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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강좌 3강: 스콜라 신학의 발달

오늘은 중세 교회사 강좌 세 번째 시간으로 스콜라 신학의 발달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5, 60 평생, 60 평생, 70 평생 신앙생활하면서 처음 들어봅니까? 그렇군요. 스콜라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중세 시대 때 있었던 신학적인 그런, 그런 토론, 신학적인 학문적인 발달, 그 당시에 있었던 신학적인 연구를 가리켜서 스콜라 신학이라고 합니다. 스콜라 신학, 스콜라라고 하는 말이 이제 학문이라고 하는 말로 볼 수가 있거든요. 우리 장학금을 스칼라십(scholarship)이라고 하고 학자를 스칼라(scholar)라고 하는데, 그런 비슷한 어원에서 온 것이라고 보면 되겠고요. 아무튼 학문, 이런 걸로 볼 수가 있겠는데, 중세시대 때, 우리 신앙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 좋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학문적인 연구를 한 걸 가리켜서, 스콜라 신학이라고 합니다. 대략적으로 그렇게 이해하시면 좋겠는데요.

스콜라신학은 어떻게 발달이 되었는가? 수도원을 통해서 발달이 됐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수도원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면, 수도원 운동이 그렇게 바람직한 운동이었습니까? 바람직하지 못한 거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렇죠.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의 일상을 포기해 버리고, 그냥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앙생활만 하겠다. 그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매진하겠다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신앙적인 그런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건전하고 균형이 잡힌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늘 소망이 이 세상을 좀 벗어나고 싶다. 이 죄악 된 세상, 이 타락한 세상, 이런 세상에서부터 그냥 벗어나서, “정말 주님과만 교제하는 그 영적인 삶만 살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망이 어쩌면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바람직한 것이냐 했을 때, 바람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모습이 변화되고,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는 그 모습을 본 그 제자들이 베드로가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만들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모세와 엘리아를 위하여 만들어서, 우리가 여기 있습시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래. 우리가 여기서 지내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가신 것이죠. 시장 바닥으로 가신 것이죠. 사람들을 만나러 가신 것이죠. 이 세상은 무엇인가? 이 세상은 너무나도 더럽고 너무나도 참 깨끗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피해서 도망 다녀야 할 곳이 아니라,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에요? 사명의 현장이다 이 말이에요. 사명의 현장, 믿습니까? 아 좀 대답 좀 해요. 이 세상이 무엇의 현장이라고요? 사명의 현장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있으면서, 거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되고 하는, 그 사명이 어디에 있어요? 이 세상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어디에 있어요? 이 세상에 있는 거예요. 저 저기 내장산에 가서 있는 게 아니고, 내장산 뭐 이런 데 속리산 이런 데는 뭐가 있어요? 절이나 있는 거예요. 절, 왜? 이 세상과 속세 끊어버리고, 그냥 그곳에 있겠다 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진짜 교회예요? 세상 속에 있어야 진짜 교회란 말이에요. “전원교회” 요즘 유행하고, 막 그러는데, 별로 전원교회는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가 않아요.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되는가? 세상 속에 있어서, 세상과 교류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 거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은 어느 곳이에요? 가정 지긋지긋하니까, 빨리 뛰쳐나와야 될 곳이죠? 그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가정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최우선의 사명의 현장이에요. 그래서 그 가정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 아이들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사명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지, 수도원 속에 들어가서 수도원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냥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늘 기도하고, 늘 하나님과 같이 지내는 게 이게 멋있어 보이지만, 그게 바른 신앙적인 접근법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제가 지난 수도원 운동할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요? 괜찮아요. 처음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원 운동을 볼 때, 제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서, 수도원 운동을 볼 때, 이 수도원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아쉬운 그런 움직임이었다”라고 하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장점도 있는 거죠. 장점은 어디에 장점이 있습니까? 장점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정말 우리의 사명의 현장이 돼야 되는데, 이 세상이 사명의 현장처럼 돼 있어요? 썩어 빠진 곳이 돼버렸어요? 안타깝게도 썩어빠진 곳이 되어버렸다 이 말이에요. 여기서는 정말 내가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고, 이 세상의 성당 속에서는 매관매직하며,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짓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 종교계를 바라보면서, 이 사회를 바라보면서, 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던 그 마음만큼은 그것은 어느 정도 인정을 해줄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런 점에서 장점이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데, 가장 좋은 거라고 한다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제일 좋은 건데, 그게 안 되니까 수도원에라도 가서 있겠다고 한 것인데요. 그런데 이 수도원이 크게 단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수도원에서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하다 보니까,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신학적인 발전이 많이 발달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중세 시대 때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일 그냥 이 세상에서만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신학의 발달이 별로 없었을 거예요. 왜? 사는 게 너무 바빠서. 그냥 지금 먹고살기 바쁘고 아무튼 실제의 삶이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에, 그러니까 신학의 발달이 이루어지지가 어렵겠죠. 그러나 수도원이라고 하는 곳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속세의 일은 다 내려놓고, 오로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책들을 보고 기도하고 하다 보니까, 여기에서는 학문의 발달, 신학의 발달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수도원 운동에 대해서 잠깐만 다시 한번 좀 정리를 하고 보려고 하는데요. 