 돌아가서 나는 이런 성격인가? 이런 유형인가 고민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성격의 유형이 다르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그림이지만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 먼저 보는가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 그림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 거예요. 어떤 그림을 보면 똑같은 그림인데, 어떤 사람들은 젊은 여인이 보인다고 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노파가 보인다고 말하는 그런 그림도 있고요. 똑같은 사진인데 어떤 사람은 어떤 잔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은 것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 말씀이 있는데요.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도,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바라볼 때도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똑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보고 다르게 접근하는 겁니다. 그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창고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발견해가지고 나오는 것이 사람들마다 각각 다른 것이죠. 그런데 이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보물 창고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셨을 때에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기를 원하는 것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성경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 별로 내 인생에 중요하지도 않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한 것들만 가지고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서 저주를 받은 상태라고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성경 말씀이 우리들 눈 앞에 있지만, 이 성경에 보물 창고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만, 정말 귀중한 보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지엽적인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 좋은 것이 놓여져 있다고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개와 돼지는 자신 앞에 진주가 놓여져 있으면 좋아하고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고 오히려 그 진주를 내놓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죠. 시골 쥐는 서울에 올라가서 화려한 모습 멋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서울도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망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정말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보배로운 그 선물들을 발견해 나와야 되는데,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아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더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예수님이고요. 또 그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성경을 읽으나 마나 하는 것이 되죠.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유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슬람 교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이슬람 교도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신약 성경의 일부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은 그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핵심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 성경 속에서 발견해야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하셨던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만나서 이야기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성경에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쓴 것인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그런 미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구약 성경을 모세와 모세의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로 이렇게 삼 구분할 수 있겠는데, 이 구약 성경 전체가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고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모두가 다 이루어져야 했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누구에 대하여?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무슨 책입니까? 영생을 얻게 하는 책인데, 그 영생을 얻게 하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있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5장 46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냥 읽고 듣기 좋으라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말씀은 그냥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영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 영생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누구를 발견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발견해야죠.

종종 예술 작품 같은 경우에는 작가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고들 이야기합니다. 혹시 그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어떤 예술 작가가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예술 작품이 탄생되는 그 순간 예술 작가와 작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 독립적인 개체가 되어 버려서, 그래서 그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자율적인(autonomous) 그 자체로 “의미가 열려 있는” 그런 것이 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의미가 예술 작품에 반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하는 사람이, 자기의 처지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그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면 괜찮다는 거예요. 내가 보면서 사랑을 느끼면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그 작품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작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작품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래서 수천 수만 가지의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 미학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유엔 본부에 가면 그림이 UN본부 회의장 양 옆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이 그림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요. 프랑스 작가가 그림을 양 옆에 그려서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도대체 이 작가는 무엇을 그리겠다고 해서 이것을 그린 것일까요? 그때 UN 본부에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이것은 “무제”다 그랬어요. 제목이 없다. 그냥 보는 사람이 알아서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감상하고 싶은 대로, 감상하면 되고, 그래서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면 좋게 느끼면 되는 것이고, 그 의미는 마음대로 열려 있다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그림이 어떤 그림으로 보이십니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트루만 대통령, 트루만 대통령은 유엔 본부에 가서 이 그림을 보고 하는 말이, “아, 저건 꼭 계란 후라이 같이 생겼네요.” 또 다른 그림을 보고 “저건 토끼같이 생겼네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해석을 자유롭게 해도 괜찮은 것이 예술 작품인 것이죠. 음악을 듣든, 시를 듣든, 영화를 보든 그 작품이 탄생이 되면 보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을 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즐기고 자신의 입장에서 누리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그런 미학적인 이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무슨 이야기들을 많이 하냐면, 성경도 그런 거 아니겠는가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성경도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내가 누리고 싶은 대로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그런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예술 작품처럼 그 의미가 무한대로 열려 있어서, 마음대로 해석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해석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대부분의 것은 제대로 잘 이해해야 돼요.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돼요. 예를 들자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법률이라든가, 계약서라든가,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니요. 계약을 같이 맺어놓고, 내가 이해하기를 돈을, 굳이 내가 이 금액을 다 안 줘도 괜찮지 않을까? 좀 돈을 늦게 줘도 되지 않을까? 계약을 해놓고도,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아도 무난하지 않을까? 마음대로 생각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이면 되는 게 아니라, 결국 법적인 그런 절차에 들어가게 되고,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대화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내가 말하고 듣는다고 한다면, 말한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는가를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지, 그 사람이 말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마음대로 이해해 버리면, 결국 관계가 깨어지고,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그런 아주 위험한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예술 작품의 경우야 이렇게 해석해도 되고 저렇게 해석해도 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내 마음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정확하게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학생이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해서 답을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대로 쓰면 오답이 되어서, 결국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에요. 성경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엉뚱한 것만 보게 된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망하게 되는 것이죠.

