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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면류관 (잠 17:6)

오늘 우리는 잠언서 17장 6절, 한 절 말씀을 살펴보게 됐는데요. 잠언 17장 6절의 말씀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손자가 노인들의 면류관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 면류관이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요? 면류관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면류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바로 그다음 행에 있는 표현을 주목해 보면 됩니다. 그 바로 다음 행에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 표현이냐 하면, “영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잠언서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이 잠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런 표현법 자체가, 시편도 마찬가지지만, 앞에 문장과 뒤의 문장이 서로 병렬되면서, 같은 의미를 반복하고 있고, 비슷한 의미를 반복하거나, 대조되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했던 그 표현을 두 번째 행에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겠는데, “손자가 노인의 면류관이다.” 표현해 놓고, 그다음 행에서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 표현을 우리가 주목해 본다고 한다면,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바로 “영화로운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손자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얘기는, “노인들의 영광”이다. 노인들의 “영화로운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노인들의 영화가 무엇이냐? 노인들의 영광이 무엇인가? 바로 손자들이 우리 손주들이, 노인들의 영화로운 것이다. 이 “노인들의 영화다.” “노인들의 영광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이 본문에서 알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잠언서의 말씀과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서 보면, 면류관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때, 꼭 영화라고 하는 말과 짝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면류관이다”라고 하는 표현을 종종 쓰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얼마 전에 우리가 살펴본 적이 있는 잠언서 16장 31절 말씀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라고 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은 영화를 나타내는 그런 표현이라. 그렇게 알 수가 있겠고, 그래서 손자가 노인들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얘기는 손자가 노인들의 영광이다. 노인들의 영화다 그런 의미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잠언서 17장 6절에서 손자가 노인들의 면류관이다. 영광이다. 왕관이다. 영화다. 그런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왜 자식을 노인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고, 손자를 영광이라고 했을까? 자식은 왜 아닌가요? 영광이 아닌가요? 왜 자식은 그냥 건너뛰고, 손자가 노인들의 영광이라고 표현했을까?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겠고요. 또 하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왜 손녀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왜 손자만 언급했을까?”라고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손자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사실 “아들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아들이 노인의 면류관이다”라고 원문에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아들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손자다. 그래서 “손자는”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히브리어 원문 자체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냐면, “아들의 아들이 노인의 면류관이다”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 겁니다.


왜 도대체 아들의 아들이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왜 손자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손녀는 언급이 없는 것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왜 손녀는 표현하고 있지 않는 것이죠. 왜 손자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유교적 사고방식이 옳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닐 겁니다. 종종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우리가 자라온 그 문화에 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는 경우가 많이 있고, 그런 우리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다 보면, 그래서 그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남아 선호 사상들이 많이 있었고, 그리고 아들을 중시하는, 남자를 중시하는 그런 문화에 오랫동안 찌들어져 있는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지내오다 보니까, 그런 우리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아, 성경은 남아 선호 사상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있구나.” “성경은 여자를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남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성경은 오로지 남자 중심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라고 해석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종종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죠.

성경은 그렇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성경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죠. 따라서 그 누구도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그 누구든 주인이든 종이든 그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라고 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하나하나 해석해야 옳은 것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라서,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 잠언서 17장 6절 말씀에서 손자는 노인들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때, 왜 손녀는 표현하고 있지 않는가? 왜 여자는 이야기하고 있지 아니하는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는데요. 이렇게 손자만 언급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유법적인 표현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통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그런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손자만 언급했으니까, 그러니까 손자만 노인의 면류관이 되는 게 아닌 겁니다. 손자만 언급했으니까 그러면 아들의 아들만 언급했으니까, 딸의 아들은 그 노인의 면류관이 아닌 건가요? 딸의 딸은 노인의 면류관이 아닌 건가요? 그렇지 않아요. 다 노인의 면류관인 거예요. 뿐만 아니라 손자만 언급했으니까, 증손주는 노인의 면류관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다 면류관이에요. 모든 자녀들이 모든 손주들이 다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아들의 아들만 언급했으니까, 오로지 손자들만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그렇게 엉터리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이것은 일부를 통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는데요. 만일 너희들이 길을 가다가 이웃집에 내 원수의 소가 구덩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것을 건져주어야 되고,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하는 그런 명령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소에 대해서 그렇게 명령했으니까, 말이 빠지면 모른 척해도 괜찮은 것이죠?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소를 언급했지만, 예를 들어서 소가 빠졌다고 한다면, 그 소를 그냥 모른 척하지 말고 건져주어야 된다고 말씀했으면, 소뿐만이 아니라 말이 빠져도 양이 빠져도 그 어떤 동물이 빠진다고 할지라도 다 그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베푸는 것이 그것이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지, 문자적인 그 의미만을 봐서 이 성경에서는 말만 이야기했다. 이 성경에서는 소만 이야기했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해당 사항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엉터리 해석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날 현대 영어 성경 번역을 보면, 신약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에 특별히 서신서를 해석할 때 번역할 때, “형제들아”라고 하는 표현이 있으면, 영어 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했냐 하면 “brothers and sisters” “형제자매들아”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성경 원문에는 “형제들아”만 있는데, 원문에는 “형제들아”만 있는데 오늘날 현대역 영어 성경에서는 “형제자매들아”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요.