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요셉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요셉은 정말 인생의 밑바닥까지 갔었죠. 어느 날 갑자기 노예로 팔려서,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었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는 것 같았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야 했었던 사람이 요셉이었던 것이죠. 자신의 인생 가운데 억울한 일들이 자꾸만 생기는 겁니다. 요셉이 무엇인가 잘못해서가 아니고, 물론 잘못을 따져본다고 한다면야, 잘못이 왜 없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이 어느 정도 있겠죠 하지만 귀책 사유가 자신에게 많이 있는 게 아니고,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다른 사람들의 모함과 그런 누명에 의해서, 이렇게 억울하게, 이런 노예의 삶으로, 혹은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정말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만 했었던 사람이 요셉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삶이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는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게 된 것이죠. 인생이 역전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애굽 왕과 그리고 그 바로의 신하들이, 이 요셉이 하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좋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바로 왕은 이 요셉을 “다른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라, 바로 네가 적임자다.” 이 큰 일을 대비해야 되고, 이 큰 일을 준비해야 되는 일에, 다른 사람을 쓸 이유가 없고 바로, 요셉이 이 일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정말 저 감옥 속에 있었던 죄수를 끌어올려서, 가장 낮은 곳에서 애굽의 총리로 삼아, 전 세계 강대국의 이 애굽 나라의 총리로 삼았다고 하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언제나 참 통쾌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가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요셉이 애굽 나라의 총리로 올라가게 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이 저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던 이 히브리 소년이 어떻게 저 애굽 나라 강대국의 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저 가나안 땅에서 가족 속에서 살고 있었던, 그 작은 “한 소년이 어떻게 해서 이 거대한 나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요셉이 그동안 겪었던 그 모든 고난과 아픔, 억울함,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 가난에 있던 요셉이 애굽으로 올 수가 있었어요?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에 애굽 땅까지 온 겁니다. 어떻게 그 요셉이 노예 생활을 하다가 그 애굽의 관리들을 만날 수 있게 됐어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 누명을 쓰지 않았다라고 한다면, 요셉은 그냥 보디발 집안에 유능한 노예로서 평생 살다가 죽었을 겁니다. 평생 노예의 삶을 살다가 마쳤을 그 요셉이 어떻게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 누명을 써서 감옥에 들어갔고, 감옥에서 애굽 왕 바로 왕의 그 관리들을 만나게 된 것이고, 거기서 꿈을 해석해 주고, 또 그 바로 왕의 신하들이 또한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감옥에 들어온 그 모든 일들이 다 맞아떨어지게 되어서, 결국에 요셉은 이런 높은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을 살펴보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던 이 요셉에게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요셉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인지에 대해서 보여주셨는데,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면서, 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오묘하고 놀랍다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요셉이 이 노예의 생활을 할 때 혹은 감옥 속에 들어갔을 때 요셉의 마음 가운데 “야, 난 앞으로 총리가 될 거야”라고 견뎠을까요? “나는 지금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총리가 되겠지.”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혔지만, 언젠가는 내가 총리가 될 거야”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었을까요? 아니요.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노예 생활하는 그것만이 보이는 것이고, 그 당시에는 억울하게 자기가 누명을 써서 감옥에 들어간 것만 보이고, 도무지 내 인생 가운데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이해를 할 수 없는 그런 삶의 모순 고통 아픔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바로 왕이 자기를 들어서서 애굽의 총리로 삼는 그 경험을 보면서, 아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그 모든 삶의 궤적들이 우연이 아니었구나. 형들이 나를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 그게 우연이 아니라, 내가 감옥 속에 들어간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나를 이렇게 총리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고 계셨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줄로 믿습니다.
마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예술가가 그 도자기를 만들어 놓고 불 속에 집어넣어서 단련을 시키고 온갖 제련을 한 다음에, 그래서 멋진 도자기가 나오는 것처럼, 금과 은을 잘 재련해서 그래서 좋은 보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 속에 집어넣고, 그래서 녹이고 제련하고 그 모든 고통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멋진 보석이 탄생하게 되는 것처럼, 요셉이라고 하는 보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용하시고,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요셉을 만들어 갔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살아가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그것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들이 그냥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그냥 우연 가운데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게 된다고 한다면 낙망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 원하고 바랐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좋지 못한 일들이 우리들 삶 가운데 일어날 때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렸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있어요.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것 같아요. 