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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요셉의 성탄 (마 1:18-25)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을 앞에 두고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함께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이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 있었던 그 말씀인데요. 그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700년 전에 있었던 그 예언이 예수님 때에 이르러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마태복음 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 어떤 의미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그런 의미”**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시다고요? 하나님이시다는 것!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 어떤 의미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인 거죠. 놀랍게도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고 나약한 한 아기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그 모습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이렇게 어떤 한 사람이, 한 아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야” 그러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못 믿는 것이죠.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러한 사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기 가장 힘든 민족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느 민족이 제일 믿는 것이 어려웠을까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동양에서는 범신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티베트에 가면 어떤 한 아이를 놓고서 환생한 부처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동네에 가면 이 사람은 신이 태어난 거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는 경우가 동양에서는 종종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유대 민족에게는 그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유대 민족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일까요?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결코 네게 두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 한 분만이 참 하나님이고, 그 외에는 하나님일 수 없다라고 하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민족이 바로 유대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 민족들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다”**라고 했을 때 유대 민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바울 사도는 회심하기 전에 신자들을 박해하고 다닌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교회를 박해한 것인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초대교회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고백했을까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증거를 그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구나, 예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고,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성탄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로 오신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나요? 우리의 노력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수련을 하고, 도를 닦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고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수련을 하면, 그러면 우리가 언젠가는 저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종교가 있는데요. 하나는 성경적인 기독교가 있습니다. 이 성경적인 기독교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는데, 그 외에 다른 모든 종교들, 불교든, 이슬람교든, 힌두교든, 아니면 미신이든, 그 모든 종교는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열심히 도를 닦으면 언젠가는 완벽의 경지에 올라갈 것이고, 여러분들이 열심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그 부처의 위치에, 해탈의 위치에, 최상의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하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까지 세상 모든 종교가 믿고 있던 그런 노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그럴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고 열심을 내면 우리가 언젠가는 완벽의 경지에까지,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해탈의 경지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력하면 발전하나요? 발전이 안 되나요? 발전해요. 그러니까 노력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보면 언젠가는 최상의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하는 그 가르침이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목표냐 하면 전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달나라에 가고 싶은데, 달나라에 가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열심히 높이뛰기를 하면 되죠. 높이뛰기를 열심히 연습해 가지고 평생 노력을 하면 높이뛰기를 더 높이 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높이뛰기를 더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달나라까지 높이뛰기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거예요. 이게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인 것이죠. 우리가 수련을 하면 노력을 하면 조금 좋아지기는 해요. 조금 수련하지 않은 사람보다 좀 더 나아질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련하는 게 좋냐면 좋아요. 더 나아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수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저 달나라에까지 올라갈 수 없듯이, 아무리 높이뛰기를 해도 달나라에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완벽의 경지, 하나님의 경지에까지 올라갈 방법이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바다에 배가 한 척 빠지게 되었을 때, 영국에서 출발한 타이타닉호가 뉴욕을 향해서 가다가 대서양 한가운데서 그 배가 좌초되어서 바다 한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서양 한가운데 빠진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까? 수영을 열심히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거예요.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한들, 금메달리스트라고 한들 그 대서양 한가운데서 차가운 바닷속에서 견뎌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친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까지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을 이끌고 주님 앞으로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예수님 한 분만이 우리가 주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주장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이 하지 않은 주장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어떤 주장을 했냐면 **”여러분 이렇게 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면 당신도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보면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해서야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 나를 통해서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나를 통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하는 아주 독선적인 것처럼 들리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죠. **”왜냐하면 내가 길이고, 내가 바로 그 길이고, 내가 바로 그 진리고, 내가 바로 그 생명이기 때문에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제자들도 복음을 전할 때 어떻게 전했냐면 이렇게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 1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써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제자들은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면서 **”우리가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 크리스천이 아닌 외부의 사람들은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불신자들하고 대화를 해보셨습니까? 대화를 하다 보면 불신자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따지곤 하는 거죠. 뭐라고 따집니까? “크리스천들은 왜 이렇게 독선적이냐? 왜 너희만 맞다고 하냐? 크리스천들은 왜 배타적이냐? 왜 너희들만 옳다고 하느냐? 다른 종교 가 봐라.”