중세시대 때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경제가 발달했냐 하면, 고대시대 때 서로 싸우고 다투고 전쟁하고 그러다 보니까, 경제가 발달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중세 시대가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정치 체제가 안정이 되니까, 경제활동이 많이 발달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화폐 제도가 발달이 됐고, 그래서 경제적인 그런 성장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그러면서 경제활동이 늘어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요? 빈부 격차가 생기기 시작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이 이 현세대의 빈부 격차가 심한 이 시대에 대한 실증을 느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됐는데, 피터 왈도(Peter Waldo)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피터 왈도라고 하는 사람은 프랑스 귀용 출신인데, 이 사람이 청빈한 삶을 살고자 이 세상에 그 경제적으로 막 탐욕적으로 사는 이 속세의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내가 정말 청빈한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 수도승이 되어서 수도원 운동을 벌인 겁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렇게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인정을 받았을까요? 이단아 취급당했을까요? 이단아 취급당하는 거죠. 그래서 당시 교황청이 피터 왈도를 박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이 피터 왈더라고 하는 사람은 박해를 피해서,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고,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그 사람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니까, 개신교도로 바뀌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그런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있었는데요. 프란치스코 수도에는 우리가 잘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많이 들어봤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시를 지은, 그 노래를 지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고 하는 사람이 세운 수도회인데, 이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수도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원래 상인 출신이고 돈도 많았던 사람인데, 다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까, 내가 가난해야 된다. 그래가지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그래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프란시스코 수도회는 좀 다른 점이 있었는데, 뭐가 다른 점이 있냐면,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데 있어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도원 운동은 그냥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집중을 했다고 한다면,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선교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도시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또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는 일들을 많이 하는 등, 그런 일들을 많이 했고, 그래서 그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세운 수도회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 자매의 수도회들을 세워서, 그래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쭉 연결이 돼 왔는데, 이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당시에 선교를 많이 했다. 복음 전도하는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다음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수도회가 생겼다고 그랬죠? 도미니크 수도회가 생겼는데, 도미니크는 프란치스코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었지만 귀족 출신으로 나중에 수도회를 만들었어요. 이 사람은 성당을 이렇게 다니면서 신앙생활하다가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됐는데, 하루는 프랑스 남부에 갔더니 거기에 이단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알비파라고 하는 이단들이 있는데, 그 이단들이 정말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이단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왜 여기 있는 이단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가만히 봤더니, 금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미니크가 생각하기를, 정말 강력한 복음 전파는 칼과 창으로 사람들을 정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그래야 복음이 전파된다 생각해서, 도미니크 수도회를 만들어서 그래서 이런 수도 활동을 했고, 설교자들의 수도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렇게 활동을 했는데, 도미니크 수도회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학문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수도에는 선교를 많이 했다고 하면, 도미니크 수도회에서는 학문 연구를 많이 해서, 성경을 읽고 또한 고대 학자들이 써놓은 그 책들을 다 가지고 와서 읽으면서, 학문 연구를 많이 하면서,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그런 학문적인 능력들이 많이 배양이 됐고, 결국 이 도미니크 수도에서 배출된 학자들이 각 대학의 교수들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파리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이 신학이 유명한 대학이었는데, 그 신학과의 교수들이 누구로 채워졌는가? 도미니크 수도에서 배출한 그 신학자들이 들어가서 거기서 가르치게 된 것이죠. 나중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도 학자들이 생겨서 결국 이 수도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역할을 수도원에서 해냈고, 사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의 근본적인 뿌리들을 다 어디서 초안을 잡았는가? 이 당시에 수도원에서 연구했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많은 신학들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아주 대표적인 인물을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안셀무스 들어봤어요? 안셀름 세계사 시간에 들어봤을 법도 한데, 그 시간에 졸았으면, 못 들었을까요? 이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인데, 이 안셀무스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증명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이 안셀무스가 했던 말이 뭐냐 하면, 본체론적 신존재 증명이라고 하는 거, 하나님이 존재하는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증명한 것이죠. (한번 봅시다._ 하나님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최상의 존재가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최상의 존재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보다 열등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존재해야만 최상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존재한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럴듯합니까 안 그럴듯합니까? 안 그럴듯하죠! 안 그럴듯합니다. 

