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개역 성경의 번역이 약간 애매합니다. 그래서 좀 더 선명한 좀 더 분명한 번역을 살펴보았는데요. 쉬운 성경의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고백하기를,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 상황이 낙심할 만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한 상황인데, 그 상황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겠죠. 아무런 문제가 없고, 정말 모든 일들이 잘 술술 풀려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 바울 사도가 처한 이 상황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아주 실망스러운 겁니다. 당혹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정말 낙심될 만한 그런 일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낙심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고린도 전후서를 살펴보면서,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라고 하는 지역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했었고, 그리고 이제는 그 교회를 떠나서 다른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 잠시 떠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떠난 이후에, 들려오는 소문은, 바울 사도가 이런 편 저런 편을 통해서 듣게 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정말 실망스러운 내용들 뿐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룩해야 될 교회가 더러운 죄의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린도 교회 내에서는 바울 사도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를 비난하는 것이죠. 바울 사도를 욕하는데, 바울 사도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가짜다. 사도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바울은 가짜 사도라고, 그렇게 비방하는 일들이 고린도 교회 내에서 있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가르쳤는데, 나중에 떠난 뒤에 들려오는 소식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버려서 율법주의로 회귀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들리게 된 것이죠. 한마디로 헛수고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 나중에 들리는 소문이 무엇이냐면, 지금까지 내가 흘렸던 모든 수고와 헌신들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소식들만 듣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어쩌면 배신감이 들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실망감에 정말 분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절망하는 마음들이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표현하는 말이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 사도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을 할 수가 있을까요?
우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여기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어떤 것을 가리킬까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낙심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낙심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낙심하지 말라고 하는 게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성경에서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말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슬픈 마음이 들거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울한 마음이 들거나, 절망적인 그런 느낌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그 주님의 말씀에 따를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자동 반사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감정들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슬픈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화나는 일을 보게 되면, 분노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무서운 일을 보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죠. 정말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정말 절망적인 상황들이 펼쳐질 때, 또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비아냥거리고 욕하기 시작할 때, 또한 어떤 정말 난감한 상황이 닥치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바울 사도가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그런 슬픈 감정, 낙심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어떤 분이 질문을 던지는데요. “우리 크리스천들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시는 분들이 계셔요.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라고 해서 우울증에 안 걸리는 게 아닙니다. 마치 우울증에 걸리게 되면, 우리가 우울증 증세가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우울증에 걸리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그런 정말 제대로 된 신앙인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갖기가 쉬운데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도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굉장히 많아요. 이런 우울증에 걸리고, 우울한 마음이 들고,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슬픈 마음이 들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고, 의심이 솟아오르기도 하고, 걱정이 생기기도 하고, 분노의 마음이나, 좌절의 마음 이런 감정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상황들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밥을 먹고 난 다음에 한참 시간이 지나게 되면 허기를 느낍니다. 배고픔을 느끼게 되어 있죠. 지금은 배고프신가요? 안 고프신가요? 아침을 드시고 오셨으면 배가 안 고프실 겁니다. 점심 때 돼야 배고프실 텐데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배가 이 속에 먹을 것이 사라져 버려서, 이제는 음식을 먹은 지 꽤 오랜 시간이 되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배고픔이 생기게 되는데요. 배고픔이 잘못인가요? 허기를 느끼는 게 죄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우리가 먹은 것이 없으면, 내 위장 속에 음식물이 들어가 있지 아니하면, 허기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우리들의 감정 가운데, 무서운 일을 경험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슬픈 일을 당하게 되면, 슬픈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절망적인 상황이 생기면, 그래서 힘이 빠지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 그게 정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것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크리스천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현상들이 생겼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입니다. 배가 고팠을 때에는 우리가 음식을 적당하게 먹으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배고프다고 하는 이유로 짜증을 내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화풀이를 하기 시작한다고 한다면, 그 배고픔을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난감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슬픈 마음과 또한 좌절, 우울감 같은 것을 겪을 수가 있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죠, 그 감정 자체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성경에서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그런 감정 자체가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게 크리스천의 목표는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죠. 그래서 그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기쁨의 감정도, 슬픔의 감정도 없이 그냥 감정에서 벗어난 것을 지향하는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어떤 모습을 보이셨는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우셨어요. 나사로를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셨고, 사악한 사람들을 보면서는 분노하시기도 하셨고, 십자가 앞에서는 두려워하면서, 이 십자가를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까지 하셨던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나는,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그 표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낙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의지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절망스러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는 불안할 수 있고 힘이 빠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상황 가운데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포기해 버리는, 자신이 그렇게 수고하고 헌신한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욕하고 비난하고, 자신이 해주었던 그 가르침에서부터 멀리 떠나버린, 그렇게 배신감을 당한, 배신감이 들 만한 일들을 행한, 그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가장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손 털어버리는 겁니다. 다시는 너희들하고 상관하지 않겠다. 다시는 너희들하고는 관계하지 않겠다.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이제는 정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정 주지 않으리라, 다시는 너희들과 관계하지 않으리라. 그런 사람들하고는 내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완전히 그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선택을 했던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엘리야 선지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 속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고, 그걸 통해서 바울 선지자들을 무찌르는 엄청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영적인 승리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 여왕 왕비가 자신을 계속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 모습 앞에서, 내가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 강력한 대적들을 보면서, 엘리아의 마음 가운데, 우울감이 들어오게 되었고, 절망감이 생기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말하는 거죠. “하나님, 이제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 목숨을 거두어 가 주세요. 하나님, 이제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제 목숨을 끊어주세요”라고 하면서 완전히 포기해 버리는 모습으로 나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얘기는 낙심하는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 이야기는 그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린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결단인 것이죠. 바울 사도는 이 상황을 보면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했을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왜 이런 헛수고를 했을까? 이제는 다 때려치워야 되겠다. 이제는 그만두어야 되겠다고 하는 결단을 하지 않은 것이죠.