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겁니까? 아니면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잘 살리는 것이겠습니까? 원문에는 형제만 언급되어 있는데, “자매들아”라고 하는 말까지 표현한 것은 성경에 없는 것을 성경에 집어넣은, 그러니까 없는 성경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그런 잘못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성경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오늘날 우리가 제대로 잘 이해하도록 충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잘 표현해서 번역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자매들아”라고 하는 말을 빼먹는 것이 성경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는 있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잘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아무튼 이 잠언서 17장 6절에서 손자들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들의 아들만 노인의 면류관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들의 딸이든지 딸의 아들이든지 딸의 딸이든지, 아니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든지, 증손자든지 무엇이든지, 일부를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전부를 가리켜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고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잠언서 17장 6절의 말씀은 손자들만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손주들 모두가 외손조든 외손녀든 친손자든 친손녀든 아니면 증손이든 그 어떤 손주들이든, 그 모두가 다 노인의 면류관이요. 노인의 영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들 할머니를 보니까, 손주 사랑에 푹 빠져 계셔요. 세상에. 우리 손주 생각만 하면 그렇게 행복하고 우리 손주들 생각만 하면 그렇게 미소가 지어지고, 우리 손주 자랑하는데, 제가 볼 때는 하나도 안 예쁜데, 얼마나 예쁘냐고 하고 얼마나 자랑들을 많이 하시는데요. 저는 아직 손자가 손주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손주를 얻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 정말 그렇습니까? 손주를 한번 낳아봐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 결혼한 지가 지금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 아기를 안 낳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손주가 생겨보면 그때 정말 맞는지 안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손주들이 노인들에게 주어진 영광이다. 손주들이 노인에게 주어진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어쩌라는 말인가요? 어떡하란 말이죠. 감사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나이가 늙어서 아무런 힘도 없고 재미도 없고 이제는 내 삶의 가치가 별로 많이 없어져버려서, 이제는 내 인생의 가치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다 기억했는데, 이제는 뭐 하나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고, 이제는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제대로 잘 되지 않고 운전도 잘 못하겠고 이제는 밥맛도 없고, 이제는 걷는 것도 힘들고 이제는 예배 시간에 앉아서 정신 차리고 듣는 것도 힘들고, 모든 것이 다 힘들어 버린 이 이런 나이가 많은 삶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솟아오르고, 그래서 늘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는 빨리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고 싶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지 말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영화의 면류관이 주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라.” 하는 그런 의미죠. 우리 손주들이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 손주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그 아이들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소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손주가 없는 노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손자들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했는데 나에게 손주가 없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영광이 없는 건가요? 면류관이 없는 것인가요? 불행한 인생인가요?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결혼하지 않고 그냥 홀로 지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았지만, 우리 자녀들이 결혼을 하지도 않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을 낳지도 않고, 그래서 손주가 없는 그런 노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손주들이 없으니까, 노인의 면류관이 없어진 것이고, 인생의 낙이 없어진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인생인가라고 질문을 던져볼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잠언서 17장 6절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 손자가 노인들의 “유일한”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손자만, 손자가 있어야만 된다고 말한 게 아니고, “손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손자들은 노인들의 면류관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이지, 그러면 손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 인생은 빵점짜리 인생이요. 그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에요. 그 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손주가 있는 것이 그것만이 유일한 영광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가지 표현들이 많이 나와요. “영광의 면류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까 전에 읽었던 잠언서 16장 31절 말씀에서는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손주가 영화의 면류관이기도 하지만, 손주 없어도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잠언서 16장 31절에서 이야기했다. 이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16장 31절에 관한 설교 말씀을 생각이 안 난다면, 다시 한번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잠언서 4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내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 손주가 없어도 우리가 지혜를 추구한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지혜가 우리에게 영화의 면류관을 준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잠언서 19장 11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그러니까 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인자하게 친절을 베풀며 그리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그게 바로 나의 영광이 된다.”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손주가 없어 내 인생은 괴로워 죽겠어. 나는 왜 이렇게 손주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을까?” 하면서, 좌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손주가 있다고 한다면 좋겠지만, 없다고 하더라도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이 많이 있으므로, 이런저런 방법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지혜를 얻고 또한 친절하게 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그 영화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손자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손주가 이쁘니까”가 아니고, “손주가 사랑스러우니까”가 아니고, 사실은 새로운 사명이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내가 사랑해야 될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수고하면서 그 아이들을 잘 길렀어요. 이제 그 아이들이 독립해서 시집 장가 다 가고, 그리고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자녀들을 위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정 가운데 손자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손녀딸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어르신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또다시 놀라운 사랑을 베풀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이죠. 옛날과는 다르게 또 다른 방식으로 또 사랑해야 될 대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영화의 면류관이 되는 거예요.