이게 논리가 맞는 게 아니에요. 이 논리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어설픈 거예요. 하지만 이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증명하는 것을 듣고, “아, 그렇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최상의 존재인데, 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최상의 존재가 아니라 열등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반드시 존재하겠지.”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안셀무스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을 많이 받아들였고, 오늘날에도 이 안셀무스의 그 증명을 많이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사실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하는 게 사실 어렵잖아요. 하나님이 있으면 한번 보여줘 봐. 보여주면 증명이 쉬운데, 못 보여주니까 안 보이는 그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것은 이 사람은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증명하려고 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안셀무스는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이신 그 예수님께서 왜 성육신을 해야만 했는가?”라고 하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한번 또 보여주시죠.)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그 심각성이 아주 너무나도 큰데, 그러한 인간의 죄는 오직 인간만이 보상을 지불할 수 있고, 그런데 우리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죄의 보상을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셔서 아무 죄도 없고 그래서 우리들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그 하나님이 인간이 돼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죄를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설명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설교는 많이 들어봤어요? 안 들어봤어요? 들어봤죠. 그 최초의 말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안셀무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피터 아벨라드(Peter Abelard)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피터 아벨라드라고 하는 사람은 파리에 가서 교회, 그 당시 성당이죠? 성당에서 지내다가 그 성당의 참사원이었던 사람의 조카딸을 가르치는 개인 교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조카딸을 가르치다 보면,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여자를 가르치면 어떻게 돼요? 썸띵이 일어나죠? 임신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참사관이 너무나도 화가 나서 이 사람을 거세시켜 버리고, 박해를 했는데, 할 수 없이 이 사람은 이제 도망가가지고, 이제 수도원에 들어가서 산 사람인데, 이 사람은 그 수도원에 있으면서, 당시에 그 질문이 있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학문적인 답변들을 하나씩 하나씩 적어서, 그래서 158개의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을 적은 책을 써낸 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제가 쓴 책 중에 “아, 그런가?” 있죠? 그런 것처럼 이 사람이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하고 해서, 이런 책을 써냈는데, 이것이 그 이후에 모든 수도원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재가 되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요.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라고 하는 사람도, 그 당시에 많은 학문적인 논의들이 있는데 실론, 기독론, 구속론, 교회론, 종말론 등등 이렇게 여러 가지 신학적인 주제들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교재를 만들었고, 이 사람의 교재도 지금까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많이 사용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무튼 중세시대 때 이렇게 교리를 체계화시키는 일들이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토마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사람은 들어봤나요? 들어봤을 거예요. 이 사람은 너무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들어봤을 건데, 이 사람은 신학대전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라틴어로 Summa Theologica, 그러니까 신학의 집대성, summa니까 모아놓은 책을 의미하죠. 신학의 집대성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썼는데, 이 사람이 쓴 책이 계속해서 그 이후에 신학 적인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책에 보면, 역시 신 존재 증명, 하나님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당시에 많은 문제 중에 하나가 뭐냐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증거를 대라. 그런 문제가 많이 제기가 됐기 때문에 예전에는 그냥 믿었어요. 고대 사람들은 하나님 계시냐 안 계시냐를 묻지 않았어요. 그냥 계신 줄 알고 믿고 그렇게 지내오다가, 중세시대 때가 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개화되면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했는데, 정말 계시냐? “나는 못 봤는데, 하나님이 계신 걸 어떻게 아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들을 자꾸 던지니까,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런 스콜라 학자들이 계속 만들어 가는데, 안셀무스도 그런 대답을 했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한 대답을 한 거죠. 그런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답은 좀 한 단계 더 진전한 대답을 내놨습니다. 이 사람이 내놓은 5가지 증명법이 있는데 하나씩 한번 소개해 드릴게요.

첫 번째는 운동으로부터의 증명입니다. 모든 움직임은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있는 것이죠. 지금 움직이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저절로 움직였겠어요? 누군가 그것을 움직이게 만들었으니까, 움직이겠죠. 그렇죠? 누군가가 움직이게 만드니까 움직이는 거죠. 자동차가 그냥 자기가 알아서 갑니까? 그게 아니고 사람이 시동을 걸고 그래서 운동을 하게 만들어줘야 자동차가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운동하는 모든 움직이는 움직이는 것들은 지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움직이게 하는 거에 의해서 움직여졌다는 거죠.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어떻게 움직였는가? 다른 것에 의해서 또 움직임을 받게 되고, 또 받게 되고 한다는 거예요. 마치 도미노처럼 이쪽에서 누군가 탁 건들어주면 탁탁탁탁 쓰러뜨려 가지고, 계속해서 쓰러뜨려 나가는 것인데, 저렇게 하나씩 하나씩 넘어지는 운동이 있다고 한다면, 그전의 것이 때렸기 때문이고, 그전의 것이 때렸기 때문이고, 그전의 것이 밀었기 때문에, 계속 운동이 계속되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맨 처음의 것은 뭐겠어요?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부동의 동자, 자기는 안 움직이면서 부동(不動).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unmovable mover. prim mover.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부동의 동자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운동이 있는 걸 봐서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첫 번째 방법이에요. 그럴듯합니까?