문제가 없어지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문제가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 합격했으면 좋겠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거기서 실패하는 그런 쓰디쓴 경험을 우리가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힘들고 괴롭고 그래서 낙망하기가 쉬운데, 우리 크리스천들이라고 한다고 하면,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낙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과연 어떠한 일들을 이루어 나가실까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낙망할 것이 아닌데요. 기도해도 소용없구나.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구나. 하나님은 왜 내 기도 안 들어주셔요? “기도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가 보다”라고 낭망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께서 별로 관심 가져주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앞으로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지 기억하면서, 기대하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시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저도 옛날에 대학 다닐 때였어요. 대학 다닐 때 학교에 대학을 가니까 좋더라고요. 학교 대학에 가니까 여학생도 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남녀 남학생들만 같이 공부를 했는데 대학에 가니까 자매들이 있어요. 그래 가지고 아 어떤 자매를 만나게 됐어요. 그래서 자매를 만나가지고 사귀게 됐는데 제가 마음이 많이 끌리더라고요. 왜 예뻤냐면은 별로 안 예뻤는데 여자를 안 보다가 여자를 보니까 마음이 끌렸어요. 그래서 막 좋아 가지고 아 이 자매랑 좀 잘 사귀어 볼까 하고 대시를 했는데, 저를 거절하고 말았어요. 멋이 하나도 없는 저를 그냥 발로 차버린 거죠. 그래가지고 제가 시묵룩해가지고 아 참 막망스러워 가지고 가만히 있는데, 어느 날 교수님께서 저를 보시면서, 야 너 국진아, 너 왜 얼굴이 이렇게 시무룩하냐? 너 무슨 어떻게 된 거냐? 하고 물었어요. 그래서 교수님 사실은 어쩌고저쩌고 해서 헤어졌어요. 그랬더니 우리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 됐다” 그러는 거예요.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 됐다.” “축하한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서 얼마나 좋은 여자를 준비해 줬는지 니가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됐나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교수님이 하는 말이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어디에 있는가? 나중에 보니까 이해가 되어서, 그다음부터는 제가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 젊은이들 가운데 이렇게 상담도 해주고 하는데, 우리 이제 교회 이제 청년들 막 사귀다가 헤어지기도 하고 막 그래서 저하고 상담하는 경우가 생겼는데요.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와서 제게 막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막 눈물 쭉쭉 흘리면서 목사님 막 눈물 흘리고 그러길래 제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잘 됐다. 축하한다. 위로가 하나도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이 지금에는 너무나도 커 보이고, 마치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것과 같이,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고, 그리고 정말 열심히 충성을 다했지만, 오히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더 절망적인 상황에 들어갈 때, 앞이 깜깜해 보이는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요셉을 단련시켜서 총리로 만드시고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모든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늘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바라보고 낙망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망을 주님께 두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누구에게 그런 소망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망이 있는 겁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사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인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우리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인데, 좋은 일들, 잘 나가는 일들, 우리의 생각에 정말 좋은 일들만 그것들만 좋은 결과를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만나는 그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악도 선을 만드시고 슬픔도 기쁨으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을 통해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낙망하지 말라고 교훈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낙망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낙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낙망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과부처럼 끈질기게 끈질기게 그렇게 울부짖으면 그러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에 낙망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종종 그렇게 오해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낙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왜 낙망하지 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재판관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불의한 재판관은 누굽니까? 불의한 재판관은 이 과부를 들떠보지도 아니하고 이 과부의 간청을 외면해버리고 들어주려고 생각도 아니하고 겨우 귀찮아서 겨우 응답해 주는 그런 불의한 재판관이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에요?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볼 때 낙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든, 응답해 주시지 않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것이니까, 그 어떠한 상황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뢰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만일 기도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실까요? 주시지 않으실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 and no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죠?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와서 아빠 이거 해줘 엄마 이거 해줘 하면 아빠 엄마가 싫어 안 해줘 그럴 부모가 있나요? 아니요. 다 해주고 싶어요. 다 해주고 싶어 자녀들이기 때문에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다 해주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가 고플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뭘 준비하고 있어요? 간식 준비하고 있어요. 떡볶이를 좋아하면 떡볶이 만들고 오뎅도 만들고 피자도 만들 주문해 주기도 하고 치킨도 주문해 주기도 하고, 우리 아이들이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서 정말 좋은 것을 다 해주고 싶은 거에요. 