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로보암 왕이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두 나라가 나뉘어졌을 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 왕은 자기 국민들이 남쪽 유다로 가서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그들의 마음이 유다에게로 향할까 봐 걱정되는 나머지 정말 안타까운 결정을 내리게 된 거죠. 바로 벧엘과 단이라고 하는 곳에 제단을 쌓아놓고 거기에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섬기게 했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한 명 보냈습니다. 그 선지자가 어디 사람이냐 하면 남쪽 유다 지방의 선지자인 것이죠. 그 유다의 선지자를 북쪽 이스라엘 이 여로보암 왕에게 보내어서 벧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 선지자가 와서 전한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심판의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축복을 기대하면서 이곳에 우상의 제단을 만들었고, 이 우상의 제단에서 너희가 축복을 바라며 제단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게 될 텐데, 사실은 이 제단이 저주거리가 될 것이다. 저주의 제단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내용을 이 선지자가 전달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다가 망하지 않도록, 정말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잘못된 길로 가서 멸망하는 것을 걱정하셔서 이 선지자를 보내어서 경고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우상을 섬기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우상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전달해 준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2절 말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그렇게 예언을 한 겁니다. 이 제단에서 섬기는 그 제사장들을 그 제단 위에서 불사르게 될 것이고, 그 제단 위에서 사람의 뼈가 불살라질 거라고 하는 그런 끔찍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 것이죠.
만약 이러한 경고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경고를 하셨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 좀 하시죠.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해야죠.
“우리가 잘못했구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구나.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되겠다” 회개하며 돌이킨다고 한다면 살 것이지만,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귀를 닫아버리고 악한 일을 한다면 망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선지자의 메시지를 들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바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회개의 결단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로보암의 반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의 반응이 열왕기상 13장 3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함에.” 그다음 4절,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여로보암 왕은 어떻게 했는가? 그 경고의 말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메신저를 죽여버려라, 메신저를 잡아버리라고 하면서 손을 내밀어서 분노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여로보암의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이죠. 닭의 모가지를 비튼다고 해서 아침이 안 옵니까? 신문을 없앤다고 악한 일이 없어집니까? 재앙을 경고하는 그 경고자를 죽인다고 해서 재앙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운전을 하고 다니고 있는데, 운전하는 그 차량 계기판에서 경고등이 반짝반짝 켜집니다.
‘오일을 갈아야 되는데 안 갈았으니까 빨리 가세요’ 하면서 오일 경고등이 반짝반짝 핍니다. 그러면 그 오일 경고등을 꺼버리면 되는 거죠? 아니에요? 오일을 갈아야 되는 거예요. 그때는. 지금 여로보암이 한 일이 무엇인가? 듣기 싫으니까 없애버려라, 말하는 사람을 입을 닫아버려라, 언론을 재갈 물려버려라 하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결과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5절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징조대로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제단에서 쏟아진지라.” 이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의 예언이 헛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제단, 그 예언의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제단이 갈라지고 다 쏟아지는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이 예언이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줬으니,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됩니까?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 비틀어져서 손을 쓸 수가 없게 되고 제단이 갈라졌어요. 이런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해야죠. 지금이라도 회개해야 되는 거. 그런데 여로보암의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열왕기상 13장 6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 여로보암 왕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일까요? 회개한 것이 아닐까요? 회개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여로보암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지금 내 손이 굳어져서 거둬들일 수 없는, 손을 못 쓰게 된 이 상황 가운데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거,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 **’내 손 좀 어떻게 좀 해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손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큰 문제인데, 그 심판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죠.
저는 이 여로보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여로보암이 꼭 누구를 닮았는가? 사울 왕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모습이 어쩌면 이런 여로보암의 모습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성급한 제사를 드리고 사무엘이 나타나서 그 사울 왕을 향해서 책망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그때 사무엘 선지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사무엘상 15장 30절 말씀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라고 간청하는 거예요. 사무엘의 책망을 들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간청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무엘 선지자님, 저하고 같이 가셔서 선지자가 나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을 백성들이 좀 보게 해 주세요. 그래서 내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인정 하에서 내가 왕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백성들이 보고 백성들이 여전히 나를 왕으로 받아 모실 수 있도록, 그 지위를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청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죠. 사울 왕의 관심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갈 수 있는가’**가 관심이 아니라, ‘내 왕좌가 흔들리고 내가 왕위에서 떨어져 나가고 백성들이 나를 배반할까?’ 그 왕좌에 대한 집착이 사울 왕의 마음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죠.