바울 사도의 마음에 그런 마음이 왜 안 생기겠어요? 그런 마음이 한편 구석에서는 생겼을 겁니다. 저런 사람들하고는 내가 상종을 하지 않고, 정말 나를 환영해 주는 곳으로, 박수 쳐주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억누르고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바울 사도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이런 상황에 맞이하게 되었을 때, 우리도 낙심하지 말 것을 성경에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점에서 낙심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늘 낙심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누가복음 18장 1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비유를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죠. 왜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불의한 재판관은 귀찮고 잘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고, 외면하는, 정말 차가운 그런 사람이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지금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외면했기 때문에, 불의한 재판관처럼 귀 기울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정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훈련시키고 단련시키시고, 마침내 복 주시고, 마침내 은혜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도하다가 낙심할 것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요, 사탄이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수고가 결국에는 물거품이 돼버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리가 수고하고 헌신했던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이 다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을 행하는 그 일들이, 하나도 허투루 망가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흘린 땀과 눈물 방울이 그냥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포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오늘 고린도후서 4장 1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바울 사도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쉬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밝힌 낙심하지 않는 이유,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셔서,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직분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원래 바울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원래 바울 사도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을 대적하던 하나님의 원수였어요. 그래서 이 바울 사도의 행한 것에 따른 정당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마땅한 것이죠.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영원한 형벌을 내주어도, 아무런 항변할 수 없는, 그런 너무나도 완악한 이 죄인에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변화시켜 주셔서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왜 포기할 수 없는가? 이 직분은 내가 국민투표해 가지고 당당하게 당선되어서, 내가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그런 사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이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 어떠한 고난과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나는 낙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래 뵈어도 내가 누군데,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해? 나 같은 사람을 알아주지 못해?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절망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낙심할 게 아니라, 포기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19세기 유명한 부흥사였죠. 디엘 무디(D. L. Moody)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해서 활동을 하신 분인데, 우리 아이가 시카고에서 살 때 가보니까, 디엘 무디 기념 교회도 있던데요. 그 디엘 무디라고 하는 이 부흥사가 정말 전국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엄청난 부흥의 역사를 일구어낸,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 중에 한 사람이 D. L. 무디라고 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시카고 트리뷴>이라고 하는 그 신문에서 무디 목사님에 대해서 비난 기사가 실리게 됐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무디 목사님에 대해서 온갖 비난의 그 기사들이 잔뜩 실려가지고 신문 기사화된 겁니다. 그 신문 기사를 받아 든 목사님의 참모가 그 신문 기사를 들고 분노에 차 가지고 목사님에게 달려왔습니다. “목사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시카고 트리뷴이라고 하는 이 신문사에서 목사님에게 이렇게 엄청난 가짜 뉴스를, 그리고 엄청난 비난의 기사를 냈습니다.” 하면서, 막 와서 흥분하면서, “어서 빨리 우리가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신문은 이 신문사에다 항의도 하고, 그래서 “신문 기사를 바로잡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D. L. 무디 목사님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해요. 그만두라고. 사실 그 사람들이 나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기사를 낸 거라고, 사실 나는 기사에 나온 내용보다, 더 나쁜 놈이라고, 더 악한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저 영원한 지옥에 처할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인데, 나 같은 죄인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서, 사용해 주신 것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정말 이 사람들에게 박수받아야 될 사람인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줘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 우리도 죄인 중의 괴수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격 없는 자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있게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일하고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힘을 빼는 소리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리게 됩니다. 박수 치는 사람이 9명이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사람이 한 명일 때, 우리의 귀에는 왜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조롱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걸까요? 그게 정말 크게 들려요. 저도 늘 그런 소리가 들리면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지고 내가 할 수 있을까 우울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고, 우리들의 모습들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역시 사람들이 조롱하고 침 뱉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못해 먹겠다고 하고 포기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그 길을 묵묵히 가신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새 힘과 용기와 소망을 얻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보고 우리 주변의 상황들을 보고, 직장에서 만나는 일들을 보면 늘 실망스러운 것, 좌절할 만한 것들이 많지만, 우리의 시선을 주님 앞에 두고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가, 자격이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해 주셨는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