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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받아주신 주님 (마 19:13-15)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숫자를 셀 때 남자 어른들만 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실 때 몇 명을 먹였는가? 숫자를 세면서,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빼고 남자 어른들만 숫자를 센 것이죠. 여기서 남자 어른이라고 한다면, 몇 살부터가 어른으로 여겨지는 걸까요? 몇 살이면 어른이 되는 것입니까? 20세? 18세? 그 당시에 몇 살이면 어른으로 여겨졌을까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13살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13살이 되면, 그리고 여자아이가 12살이 되면 성인식을 합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그 행동하는 것들을 옆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요. 남자아이가 13살이 되거나 여자 아이가 12살이 되면, 거대하게 성인식을 치르면서, 축하해 주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남자아이는 그때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바르 미츠바” 다시 말하자면 “율법의 아들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여자 아이들의 경우에는 “바트 미츠바” “율법의 딸이 되었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 12살 13살이 되면 성년이 되었다고 축하해 주는 그런 의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바르 미츠바” “바트 미츠바” 그런 행사 때, 유대인 부모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해요. “저를 이 아이를 책임질 역할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부럽습니까? 아마 기도는 그렇게 했어도, 계속해서 책임을 지고 사랑하고 아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아이들을 숫자에 넣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그 관점이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주는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을 왜 숫자에 넣지 않았는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아직 인격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것이죠.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경제활동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을 받아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아이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게,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유대인들에게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이죠. 우리나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나라는 유교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아서 예전에는 어른들을 중요하게 여겼고 아이들을 무시하는 그런 모습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장유유서라 해서 어른들은 공경하고 어른들은 대접했지만, 아이들은 깔보고 무시하는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었는데요. 저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못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먼저 상을 차려드리고, 아버지께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때 먹었어요. 같은 상에서 먹게 된다고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먼저 건들지 않은 반찬에 제가 손을 댔다가, 엄청나게 두드려 맞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세상이 많이 바뀌었죠.


아마 이런 모습들이, 아이들을 무시하던 모습들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많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한번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고 있는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부모님들의 생각은 이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축복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얹고 복을 빌어주시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제자들이 그 부모님들을 꾸짖고 아이들을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애들을 데리고 가라고 한 것이죠.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축복해 주고 기도해 준다고 한다면, 더 중요한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고,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방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되고,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 되는데, 아무 가치가 없는 이 아이들에게 시간을 뺏겨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에 이 제자들은 이 아이들을 내어 쫓으려고 했었던 것이죠.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각 동네마다 약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약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차력쇼를 하기도 하고 마술을 보여주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약을 팔았었는데,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아이들도 당연히 구경거리가 생기니까 왔습니다. 그러면 그때 했던 자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 왜 애들은 가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아이들이 돈을 주고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이익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아이들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은 저리 가라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그런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살았던 것이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쫓지 말고, 그 아이들을 내게로 오라고, 데려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이들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덧붙인 말씀이, 천국이 누구의 것인가? 하늘나라에 누가 들어갈 것인가? 이런 아이와 같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아이가 천국을 소유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이들을 환영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바라보실 때,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효용 가치에 따라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인격 그 자체로 보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아이들을 환영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아이들의 것이다. “이런 사람의 것이다”라고 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어린아이들만 갈 수 있다고 하는 의미일까요? 어른들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라고 해서 순수하거나 마음이 착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우리 아이들이 싸울 때 보면, 얼마나 죽이려고 달려드는지, 너무나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나 증오하면서 미워하면서,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지, 제가 충격을 받기도 했었던 것이죠. 아이라고 해서 순수하거나 착하거나 아이들이라고 해서 다 좋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연약한 자라고 할지라도 받아주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하늘나라는 누가 가는가? 능력이 있고 뛰어나고 높은 성과를 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그런 위대한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능력이 없어도 죄인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귀하게 보시고 주님께서 받아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사람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평가합니까? 사람들은 우리들의 가진 것으로 평가할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건강한가로 평가할 겁니다. 얼마나 쓸모가 있는가로 우리를 평가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이 없어지고 나이가 많으면, 기운이 빠지고 이제는 내 인생은 끝났나? 내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생각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어떻게 보시는가? 네가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나 많은가? 네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행할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공로로 너희가 기여할 수 있는가? 그것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아이를, 아이와 같은 자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바라보듯이,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그 모습을 우리가 그대로 본받아서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사람을 대하는 성경적인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9절에서부터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욕하고 비난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보아야 되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아야 되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그런 모습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는 그 사실로 사람들을 대해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인가? 아이들이 힘이 없고 연약하고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아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녀로 보고 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옆 사람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으셨군요.” 항상 우리가 옆 사람을 대할 때, 나와 함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할 것인가? 어린아이로 보지 말고, 힘이 없는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 사람을 능력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보아야 되는 것이고요. 어떻게 바라봐야 되는가? “예수님이 내 앞에 있다. 주님을 내가 대면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우리보다 직급이 낮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거나 아니면 가게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무시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갑질해 대는 것이 아니라 저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저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내 앞에 있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 있는 제3세계 외국인 노동자가 와 있다고 한다면, 깔보고 무시할 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해 주고 인격적으로 그들을 잘 대해줘야 되는 것이죠. 나와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싸우고 다툴 게 아니라 그들을 존중해 주어야 되는 거예요.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든지, 때로는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 원수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이단이나 타 종교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의 의견에 동조를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그런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며, 우리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습으로 차별할 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예전에 비해서는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우리 젊은 세대들이 자녀들을 기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예전에 아이들을 양육할 때보다, 저보다 더 훌륭하게 정말 사랑이 많게 모든 아이들을 잘 대해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예전 윗 세대로부터 대우를 잘 받지 못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몸으로 배운 게 없어서, 때때로 우리들의 행동이나 말이나 모든 면에서 잘못된 행동들이 나오게 될 때가 많이 있는데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그 원칙에 따라서 우리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양육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죠.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능력이 없다고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의견도 존중해 주면서, 부모의 결정을 무조건 따라오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고 한다면, 내가 이미 결정해 놓고 그것을 따라오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아이들이 반대한다면,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고민해 가면서, 함께 아이들을 하나의 파트너로, 인격 공동체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죠.


