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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라 (롬 12:14-21)

오늘 우리는 로마서 12장 14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근거해서 “축복하라”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이 말씀을 살펴보기 위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로마서에서 어떤 흐름으로 이 로마서의 말씀을 읽어왔는지, 한번 다시 한번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의 아주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우리의 공로로는, 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은혜로 구원받게 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다 사함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냥 아무런 공로가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 전체의 메시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11장까지 쭉 이야기한 다음에 12장 1절 말씀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심판을 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런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필요 없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 죄를 지어도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된다. 죽여서 드리는 구약적인 제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제물로 우리 몸을 드려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데요. 로마서 12장 2절 다음 말씀은, “그러면 우리가 드려야 될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그것이 단순히 우리가 종교적인 헌신을 드리는 것만이 영적 예배가 아니라, 우리가 예배 시간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그 종교적인 헌신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아니라, 사실은 교회당을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예배다. 오늘 우리가 이 교회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이것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삶 전체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이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는 것이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분별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순종해야 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많지 않은가? 모든 선한 일이 다 하나님의 뜻일 텐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다 할 수는 없다. 모든 선한 일을 우리가 다 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할 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 주어진 그 사명, 내게 맡겨주신 그 은사,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명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아픔과 슬픔까지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데, 내게 주신 그 사명에 따라 행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로마서 12장 3절의 말씀인 것이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이러한 흐름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다룰 로마서 12장 14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순종해야 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되는데, 내게 주신 사명에 따라 행하는 것을 그 전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데,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14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그림을 보면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고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우리의 이웃 중에서, 어떤 이웃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이웃, 나를 적대적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이웃, 나에게 원수가 되어버린 이웃,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웃, 내 이데올로기와 내 가치관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그런 이웃,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런 이웃들을 우리가 저주할 것이 아니라, 싸울 것이 아니라, 오늘 로마서 12장 14절의 말씀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들과 많은 적대관계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행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하라고요? 축복하라 이 말이에요. 저주하지 말아야 된다. 싸우지 말아야 된다. “다투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정반대로 사탄의 뜻은 무엇일까요? 사탄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싸우고 저주하고 다투는 것은 사탄의 뜻이라고 많이 사탄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혼란스럽고, 그래서 우리가 늘 혼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혼동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악한 자들, 박해하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운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저 나쁜 사람들과 싸운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싸우는 이 싸움은 의로운 싸움이요 선한 싸움이요. 반드시 내가 이겨야만 되는 싸움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누구처럼 착각하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나온 그 군병들로부터 예수님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처럼 보였어요. 이 나쁜 사람들을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가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하고 있는데, 그 예수님을 보호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저 악한 사람들이 저 무지한 사람들이 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는 것을 못 잡아가게 만드는 것이 이것이 의로운 일이고 선한 일이고,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하고 베드로는 칼을 꺼내 든 것이죠.


그래서 그들과 싸우려고 했고, 그래서 칼을 내리쳐서 제사장의 부하의 귀를 잘라버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정말 고맙다. 너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칼을 도로 집어넣어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을 뿐이고,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을 감당해야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베드로처럼 혼란스러워하는 겁니다. 의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싸우면 그것이 의롭고 선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적들과 우리의 대적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게 성경에서 일관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고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던 것이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 12장 14절의 말씀일 것인데,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원수와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 지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를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너희를 박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과 기싸움을 벌여서, 본떼를 보여주고 완전히 승리를 해버려야, 그래야 우리가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부터 48절의 말씀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들, 내 것을 빼앗아버리고 내 명예를 짓밟아버리고 우리를 괴롭히고, 심지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 있어도, 그런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오히려 축복해 주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2장 17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도 역시 같은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했다고 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나쁜 짓을 했다고 한다면, 원수를 갚을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서 본떼를 보여줄 게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오히려 더 선을 행하고 축복하라고 하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의 정반대의 가르침은 누가 가르칩니까? 사탄이 우리를 향해서 속삭이는 것이죠. 우리의 본성을 향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자극하는 겁니다. “너는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네가 그렇게 나쁜 짓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너만 바보 되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너만 손해 보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네가 바보가 되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을 자극하는 거죠.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자극하는 겁니다. 원수를 갚아버려야 한다고 우리에게 마음 가운데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탄의 지시에 따라서 우리가 통쾌하게 복수해 버리고, 통쾌하게 이겨버리면,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게 된 것일까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탄에게 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림을 한번 보면서 설명해 드렸으면 좋겠는데요.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싸움이 있는 겁니다. 두 종류의 싸움이 있는데 하나는 보이는 싸움이죠. 바로 내 앞에 있는 적입니다. 바로 나를 향해서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죠.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와요. 우리 자식들이 속 썩이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고, 우리의 배우자가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우리의 이웃이 싸움을 걸어오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싸움을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 바로 육적인 싸움인 것이죠. 그런 육적인 싸움에 대해서, 그렇게 나에게 나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선으로 대하게 되면, 그런 육적인 싸움에서 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악으로 갚아서 우리가 이기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그런 싸움인데요. 그런 보이는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보이는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영적인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사탄이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장악해 버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짓눌러 버리기 위해서 우리를 향해서 속삭이고 있는 겁니다. 짓밟아버리고 통쾌하게 이기라고 영적인 싸움을 걸어오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가 만일 그 사탄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사탄에게 져서, 이 세상의 싸움에서 악으로 악을 대하게 될 때 이길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영적인 싸움에서 지게 된 것이고, 그러나 영적인 싸움에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선으로 대하게 될 때, 우리가 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은 사탄의 명령에 우리가 거부한 것으로서,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싸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죠.