“다른 종교에서는 참 마음이 넓지 않느냐. 우리가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어떤 미신을 믿든, 어떤 종교를 믿든 결국에는 다 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늘에서 다 같이 만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어떤 길로 가도 다 하나님께로 가는 그 길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서로 서로 비난하지 말고, “너도 옳고 나도 옳고” 그러면서 서로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너희 기독교는 그렇게 독선적이고 왜 너희 기독교인이 이렇게 배타적이냐?”**라고 하는 이야기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들어봤을 겁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어떤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환자가 아주 심각한 병에 걸려서 죽을 그런 상황 가운데 이르렀는데, 그 환자가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한테 갔더니 “이렇게 해봐라”, 저 사람에게 갔더니 “이렇게 해봐라”, 이 사람한테 갔더니 “이렇게 해봐라”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병원을 다니니까 이 의사는 “이렇게 해봐라”, 저 병원에서는 “이렇게 해봐라” 수많은 이야기들을 그 환자가 듣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의사를 만났는데 그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당신이 들었던 이야기는 모두 다 엉터리입니다. 다른 의사가 이야기했던 거 다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 말대로 하면 당신 죽습니다. 내 말대로만 하세요. 내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해야 당신이 삽니다. 내가 처방해 주는 이 약을 먹어야 되고, 그리고 이런 방법에 따라 생활해야만 당신이 살지 안 그러면 당신 죽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의사를 향해서 우리가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독선적이에요? 당선은 왜 그렇게 배타적이에요? 왜 다른 사람이 다 틀렸고 당신만 옳다고 해요?”**라고 비난하는 게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까? 만일 그런 의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습니까? 당신의 말이 옳든지 당신의 말이 틀리든지 둘 중에 하나겠군요. 배타적으로 말하는 당신의 말이 옳든지 옳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겠군요. 정말 그런지 한번 봅시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배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독단적이고 배타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그런 꽉 막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지만, 그러나 정말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되는 것이지, 배타적인 표현처럼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 어떤 노력으로서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 것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성탄절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성탄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구나,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은 무엇인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강도 만난 한 사람이 있었을 때, 그 강도 만난 사람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죽고 말 겁니다. 그런데 그 옆에 제사장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 옆으로 레위인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서로 원수 지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자에게 찾아와서 상처를 싸매어주고, 그리고 그 사람을 치유해 주고, 그 사람이 온전히 낫게 만들기 위해서 여관에 데려다 주기까지 한 것이죠. 성탄절이 무엇입니까? 마치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곁으로 오신 거예요. 외면하지 않고 “아, 안 됐구나. 저 멀리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쯧쯧, 안 됐네. 어쩌다 저렇게 됐나'” 하면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직접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오늘 바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이 일이 사실은 충격적인 모습으로 1세기 마리아와 요셉에게 다가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 이 두 사람에게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이 소식은 마리아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일까요? 좀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소식일까요? 당황스러운 소식이었을 겁니다. 요셉에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아마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 당시에 처녀에게 배가 불러서 아기를 낳게 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었고,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 있는 스캔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셉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마태복음 1장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소문 내도 창피하고 그냥 어떻게 해도 창피하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래서 요셉의 마음 가운데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은밀하게 그냥 관계를 정리해 버리고 이제 더 이상 마리아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했었던 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어요. 마리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것이죠. 너무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장 34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이게 나한테 웬말입니까? 이럴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충격 가운데 반응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놀라운 것은 마리아도 요셉도 주님의 사자가 들려주는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는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그냥 어떤 스캔들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잉태된 것이고,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실 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그리고 내가 수치를 당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그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그냥 떠나버려요. 조금이라도 내게 해로울 것 같으면 믿음을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다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아니하면 그냥 떠나버리기도 하고, 사람들이 나를 조금만 힘들게 하면 그냥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또한 비난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는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고백하며 받아들였고, 그래서 이 놀라운 구원의 은총 가운데 참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쉬운 길인가? 기쁘기도 하고 행복한 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수가 있는 것이죠. 때로는 우리가 손해 볼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한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것들을 우상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이 나의 구주시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그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믿음으로 견뎌내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 성탄의 기간을 지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옛날 마리아와 요셉에게 찾아오셨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시는지, 슈퍼맨의 모습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정말 미약한 연약한 모습으로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는 어떠한 모습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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