그게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우리 자녀들이 아빠를 향해서 아빠 오늘 회사 갔다 돌아올 때 올 때 꼭 아이스크림 사 와. 그러면 아빠의 마음 가운데 밖에 있으면서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 거에요. 내가 집에 돌아갈 때 아이스크림을 꼭 사 갖고 가야지. 이 아이가 이 아이스크림을 받고 좋아할 걸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거 하나 생각하고 집에 돌아갈 때 꼭 바빠도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돌아와서 아이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게 그게 부모의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불의한 재판가처럼 안 들어주려고 하고 귀찮아서 귀 막아버리고 들어줘도 겨우 귀찮아서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한 대로 그대로 들어주시냐 하면, 또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아닙니까?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장사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장사꾼은 우리가 무엇을 돈 주고 사면 우리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할지, 악한 일을 할지 따져보고 물건을 팝니까? 그냥 줍니까? 그냥 줘요. 칼을 사면 이 칼로 맛있는 요리를 할지 아니면 이 칼을 들고 가서 강도짓을 할지, 공룡 장난감을 사면 이 공룡 장난감으로 애들하고 같이 놀려고 이걸 살지, 아니면 공룡 장난감 가지고 강도짓을 하려고 그걸 살지 그걸 따지지 않고 그냥 팔아버리는 것이 장사꾼의 목적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부모님과 같은 하나님이셔서 우리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는가를 따지시는 거죠.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이 아이에게 단 것을 주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는가를 따져서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인데 응답을 해주시든 응답을 해 주시지 않든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 번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게 있는 병을 고쳐주옵소서 바울 사도에게는 아주 심각한 그런 고질병이 있었다고 했는데요. 그 고질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학자들마다 아마도 안질리 안질병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추측하는 학자도 있고, 어떤 사람은 통풍에 걸렸나 보다 생각하는 학자도 있고 어떤 학자는 우울증 증세가 있었나 여러 가지 뭐든지 갖다 대면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 것은 없으니까. 근데 아무튼 그런 여러 가지 질병들 무슨 질병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심각한 질병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고쳐주지 않았어요. 그 이야기를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부터 10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권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 사도가 정말 엄청난 것을 경험한 거잖아요? 하나님을 만난 것이고 계시를 받은 것이고, 또 바울 사도가 사람들을 고치기도 하고 엄청난 기적들을 행했는데 정작 자신의 몸이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너무 교만하지 아니하도록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고쳐주지 아니하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낙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요셉처럼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좀 결과를 알면 좀 견디기가 쉽잖아요. 내가 노예로 팔려가도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총리가 될 거야. 알면 견딜 힘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내가 감옥에 가기는 가지만 조금만 있으면 내가 총리가 될 거야.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어떤 사장님이 회장님이 자기 자녀를 말단 직원으로 집어넣어도 기쁘게 일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왜 우리 아버지가 우리 부모님이 나를 훈련시켜서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는구나.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잘 모르는 거예요. 지금 내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만이 보이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지 어떠한 방향으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낙망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인내하고 감사하며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55장 8절 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 생각은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병이 금방 나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요? 합격도 하고 승진도 하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생각은 어땠으면 좋겠어요? 복권이라도 당첨돼가지고 돈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들을 다 잘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고, 그러면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릴 것 같고,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인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과 다르다. 얼마나 다른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인내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까요? 요셉의 경우는 총리가 됐을 때 깨달았어요.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올 수 있을까요? 인생 역전이 생길 때가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요셉과 같이 그렇게 완벽하게 인생의 역전이 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신뢰하며 나가야 되는 것이고 우리가 언제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요즘 거울이 아니고 옛날 거울입니다. 요즘 거울은 돋보기 거울이 있어가지고 불도 켜지고 해가지고 얼굴에 있는 잡티까지 그냥 생생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거울은 청동기로 만들고 막 그래가지고 희미하게 자신의 모습만 어렴풋하게 보이는 거울처럼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잘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실패 가운데 있을 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훈련시키고 단련시키셔서 이렇게 사용하시려고 하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의 지금 상황이 요셉과 같이 노예 시절의 요셉, 감옥 시절의 요셉과 같은 상황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들의 눈에는 그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의 은총을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담대하게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