그런데 지금 여로보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죄악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여로보암의 관심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어떻게 하면 돌아갈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를 신경 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내 손 망가진 거 이것 고쳐달라, 그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거죠. 이게 엄청난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윗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다윗 왕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를 통해서 범죄하게 되었을 때, 선지자가 와서 이 다윗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죠. “내가 왜 이런 죄를 저질렀는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을 때, 이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이 울부짖었던 내용이 시편 51편 가운데 있는데, 10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 왕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내가 이런 범죄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탄핵해서 나를 폐위시키고, 그래서 이제 나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계속 이 권좌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윗 왕의 마음은 어디에 관계가 있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두려운 거예요. 자기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너무나도 사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아무 소리 못 하고 심판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거예요.
그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총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마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다윗 왕의 마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내가 왕좌를 차지하느냐 차지하지 못하고 쫓겨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과연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백성들이 나를 계속 왕으로 받아줄까?’ 이것이 제일 큰 관심사였고, 오늘 여로보암의 반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나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할 때에 그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당장 내 손이 망가진 것, 이것만 좀 어떻게 고쳐주시라, 이것만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고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차이가 이런 차이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 차이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누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있는가가 큰 차이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마음속에 왕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소중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해요.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바라고 있는 마음이 다윗의 마음이었다고 한다면, 여로보암의 마음, 사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내가 왕이 되는 것, 내가 권력을 누리는 것,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이것이 우상이 되어서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우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연연하고 거기에 매어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 가운데 정말 주인이 누구인가, 우리의 섬길 대상이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로보암이 그렇게 부탁을 하자 선지자가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낫게 해 주었는데요. 저 같으면 안 들어줄 것 같아요. 왜 저 같으면 혼냈을 것 같아요.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손 낫기만 바라느냐? 너 같은 거 안 들어줘”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선지자는 그 사람의 팔을 고쳐주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고쳐주어서 그렇게 그의 손을 풀어주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이 사람이 참된 회개가 아니고 그저 자신의 현 위기만을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인 것 같은데, 왜 선지자는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팔을 풀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그게 부모님의 마음인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 주시는 것 같아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완벽해야만, 완전하게 하나도 흠이 없고 우리가 완전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그게 안 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부족하고 많이 부족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들인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죠.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완벽해서, 우리가 이제는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을 완벽히 갖추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여로보암 왕과 같고,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회복시키길 원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길 원하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도 여로보암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음속에 우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여로보암처럼 행동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옛날 여로보암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선지자를 보내주셔서 심판하시고 경고하시는 일을 하실까요? 하지 않으실까요? 헷갈리십니까?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선지자가 직접 찾아왔던 방식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선지자와 같은 메시지를 들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그 음성을 우리가 듣고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 옛날 여로보암을 향해서 선지자를 보내주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시기를 원하셔요.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럴 때 우리가 그 음성을 외면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이고 회개하며 나가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실까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달해 주시는데, 첫 번째로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매일매일 읽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성경을 읽어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 또 들려주시는, 선지자를 보내주시는 것은 축복인데, 그 축복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메시지를 들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또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세요? 때로는 예배 시간을 통해서, 설교 메시지를 통해서, 또는 우리가 책을 읽는 가운데, 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때로는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 자녀들의 입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 배우자의 입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을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열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해서 말씀해 주셔요? 사건과 사고, 고통을 통해서도 말씀해 주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만날 때, 여러 가지 고통들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실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인데,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도처에 있는 것인데, 그 도처에 널려진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잘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회개하며 순종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문필가 C. S. 루이스라고 하는 사람이 **『고통의 문제』**라고 하는 책에서 무슨 말을 했냐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쾌락 속에서 우리들에게 속삭이고 계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소리 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메시지의 방식이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우리가 쾌락을 즐기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즐기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우리에게 속삭이고 계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되는 것이고, 때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그 양심에서 나오는 그 메시지를 우리가 들어야 되는 것이고, 근데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는 곳은 언제인가? 고통 속에서는 하나님이 소리치고 있다라고 C. S. 루이스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 옛날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별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마치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처럼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실 때 외면해 버리고 귀 닫아버릴 게 아니고, 여로보암이나 사울처럼 **’지금 당장 문제만을 해결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우리의 반응은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소망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단절된 우리를 내팽개치지 아니하시고, 그 옛날 여로보암에게 선지자를 보내셨던 것처럼, 이제는 직접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은혜의 메시지를 전해 주실 때, 그 메시지가 때로는 우리에게 쓰디쓴 약처럼 느껴질 것이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복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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