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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마 26:31-3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두가 다 버리고 도망갈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그 길에 함께 동참하고, 주님의 고난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이 위협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도망가고 다 뿔뿔이 흩어질 거라고 하는 것, 배신할 거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던 것이죠. 구약 성경 스가랴야서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목자를 치면 양 떼가 다 흩어져 버릴 거라고 하는, 그 스가랴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치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면, 제자들이 다 도망갈 거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사실이 어쩌면 가장 배신감을 느낄 만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제자들을 친히 사랑해 주시고 돌보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사랑해 주신 예수님인데, 정작 예수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아무도 예수님 편이 없는 겁니다.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서 있는 사람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도망가게 될 거라고 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이런 경우들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에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참 누구보다도 더 관심을 가져주고,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는데, 정작 그 사람이 오히려 더 불평과 불만을 내비치면서, 그리고 떠나가는 경우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받는 그 정말 충격, 그럴 때 받는 그 배신감은 너무나도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필라델피아에서 목회할 때에는 성도님들이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미국에 새로 오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모든 것들이 다 어렵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죠. 아이들 학교에 입학시키는 문제에서부터 주택을 구하는 문제, 또한 운전면허증을 따야 되는 문제, 또한 여러 가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한 문제 등등, 모든 것들이 참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많아서, 그래서 목사님이 이거 어떡해요? 이거 어떻게 해요? 물어보면 일일이 다 가서 도와주고, 함께 내 아이인 것처럼, 내 일인 것처럼, 그렇게 많이 도와주게 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런 분들이 교회를 그냥 떠나버립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정착이 됐다 싶으면, 교회를 떠나는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온갖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면서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교우들도 교우들도 많이 도와주고 많이 사랑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런 일들을 한 번 두 번 경험할 때마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마음의 문을 점점 닫아버리게 되는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목회자들 가운데서, 상담을 전공하신 목회자들이 있어서, 상담을 많이 해주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의 고통이 더 크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상담을 할 때는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다 이야기하면서, 그것 때문에 상담을 해주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하는데, 정작 그렇게 해서 상담을 잘해주고 나서 문제가 다 해결이 되면, 그다음에는 교회를 떠나버린다고 그래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옛날 힘들었을 때, 자신의 그 정말 힘들었던 그 모습들이 다 일일이 다 발가벗겨져 버려서, 그 정말 추한 모습들이 다 드러난 것이 알고 있는 분 앞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나중에는 슬그머니 떠나버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엄청난 배신감, 엄청난 그런 슬픔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 그런 목사님들의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참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그러한 일들을 당할 때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배신했던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정말 사랑해 주었지만, 제자들이 모른다 하고서 다 도망가 버리는, 그런 배신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끝까지 제자들을 품으시고 회복시키시는, 그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힘을 얻기도 하고, 위로를 얻기도 하고, 그리고 사명을 다시 재확인하는 그런 말씀이 바로 이런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우리도 이 예수님의 말씀, 주님의 이 이야기들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배신을 당했던 것과 같은 일들이 우리들에게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죠. 나는 사랑을 베풀었으나 오히려 배신을 당하고, 나는 친절하게 베풀었으나 오히려 그 친절을 베푼 것은 다 잊어버리고, 조그마한 잘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하고 떠나가 버리는 배신감의 경험들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당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친구와의 관계 가운데서도 여러 모습 속에서도 이런 배신의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이러한 경험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주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했는데, 내가 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내 없는 시간을 쪼개서 헌신하고 없는 물질을 쪼개서 헌신했는데,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뒤에서 수근수근거리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정말 충격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오히려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겠고요.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결과되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죠. 나는 정말 믿음으로 살려고 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내 믿음과 내 헌신과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 그런 경험들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분노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실망해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저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내게 박수 쳐주는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가, 사람들이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주는가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이야기해 주는가, 거기에 우리의 관심이 쏠려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시는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해 주셨고, 사실 내가 주님을 모른다고 한 적이 너무나도 많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적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며, 오늘 또다시 한번 힘과 용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신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소망을 걸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 제자들을 믿고 제자들을 의지하고, 제자들에게 소망을 두기 위해서 제자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의탁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원문을 보니까 이 표현이 어떤 표현이냐 하면 믿지 않으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믿지 않으셨다. 그들이 누군지 알기 때문에 제자들을 믿지 않았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소망을 제자들에게 소망을 사람들에게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함께 일을 해야 하고, 함께 주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같이 사역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았지만, 그러나 그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소망을 다 제자들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자들이 어떤 사람인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누굽니까? 조그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배신할 수 있는 게 제자들이에요. 조그만 문제가 생기면 그냥 배신해 버리고, 돌아설 수 있는 것이 그게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믿지 않으셨다. 그 얘기는 제자들에게 과도한 소망을 제자들에게 두지 않으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되는 것인데요. 이 말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적당히 사랑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제자들이 나를 배신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나를 좋아해 주고, 지금은 나를 따르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 떠나버릴 거라고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금만 적당히 그냥 우리가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듯이, 적당히 정도 것만 해주고 완전히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정말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 주셨어요.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데, 종종 이 세상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어차피 배신을 당할 수 있고,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가변적인 것이어서, 지금은 좋지만 나중에는 헤어질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냐면, 어떤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냐면, 정 주지 않는 게 지혜라고 우리 세상 사람들은 많이 생각하는 거죠. 유행가 가사 가운데 “정 주지 않으리라”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장욱조 씨가 만든 노래죠. “사랑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헤어지고 남는 것은 눈물보다 정이었네. 이제 그 누구를 다시 사랑하더라도 정 주지 않으리라. 정 주지 않으리라. 사랑보다 깊은 정을 두 번 다시 주지 않으리라.”