불가에는 견월망지(見月忘指)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 달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달을 보고, 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을 불가에서 종종 하는데요. 성경 밖에서 만나는 진리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진리가 다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고, 일반은총(common grace) 차원에서의 진리이기 때문에, 아주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달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무엇을 봐야 되는가? 달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우리가 읽는다고 한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것, 성경이 의도된 것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되는가? 누구를 바라봐야 되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래야 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성경이 우리들에게 유익한 성경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한다고 한다면, 그 신앙 교육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찬들이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야 될 내용인데요. 오늘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누구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그랬어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바라봐야 될 대상이 누구냐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이요. 제대로 된 신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 믿음이고, 헛된 믿음이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보고 난리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를 두 개 말씀드리겠는데, 첫 번째는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 유대인들은 바로 그 떡을 봤습니다. 그 물고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 떡만 있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게 부족해서 힘들었거든요. 우리가 육신이 배고파서, 배고파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떡과 물고기를 보면서 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그 떡과 물고기 자체가 아니라, 떡과 물고기는 하나의 표지판이고, 그걸 통해서 보기를 원하시는 진짜 실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기적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표적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표적,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표적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요. 이렇게 표적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표적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표지라고 하는 말이 훨씬 더 맞는 원어에 맞는 말일 겁니다.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는데요. 이 세메이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사인(sign)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표지라고 하는 말이죠.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가리켜서 표지라고 하는데, 예를 들자면 표지판이 뭐죠? 저기에 뭐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표지판입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게 뭐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뭐냐? 그 기적을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누구를 보라 예수님을 바라봐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서울에 갔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쭉 오다 보면, 반가운 표지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표지판이죠? 전주 표지판이 있습니다. 먼 길을 오다가, 언제 전주가 오나 하고 운전하고 오다가 보면, 전주라고 하는 표지판이 딱 보이는 순간에, “이제 다 왔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표지판이 전주입니까? 표지판을 따라 더 가면 전주가 있습니까? 표지판이 전주가 아니에요. 표지판은 전주가 아니고, 그 표지판을 보고 저기에 전주가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 교회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비전 교회라고 하는 간판이 붙여져 있습니다. 주춧돌에 예수비전교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지판 간판을 보면서 이 건물이 예수비전교회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아니요. 여기에 예수비전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고 있구나. 이게 공동체고, 이게 교회고 모임 자체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봐야 되는 것이지,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해서 아 이게 교회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예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읽으면서 그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율법만 보았습니다. 율법이 손가락으로써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데,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율법만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그 율법주의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그 안타까운 일들을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반복해 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설교에서,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율법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보여주지 않고 율법만을 보여주게 되어서, 결국 그런 바리새인들과 같이 생각하고, 바리새인들처럼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었고 바리새인처럼 성장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완벽하고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고, 더욱더 철저하게 종교적인 열심을 내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쳐준 결과, 바리새인처럼 주일성수하고,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결과,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어 버린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와서,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자녀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암송하면 그게 잘 된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기도를 많이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그게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전도를 더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하면, 그게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될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적으로 생각한 결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첫 번째 결과는 예수님이 필요 없어졌어요. 왜?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고,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고, 내가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고 가르쳐준 그 시스템 속에서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교회 교육에서, 설교에서 열심히 믿음으로 살라고 신앙적으로 살라고 하면, 그러면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리고 말았어요. 우리가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겁니다. 열심히 믿음으로 살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옆에 서 계시는 거죠? 왜 예수님께서 피 흘리고 계시는 거예요? 오셔야 될 이유가 전혀 없어져버린 것이죠. 다윗처럼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살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을 바친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바치면 성공하게 됩니다.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면 엄청난 결과를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 옆에 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설교에서 교회 교회에서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서, 한 번도 설교하지 않고, 한 번도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하게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두 번째로 영적인 교만함이 생겨버렸고,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에 사람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내가 열심히 경건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영적으로 교만함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더 전도도 많이 하고, 더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영적인 교만이 생기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깔보고 무시하고, 저딴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고 정지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죠.

