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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신 이 (창 45:1-8)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로 할 수가 있겠는데요. 다양한 대답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한 대표적인 것 3개만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무신론(無神論, atheism)의 관점입니다. 무신론의 관점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이 세상은 그냥 우연의 연속이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어쩌다 보니까 이런 일도 일어나고, 저런 일도 일어나고, 우연의 연속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고 보는 관점이 무신론의 관점인 것이죠.


정반대의 관점이 있습니다. 무슨 관점일까요? 유신론(有神論, theism)의 관점입니다. 유신론의 관점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운행하신다고 보는 관점이 유신론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것에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없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고 보는 관점이 유신론적인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무신론의 관점, 유신론의 관점 이 두 가지가 양대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또 하나의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신론(理神論, desim)의 관점입니다. 이신론의 관점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까지는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자연법칙을 만들어 놨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관여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두 손 놓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어떤 목적이나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냥 자연 현상에 따라서, 자연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 이신론의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신론의 관점은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느냐 하면, 마치 시계를 만드는 사람이 시계를 만들어 놓고 더 이상 그 시계를 조작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시계를 만들어 놓고 놔버렸어요. 그러면 그 시계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태엽이 감긴 거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건전지를 집어넣었다고 한다면, 건전지에 집어넣은 그 힘으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더 이상 시계를 만든 사람이 건드릴 필요도 없고, 만질 필요도 없고, 그냥 만들어진 그 그 메커니즘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이 알아서 돌아가는, 자연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 이신론의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가운데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유신론의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계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있고, 통치하고 계시고 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적인 관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성경적인 관점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유신론의 관점, 하나님께서 계시며, 지금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이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악한 일들입니다. 재난이나 어려움 고통의 문제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는 것이 맞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아주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게 될 때, 엄청난 자연재해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때, 어떤 끔찍한 사건들을 만나게 될 때, 그때마다 우리들은 질문하게 되는 것이죠.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일들이 우리 애들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그런 엄청난 그런 사건들을 경험하게 될 때, 정말 이러한 재난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런 끔찍한 일을 우리들에게 허용하고 계시단 말인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했다고 하다니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는 것이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게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안내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하게 만들고, “그런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가 정말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말을 할 때 굉장히 신중 신중하게 이야기하지 아니하면,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어떤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재난들을 만날 때마다, 분별력이 없이 함부로 말하는 크리스천들 때문에, 오히려 반발을 사게 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참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슬퍼하고 위로해 주고, 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해야 될까를 생각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드디어 요셉이 자신의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게 되었을 때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고 하는 것을 밝히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형들이 나를 팔았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서, 어떤 목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고백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얘기는 무슨 이야기일까요? 그러니까 형들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얘기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을 노예로 팔려가게 만드는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잘못된 일 때문에 요셉이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된 겁니다. 형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악한 마음을 가지고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그런 나쁜 마음을 먹었었던 것이고, 그런 형들의 나쁜 마음 때문에 요셉이 고통을 겪게 된 것이죠. 어려운 일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든 잘못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어야 될까요? 형들에게 있는 것이죠. 형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이죠. 그 요셉이 억울한 고통을 당한 그 모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형들에게 있지만, 그러나 이 요셉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형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도 사용하셔서, 선한 목적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 이 요셉의 고백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데요. 형들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도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기 신을 팔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아셨어요. 그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마태복음 26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으리로다?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제 배반을 당해서, 배신을 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어 있는데, 그 일이 어쩌다 보니까 재수가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에요! 이것이 누구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약에 예언해 놓으셨어요. 인자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거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이미 구약 성경에 이사야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당할 거라고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롯 유다는 영웅인가요? 잘못된 일을 한 건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는 잘못된 일을 한 것이죠. 악한 일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 가롯 유다의 책임이 없느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가롯 유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느냐 하면, 가롯 유다의 잘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영웅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고 잘못된 일을 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를 파는 그 사람은 화를 당할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훨씬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유신론적인 관점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의 주권과 이렇게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번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사람의 선택과 행동은 100% 자유로운 의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악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선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시켜서 억지로, 자신의 의사와 반하여 억지로 행동하는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이고, 우리 모든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내 책임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나의 스스로 선택한 의지에 따라서 모든 일들을 다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모순된 말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100%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고,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한다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우리가 선택하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는 그 모든 책임을 우리가 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모든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이 신비한 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 말을 우리가 들을 때 이것이 우리의 책임이 없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시험을 봤습니다.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합격시켜 주세요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합격이 안 됐어요. 하나님을 원망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자기가 잘못한 거예요. 더 노력해야 되는데 더 노력하지 않았고, 더 수고해야 되는데 더 수고하지 않았고, 그만큼 충분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던 것을 하지 못한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막 먹으면서, 살을 빼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살이 안 빠졌어요 누구 책임이에요? 