오늘 로마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원수 갚는 일을 너희가 직접 하라는 것입니까?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하지 말라. 너희가 원수 갚지 말라. 왜요? 원수 갚는 일을 누가 하겠다고요?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원수 갚는 일이 누구의 일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일을 내가 뺏어서 내가 원수를 갚아버리면,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할 일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월권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큰 죄가 되는 것이죠. 그 옛날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순종하며, 하나님이 판단해 주시는 대로 내가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이 무엇이고 내가 악이 무엇인지 판단하겠다고 생각했던 그런 하와의 죄와 똑같은 죄를 우리가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원수 갚는 일을 우리가 직접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는 불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입이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해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내가 생각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따른 그런 행동이 나와야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두려워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걱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좌절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관해 주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우리 눈에는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그 말씀 가운데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신 믿고 신뢰하고 감사하는 게,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절망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슬퍼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다고 했으면 그렇군요.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다고 했으니까, 나는 원수를 안 갚는 게, 그게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때 우리가 하나님 대신에 내가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원수를 갚아버린다고 한다면,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은 누구와 똑같은가? 사탄과 똑같은 짓이다 이 말이에요. 야고보서 2장 19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탄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은 사탄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사탄이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게 사탄이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탄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사탄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내가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고, 내가 복수하겠다고 이야기하면, 그건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탄처럼 이야기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지 않고 악으로 악을 갚으며 복수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탄의 자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원수가 주리거든 원수가 목말라하거든 마시게 하고, “그러면 너희가 숯불을 네 원수의 머리 위에 올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셔요.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올린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주석들을 살펴보고 많은 신학자들이 설명해 놓은 설명들을 읽어봐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 달라서 도대체 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올린다고 하는 말에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싶어요. 얼굴이 후끈거리게 될 것이다. “수치심을 느껴서 정말 얼굴이 벌 그래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악을 악으로 갚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악을 악으로 갚으면 그래서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그 타격이 진정한 타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갚은 자에게 내가 선을 베풀면 악을 갚은 자에게 “내가 오히려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엄청난 창피함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그런 경우를 많이 만납니다. 식당에 갔는데 식당에서 제대로 잘 서비스해주지 않는 사람을 보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죠. 원수가 같이 생각이 들죠. 그래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갑질을 해대는 겁니다. 백화점에서 갑질을 해대는 것이고, 학교에서 갑질을 해대는 것이고, 우리들 자녀에게 잘못하면 그 선생님을 향해서 갑질을 해대는 것, 교회에서 뭔가 조금 나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 그러면 화를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웃과의 관계 가운데서 화를 많이 내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라 선으로 대하고 축복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해 나가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원수들에게는 그렇게 할 것인데, 15절의 말씀에서는, 그러면 슬픔을 당한 이웃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림을 한번 봅시다. 기쁨을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슬픔을 당한 자, 좋은 일이 있는 자를 향해서는, 로마서 12장 15절에서 16절의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슬픔을 당한 사람이든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이든 그 우리의 태도는 똑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우리의 태도입니까?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죠, 멀리 격리되어서, 나 자신을 격리시키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무시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죠. 슬픈 자와 함께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해야 되는 겁니다. 슬픔을 당한 자가 있다고 한다면, 정죄하고 비난하고 왜 그런 나쁜 일을 당했는가 분석하면서, 비난할 게 아닌 것이죠. 욥의 친구들처럼 무시하고 조롱할 게 아니라, 같은 슬픔을 가지고 공감하면서 위로해 주어야 하는 게 성도의 모습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슬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울어야 돼요. 왜 놀러 가서 죽었냐? 이딴 소리 하지 말고,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눈물로 함께 슬픔을 같이 해야 할 겁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배 아파할 게 아니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할 게 아니고, 사울 왕처럼 다윗을 보면서 죽이려고 달려들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잘 되는 것처럼 기뻐해야 되는 거예요.   누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바로 엄마 아빠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거예요. 엄마 아빠는 우리 자녀들이 잘 되면 기뻐요. 엄마 아빠는 우리 아이들이 잘못되면 슬퍼요.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함께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바로 16절의 말씀 가운데서 해주시는 말씀이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2023년에 마지막 날인데, 금년 한 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순종하지 못해요. 그 말씀은 안 들은 걸로 알래요? 이건 내가 순종하지 못해요. 내 마음 가운데서 자꾸만 밀어내 오셨습니까? 늘 실패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늘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에 우리가 기대면서, 주님의 그 은총을 바라면서,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결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야죠. 왜 우리는 원수도 사랑해야 돼요? 힘들어 죽겠는데, 마음이 아픈데, 왜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됩니까? 왜 우리는 좋은 일 있는 사람과 배가 아파도 같이 즐거워해야 됩니까? 왜 왜 그런 힘든 일을 우리한테 시켜요? 왜 그렇게 해요?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심판해 버리고 속 시원하게 끝내버린 것이 아니라,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드시고, 그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풍성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에,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도 하나님을 내 자녀로서 살아 고 말씀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늘 실패하고 늘 넘어지지만 주여 저희를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금년 한 해 실패했는데 내년에는 다시 시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희들의 마음을 만져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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