라고 하는 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했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정을 주어 버렸지만, 그것이 중단되고 말아서, 그것이 깨어지고 말았을 때 배신감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서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냐면, 이 세상 사람들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다시는 정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다시는 그렇게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냥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내가 너무나도 과도하게 사랑하면, 그러면 결국은 상처받을 수 있고, 결국은 배신당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가? 앞으로는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열어놓고,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하고,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관계하고 그저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어쩌면, (물론 그 유행과 가사가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한 번 사랑의 상처를 받게 되면, 배신을 느끼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움츠리면서 더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배신할 거라고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적당히 사랑하고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해주고, 배신을 당해도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만 그저 조금만 사랑하기로 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지만, 내가 내 몸을 내어주고 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을 했지만, 그러나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나 그들로부터 내게 돌아오는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었는가? 이 사람들에게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었다고 하는 얘기죠.


그래서 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사람에게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6편 3절에서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적당히 해라. 세상 사람들과 이 세상의 사람들과 그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쏟지 말고, 너무 많은 정을 주지 말고, 상처 안 받을 정도로만 자기 자신을 보호해 가면서 적당히 사랑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이 말씀의 의미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되 내 온몸을 쏟아부을 정도로 사랑하되, 그들이 내게 반대급부로 나와 똑같은 사랑을 줄 거라고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보상이 누구에게서 오는가? 하나님에게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반대급부의 사랑, 내가 사랑을 준 만큼 그만큼 내가 돌려받겠다고 하는 그런 기대를 사람들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될 것인가? 사람들이 내게 다시 갚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그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그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믿음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의 말씀에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포메이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걸까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거야? 그냥 예언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아니에요.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들이 발생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을 때 나를 버리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믿음의 선택을 하라고 미리 대비하라고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거예요. 베드로가 그 순간에 예수님에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다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우울기 전에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특별히 이 말씀을 꼬집어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베드로야 네가 그렇게 장담해 봤자 그래봤자 너는 반드시 배신할 거야. 그러니까 할 수 없어. 그것을 그냥 인포메이션을 전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알고 대비하고 그런 순간이 발생했을 때 믿음의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될 거라고 하는 것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런 상황을 거슬러 올라서, 내 육체의 내 마음에 일반적인 그 심성을 거슬리고 정말 믿음의 선택을 하라고 경고해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큰 소리를 쳤지만 나는 결단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말에? 그 대제사장의 집안에서 일하고 있는 여종의 말 한마디에 무너져 버린 것이죠. 왜 실패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우리가 분석해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그렇게 말씀해 주셨는데요.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 순간에 그 위험한 순간에 기도하지 않은 것이죠.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시험을 이길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고,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나약한 존재이고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되는데 구하지 아니하고 잠만 잤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두 번째로 왜 실패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죠.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그 누구보다도 주님이 가장 소중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27절의 말씀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내 목숨보다도 주님이 더 소중해야 실패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데 베드로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겁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나의 주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씀하면서도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게 뭐예요?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해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게 더 소중해요. 우리가 믿음에서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내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있습니까?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없습니까? 내 마음 가운데 불만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에요?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내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껴진다고 한다면 그 불편한 게 정당한 게 아니에요. 그게 옳은 게 아니에요. 그게 위험한 신호예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내 마음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에 불편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지낼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게 내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도 똑같이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주님이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내 마음을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되고, 내 자아를 내려놓아야 되고, 주님 앞에서 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아니하면 우리도 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전쟁이 놓여져 있는 것이죠. 지금 우리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전투 가운데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전쟁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인데,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늘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죠. 베드로전서 5장 8절 9절 말씀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공격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항상 마음에 대비를 해야 되는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냥 귀로 흘려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이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흘려 넘겼다가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넘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했기 때문인 것이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의 말씀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마태복음 26장 3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이 순간에 우리가 가져야 될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나는 연약한 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한다고 한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도와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겸손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배신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제자들을 자격이 없다고 내어 버리지 않으셨다고 하는 이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큰 소리는 치지만 우리는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만한 능력이 우리들에게 없어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아무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은혜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고,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될 텐데요. 바로 이 성찬예식은 그렇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과 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예식을 기념하면서 다시 한번 겸손하게 엎드려 믿음을 회복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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