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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 (빌 3:13-14)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죠. 제 아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면, 보면, 제가 볼 때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하지만, 조금 뒤에 보면 그 일을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뭔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도 하든지, 아니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들기도 하든지, 그 모든 일을 할 때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보내어 주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보낸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 자녀를 내게 맡기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 남편을 나에게 맡기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 아내와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을까? 때로는 같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하기도 한데,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왜 이 사람과 함께 살게 하셨는가? 항상 우리가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겁니다. 우리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로 하여금 이런 직업을 가지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나에게 안 주셨을까? 항상 우리가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늘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1달란트 받은 종처럼,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사명을 망각해 버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며, 나 몰라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른 생활의 태도가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2024년도에 1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이러한 사명의 충실하며 살아왔는지.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주님께서 칭찬하실 만큼, 그 사역에 충실했는지, 우리 자신의 삶을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25년을 맞이하면서, 내가 이 사명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사명을 어떻게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 3장 13절 14절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을 통해서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 잘한 일일까요? 못한 일일까요? 둘 다입니다. 과거의 실패가 우리로 하여금 앞에 앞으로 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될 수가 있겠고요. 과거에 있었던 성공이 오히려 우리들에게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나 자신의 과거, 다른 사람의 과거, 즉 예전에 했던 그 모든 것들이 그것이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세리와 죄인과 같은 사람도 받아주고 용납하는 거예요. 세리처럼 그 악랄한 사람도, 창기처럼 더러운 삶을 살았던 그 사람들의 과거들도 모든 것을 다 용서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따뜻한 사랑으로 품는 것이 복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수하는 것들이 많아요. 잘못하는 게 많습니다. 그러한 것을 계속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 과거라고 하는 감옥 속에 갇혀 있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그 과거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시켜서 해방시켜서 우리가 그 과거의 감옥에서부터 빠져나와야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왜 우리는 과거를 잊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과거도 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피를 흘려주시면서 목숨을 우리 위에 내어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우리도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과거든 나의 과거든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과거에 대해서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해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보아야 할 그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목표를 향해서 표대를 향해서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의 상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우리의 시선이 바라보지 말아야 될 부분이 어디일까요? 그것은 우리 주변의 상황들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상황들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파도가 일렁이면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런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위축되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우리 주변의 환경들만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절대로 감당해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되는가? 오늘 빌립보서 3장 14절의 말씀은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부름의 상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배해 주신 그 놀라운 은총을 바라보며 그 상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다윗 앞에 나타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친형 엘리압이라고 하는 형이 나타난 것이죠. 그 엘리압이 다윗을 향해서 비아냥거리면서 욕을 해댔습니다. 너는 양을 치다가 내 양을 어디다 두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느냐? 하면서 시비를 걸고 따지기 시작했을 때 다윗은 그 엘리압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엘리압과 시간을 보내면서 엘리압과 싸우면서 그래서 그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적이 엘리압이 아니라 골리앗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대적이 누군가 골리앗이 대적이지 엘리압이 대적이 아닌 거예요. 옆에서 말하고 있는 그 형제의 이야기에, 내가 쓰러지고 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고, 그 사명을 행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상을 줄 것인가? 부름의 상을 바라보면서 시선을 고정하게 되었을 때,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를 수가 있었던 것이죠.


오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이 세상에 대해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거예요.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아야 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가 보아야 될 대상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상이 우리가 보아야 될 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부터 4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내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에 목말라 있어요. 사람들이 칭찬해 주고 사람들이 박수 쳐야죠.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놓이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너무나도 괴로워서 고통스러워서 쓰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서 얻을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주실 그 영광의 면류관을 기억하며,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사랑을 바라보는 그런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할 겁니다. 의로운 자는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악한 일을 하고, 만일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한다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아무런 시비를 걸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고 하면, 사탄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전혀 일하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엘리압과 같은 사람을 들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골리앗에 가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넘어지고 늘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상황 가운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면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쓰러져버릴 것이 아니라 사탄이 내 영혼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12절의 말씀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무엇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울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들의 말에 고통스러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데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비아냥거리고 욕하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게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노라.”

믿음의 길을 가는 길에는 언제나 박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2025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가 아닙니다. 2025년 그 길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한 사탄의 공격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할 텐데, 나를 가장 이해해 줄 줄을 기대했던 사람들로부터, 나랑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로부터, 나와 같이 떡을 먹던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배신하는 경험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좌절하고 무너지고 포기할 게 아니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2025년 더욱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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