누군가 힘들어서 있으면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저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요. 교사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이 학생들을 보면서 자녀들을 보면서 지각한다고 혼내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혼내고, 예배 시간에 태도가 불량하다고 혼내고 자꾸만 혼내는 일들이 반복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자녀들은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실증나게 되는 일이 되어 버렸고, 그러한 교육을 받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혼나지 않기 위해서, 눈가림만 하는 신앙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죠. 완벽하게 바리새인처럼 행동하게 된 겁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상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일학교 학생들이 참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에 가면 더 이상 교회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매력이 없어지는 거에요. 주일 학교에서 장난감을 주고 피자를 주고 상을 주면 그러면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했었는데, 어느 정도 키가 크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이상 피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안 가르쳐도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누가 시키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욕 먹기 때문에, 혹은 칭찬받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율법주의적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님도 완벽하지 않고요. 장로님도 권사님도 교사 선생님도 완벽하지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이 많아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것들을 들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잘 숨겨요. 잘 포장하고 잘 행동하면, 그러면 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이 되어서, 존경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 위선의 모습 뒤에 엄청난 죄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고, 우리가 완벽하게 변화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근데 우리 자녀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거죠. 엄마 아빠를 보면서, 교사 선생님을 보면서, 지도자들을 보면서 말로는 착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부모님이, 교사 선생님이, 지도자들이 사실은 뒤로 호박씨 까고 있는 모습을 다 알고 있어요.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 골리앗을 무찌를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데 골리앗을 무찌르지 못하는 그 부모님, 선생님을 보면서, “왜 당신들은 그렇게 못하느냐?”라고 의구심을 품는 거죠. 의혹을 품는 거죠. 요셉처럼 꿈을 꾸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별 볼 일 없잖아요? 교사 선생님이 별 볼 일 없고, 부모님이 별 볼 일 없고, 목사님도 겨우 그만한 조그만한 교회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그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가 아니라, 아 저 말을 하고 있는 분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우리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서 율법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목적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서 예수님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고 완벽하게 살아서 그래서 우리가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따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는 다 연약해서 할 수 없는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주셨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하죠.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열심히 공부해야 좋은 대학 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대학 가서 훌륭한 선배들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우리 학생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싶다. 나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한 선배들처럼 나도 성공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반에 한두 명이에요. 나머지는 다 실패하는 거에요. 다 들러리 서는 거에요.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살면 여러분도 요셉처럼 살면 그러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신앙생활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거에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면서, 저 사람은 요셉과 같다는 그런 헛소리를 하고, 저 사람은 다윗과 같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높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 같은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안 됐어요. 엄청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이었고, 엄청난 죄 가운데 거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면서, 너는 빵점짜리 인생이니 너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라고 내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고, 구원의 길로 초대해 주셨어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삭개오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온갖 많은 죄를 지었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삭개오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보시면서,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너는 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다. 빵점짜리”라고 하면서 낙인을 찍어버리고, 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케와 같은 사람도 사랑해 주신다고 보여주셨을 때, 그 삭개오는 동료들에게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았다”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자기 동네에 가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셨다”고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눈이 번쩍 뜨이게 되는 겁니다. 나도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나도,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위인들처럼 열심히 살면 우리도 이 사람들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팽개치지 아니하시고 죄인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 자격 없는 자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해 주고 계시다고 하는 은혜의 메시지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걱정하지 마라. 나도 욱하는 성질이 있고, 나도 여러 가지로 나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나도 늘 실수가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 아들을 내어주셔서 그 은혜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단다. 너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신단다. 자격이 없어도 주님께서는 받아주신다.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이 놀라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우리 모두에게 또한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지는, 놀라운 은혜가 넘쳐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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