힘없는 아이라고 협박하거나 겁을 주면 안 됩니다. 참 예전에는 왜 이렇게 겁을 많이 줬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아무런 힘도 없다고 해서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겁을 주면서 겁박을 해가면서, 아이들을 억지로 하기 싫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이끌어다 주는 대로 무조건 따라오게 했던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 부모들의 그 교만함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는 그런 모습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내에서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과 늘 지나치면서 부딪히고 같이 마주 대하게 될 텐데요. 우리 아이들을 우리 교회에 있는 어른들께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지 말아야 될까요? 잔소리하지 않아야 됩니다. 따라서 한번 합시다. 잔소리하지 맙시다. 잔소리가 너무 많아요. 아이들을 보면서 뛰지 마라 저리 가서 놀아라. 시끄럽게 하지 마라.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데 조용히 해라. 밥 먹으면 밥 다 먹어라 반찬 남기지 마라 밥 남기지 마라. 왜 그것까지 참견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꾸만 잔소리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기본적으로 내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어른이고 우리 아이들은 아이니까, 내가 교만하게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훈계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은데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잔소리하고 훈계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너희들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너희가 무엇인가 된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선생질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들이 너무나도 쉽게 나보다 연약한 사람이 있으면, 자꾸만 가르치려고 들고, 자꾸만 잔소리하려고 들고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입을 닫고 우리 아이들을 존중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그런 정말 너그러운, 주님의 마음을 닮은, 다 포용하라 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의 마음을 닮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말을 해주어야 될까요? 참 예쁘구나. 사랑스럽구나. 무엇을 도와줄까?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도와주는 그런 어른들이 되어야 할 것이겠고요. 뿐만 아니라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서서 아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이 많은 우리 어른들이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아이들을 때리거나 주먹으로 아이들 꿀밥을 주거라 함부로 몸을 터치하거나 하지 마시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우리가 대해야 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문화적인 관습 속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버려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기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전혀 유익하지 않아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되는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오늘 이 읽게 되겠는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그 말씀이 제게 전달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셔서,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의 방식 가운데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지금까지 그냥 정당한 줄 알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잘못된 것이 드러나게 되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서, 제 삶이 바뀌게 도와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내 삶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을 보면서, “그럼 그렇지. 맞아. 이 말이 맞아.” 하면서, 내게 좋은 성경 말씀들만, 내 습성에 맞는 성경 말씀들만 빼내서 적용하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성경 가운데 어떤 말씀이 있어요? 잠언서 13장 2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이 징계하느니라.” 맞아. 회초리를 들어야 되겠다. 때려야 되겠다. 근데 그런 말씀인가요? 성경 말씀을 잘 읽어야죠. 우리가 유교적인 사교 방식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그 방식이 맞는구나 하면서,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적용시키면서, 자꾸만 확증 편향된 방식으로 성경을 잘못 이해할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전에 노예 제도가 있을 때는, 내가 노예를 데리고 있는 것이 정당하구나. 성경을 보면서 노예 제도를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성경 속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가 잘못 대할 것이 아니라 나쁘게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 있지만, 그런 말씀에 대해서는 그냥 흘려버리고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이 삶의 방식을 강화시켜 주는 말씀들만 선별해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고 하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 성경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아이들을 슬프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억울하지만 힘이 없으니까 따라오게 만드는 그런 잘못된 양육 방식을 우리가 계속해서 고수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내가 잘못 살았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나가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성경 읽기가 잘못된 것이고, 백해무익한 성경 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누가 그랬는가? 제가 그랬어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나는 괜찮구나. 나는 내 삶이 괜찮구나. 그렇게 잘못되게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양육해 왔는데 이미 시간이 늦어버렸어요.

제자들의 태도는 그 당시 문화와 습관에 얽매여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이런 아이들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해선 안 된다”라고 쫓아버린 것이죠. 다른 사람들도 그 제자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냈을 겁니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이 많은데 아이들 같은 게 어디 예수님 앞에 오는가? 생각을 한 것이죠. 하지만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 사실은 교만한 마음이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아무런 힘도 없고 연약한 자들을 불러주시고 안아주시는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장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 아무런 능력도 없고 아무런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도 주님께서 받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우리가 사랑해야 될 사랑마저도 사랑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인생들이 우리들인데, 만일 우리들의 장점만을 가지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이들처럼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는 아이들을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희들도 우리들도 주님께서 사랑으로 받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저희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주셨는데, 그러지 못하고 늘 교만하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살아왔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늘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악한 길로 가려고 하는 마음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주의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밝혀주셔서 이제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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