영화의 면류관은 그냥 얻어 쓰는 게 영화의 면류관이 아니고, 영화의 면류관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생겼다고 하는 게 그게 영화의 면류관이에요. 사랑할 대상이 생기는 게, 그게 기쁨인 것이고, 사명이 생겼다고 하는 게 그게 영광이 되는 것이죠. 왕이 왜 왕입니까? 왕이 왕관을 쓰는데, 그 왕관을 쓰기만 하고, 그리고 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러면 왕이 되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런 왕관을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왕이 아니라, 왕은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사랑을 베푸는 그 왕관의 무게를 감당해 나갈 때 왕이 되는 것이고 왕의 영광이 있는 것이죠. “왕관을 쓰려고 하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들에게 허황되게 우리에게 영광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영광은 우리가 사랑해야 될 헌신해야 될 사명의 그 짐으로서 우리에게 오는 것인데, 우리 노인들에게 손주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의 기회가 생겼기 때문인 것이지, 그냥 그냥 사랑스럽기 때문에가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손주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건가요? 아니죠. 손주가 없어도 돼요. 손주가 없어도 우리가 사랑할 사명의 대상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한다면, 손주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면류관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큰일이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내 상황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푼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내게 영광의 면류관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아들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 손주가 있든지 없든지, 그에 상관이 없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영화의 면류관을 쓴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스위스의 교육학자이며 사상가였던 “페스탈로치”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교육의 아주 선구자라고 해야 되나요? 교육의 아버지라고 해야 되나요? 별명이 뭡니까? 페스탈로치의 별명이? 아무튼 교육에 있어서 아주 위대한 그런 어르신이죠. 근데 그 페스탈로치 할아버지는 은퇴한 이후에, 그는 어디를 갔는가?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에 찾아가서, 그 놀이터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잘 놀 수 있도록, 그 놀이터에 떨어져 있는 병이 깨진 거라든가, 돌멩이라든가 이런 것을 하나씩 하나씩 주어 담으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그래요. 하루는 그 페스탈로치의 할아버지가 놀이터에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주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오해해서 무엇인가를 훔쳐가는가 싶어가지고, 경찰서에 잡혀가기까지도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 할아버지는 정말 자기 동네에 사는 그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늙어서 다른 어떤 것을 해줄 수 없지만,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그 놀이터에서 위험한 거 하나씩 하나씩 치워주면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없습니까? 우리에게 아직 손주가 없습니까? 나는 그런 우리 그런 손주가 볼 그런, 그런 행복도 나에겐 왜 없나? 그렇게 원망하고 좌절할 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처한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베풀고, 따뜻한 얼굴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해 주고, 등을 두드려주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 사명을 실천하는 자가 바로 영화의 면류관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주어진 이 사명들을 믿음으로 잘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째 행을 마쳤고요. 두 번째 행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행은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두 번째 문단은 아비는 자식의 영화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자녀들에게 우리 부모님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죠. 역시 이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아들”의 영화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은 아들만 관련된 게 아니죠. 아들과 딸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고요. “아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자식의 영화입니까? 엄마는 아닌가요? 아니요. 다 포함되는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 다 아들과 딸의 영화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 말씀을 읽어야 될 것인데요.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녀들도 감사해야죠. 우리 자녀들도 부모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원망하며, 그리고 왜 우리 부모님은 능력이 없어? 왜 우리 부모님은 돈이 부족한 거야? 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이걸 해주지 못하는 거야? 하면서 원망하며, 그리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부모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녀들이 가져야 될 당연한 자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탕자처럼 집을 떠나버리는 그런 부모의 집에서 떠나버려서 고통의 길로 갈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축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부모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해요. 자녀들이 우리 부모를 영광으로 자식의 영화로 생각할 수 있도록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할 그 과제를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이죠.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창피해하고 정말 부끄러워하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고, 정말 영광스러운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정말 모범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된다고 하는 그 사명을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깨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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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우리는 다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래서 우리는 늘 쓰러지고 늘 실패하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밖에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 앞에 날마다 날마다 엎드리는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다하면서,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감사를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정말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보면서 우리 자녀들의 영광이라고 느낄 수 있게끔, 자녀들이 우리를 보면서 영화로운 것을 느낄 수 있게끔, 최소한의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그렇게 못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나가서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죄 용서함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다시 한번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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