내가 먹은 책임이에요. 우리 가정이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행복해지지 않아요. 정말 싸움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고 가정에 불화가 생겼어요. 왜 하나님 우리 가정이 이렇게 불허합니까? 왜 우리 가정은 이렇게 지옥과 같습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먼저 말을 예쁘게 하고 정말 따뜻한 말 한마디 더 해주고, 서로서로 감싸주고 하면서 따뜻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데, 그 모든 것을 나의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악한 일을 벌이십니까?”라면서 하나님에게 모든 책임을 넘겨버리는 것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는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기는 하지만 이 말을 우리가 오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셉은 오늘 아주 정말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을 팔아버렸던 형들을 만나서, 내가 이렇게 오게 된 것은 형들이 나를 팔아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은혜로운 고백이고 우리 모두가 가져야 될 믿음의 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누가 하면 안 되죠? 형들이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형들이 요셉 앞에 가서, “얘야, 우리가 너를 팔아버렸지만,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이쪽으로 보낸 거니까, 우리 원망하지 마.” 그런 말을 하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말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데 용서는 누가 말해야 되는 것일까요? 피해자가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내가 정말 상처 입을, 그런 말을 듣기도 하고, 그래서 엄청난 피해를 당한 그 피해자가, 가해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도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내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나도 용서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피해자가 해야 될 말이에요. 그런데 가해자가 다가가서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해야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잘못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한다고 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 성도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 신중하게, 내가 어떤 상황인가? 내가 이런 고백을 해야 될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회개해야 될 상황인가를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진실하게 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창세기 45장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형들을 만나면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 45장 4절 말씀에 이렇게 요셉은 고백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사실은 뭐예요? 사실은 형들이 나를 미워해서, 형들이 나를 시기하고 질투해서 나를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죠. 그런 피해를 내가 당했어요. 하지만 요셉은 그 피해를 당한 상황 가운데서, 나를 힘들게 했던 형들의 미움, 형들의 시기, 질투, 그래서 내가 원수를 갚아버려야 되겠다고 하는 그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형들이 그런 걸 통해서 나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선하게 바꾸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본 거예요.

하나님이 그러한 악을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막으실 수도 있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형들의 나쁜 것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형들의 나쁜 것을 통해서라도, 나를 이곳으로 보내셔서 나를 애굽의 총리로 삼으시고,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 가운데, 그 영적인 차원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셨다고 하는 그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창세기 45장 8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 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오.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나쁜 짓을 했지만, 나를 죽이기 위해서 나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이 일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그 계획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선한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악한 것마저도 변화시켜서, 나로 하여금 이 놀라운 일을 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 때문에,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했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오늘 또 우리가 이런 일들을 만날 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을 보면서 원수 갚겠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그 선하신 계획과 목적들을 바라보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고백을 했던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죠. 다윗은 어느 날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왕좌에서 쫓겨나서, 멀리 도망을 가야만 하는 그런 엄청난 괴로움을 당할 때였습니다. 그 피난길에서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주하기 시작했어요.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한다고 말을 하면서, 돌을 던지면서 피난 가는 그 다윗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이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바라본 이 다윗 왕의 부하들이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 나쁜 그 시므이를 그만두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가서 죽여버리겠다고 다윗에게 이야기했을 때, 다윗은 놀랍게도 어떤 고백을 했을까요? 사무엘하 16장 10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내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낳은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다윗은 그 순간에 시므이가 자신을 향해서 욕하고 저주하고 돌을 던지는 것을 보면서, 시므이를 본 것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봤어요? 하나님을 바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욕하고 비난하게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저 시므이를 사용하셔서 나를 저주하라고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내가 잘못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는구나. 내가 밧세바와의 그런 잘못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는데, 그 범죄 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를 비난하는 그걸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죄를 드러내게 해 주시고, 나를 비난하시는 그것이, 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면서, 오히려 다윗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회개의 기회로 삼았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때, 그 일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일 뒤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서는 왜 허용하셨을까? 힘든 일을 만나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을 만드셨을까? 그 옛날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감옥 속으로 집어넣어서, 결국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총리로 만드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만들어 나가길 원하시고,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우리가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제 복음을 들고 가서 전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라고 파송하시면서 파송하셨을 때 하셨던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10장 28절 2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복음을 증거 하러 가다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두려워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날 리가 없다는 거예요. 참새 두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우연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떨어진다고 한다면, 우리 앞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고, 설사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할지라도 무서워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우리를 죽일 수는 있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고, 우리의 목숨을 빼앗아버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로 우리에게 엄청난 일을 주실지,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로 더 위대한 일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해 주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요. 때로는 죽음을 만날 수도 있고, 때로는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수 있고, 정말 끔찍한 일들을 만나게 되면서 하나님 도대체 이것으로 어떤 선한 일을 이룰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도대체 이것으로 어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걸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엄청난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나가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나를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선하게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주관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지난 주간에 우리는 아주 참 끔찍한 사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들어서 왜 이렇게 사건과 사고가 많은지, 이번에는 또 뭐가 생겼죠? 비행기에서 폭탄을 투하했는데, 그게 민가에 떨어진 거예요. 민가에 떨어졌는데, 생각만 해도 너무나도 끔찍해요. 왜 그렇죠? 이 폭탄이 북한에 떨어졌으면 어떻게 했을 뻔했어요? 전쟁이 일어났을 것 같아요. 국방부의 설명을 보니까 좌표를 잘못 입력해서 실수로 떨어졌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어요. 좌표를 잘못 입력하는 게 없어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좌표가 잘못 입력된 것 같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들이 다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들이 정말 이 세상에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들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서 정말 좌표가 잘못되어서 노예로 끌려간 것 같고, 좌표가 잘못되어서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늘 또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주여,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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