두 번째는 원인으로부터의 증명인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원인이 있어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원진이는 왜 존재해요? 채수정 장로님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채수정 장로님은 왜 존재해요? 예? 김영자 권사님 때문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군가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하게 만든 원인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원인을 쫓아가고 쫓아가고 맨 위로 쫓아가면, 맨 마지막에는 누가 있을까요? 자신은 누구에게서 태어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태어나게 한 최초의 존재가 있어야만, 지금 있는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을 무한대로 끝까지 계속 원인을 가져갈 수는 없다. 결국 맨 마지막에 가면, 자신은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은 어떤 것에 의해서 원인을 받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면서, 다른 모든 것을 존재하게 만든 최초의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 그 원인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러니까 계시다고 봐야지. 그래야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말이 좀 됩니까? 돼요? 예.

세 번째 우연과 필연으로부터의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적 존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우연적 존재로만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그 우연적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무엇인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우연적 존재들이 탄생하는 것이지, 그냥 만들어지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뭔가 필연적으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그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에 의해서 다른 우연적인 존재들이 생긴다는 거예요. 자 여기 종이가 강대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종이가 이 강대상 위에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것인가요? 어쩌다 보니까 여 위에 올라가 있나요? 어쩌다 보니까 올라와 있는 거예요. 반드시 올라가 있는 게 아니고, 어쩌다가 여기에 올라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쩌다가 올라가게 된 이 종이는 누가 갖다 놓은 건 걸까요? 어떤 사람이 갖다 놓은 것이죠. 그 사람이 갖다 놨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우연적 존재만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연적 존재가 가능하겠는가? “누가 갖다 놓는 사람이 없이, 갖다 놓아질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이 우연과 필연으로의 증명이에요. 그럴듯합니까? 좀 그럴듯해요.

그다음 네 번째 네 번째 보면 완전의 등급으로의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의 증명 측면에서 볼 때 다양한 등급이 있어요. 어떤 것은 더 뛰어나고 어떤 것은 좀 못하죠. 예쁘고 좀 덜 예쁘고 건강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힘이 세고 약하고 키가 크고 작고 등등 모든 것이 다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것은 시험을 봤는데 100점 만점에 50점밖에 못 맞았다고 한다면, 그런 등급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데,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낫다 못하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완전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다 못하다 낫다 덜하다고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설명입니다. 그럴듯해 보여요? 예 그럴듯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질서로부터의 증명. 지능이 부족한 존재가 어떻게 움직여요? 질서에 따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거죠. 지금 강아지들인데 이 강아지들은 내가 엄마 젖을 먹어야 되겠다고 판단하고 그래서 젖을 먹나요? 아니요. 태어나자마자 젖을 찾아요. 태어나자마자 젖을 물려고 합니다. 이렇게 지능이 부족한 존재가 본성에 따라서 어떤 질서에 따라서, 목적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행동을 이미 프로그램화시켜 놓은 어떤 존재에 의해서, 그러한 본성들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어떤 짜여진 주어진 목적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질서를 부여한 존재를 가리켜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존재 증명을 5가지로 한 거예요. 이것도 그럴듯해 보이나요? 그럴듯해 보이죠.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증명들은 우리가 더 찾을 수가 있겠는데요. 이렇게 초창기에는 아주 초기 기독교 시대 때는, 사람들이 그냥 믿었어요. 그냥 하나님 계시는구나. 예수님 믿었어요. 가르쳐주면 가르쳐준 대로 믿었는데, 중세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고, 거기에 대한 답변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수도원에서 수도하던 사람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해서, 그래서 이런 답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신학의 발달이 어디서부터 이루어졌는가? 수도원에서부터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이 사실은 십자군 전쟁하고도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십자군 전쟁을 배웠잖아요?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하면서, 이 로마에 있던 그리고 유럽에 있던 그 크리스천들이 전쟁을 하러 팔레스타인 땅에 가서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이슬람과의 전쟁 십자군 전쟁이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나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이라고 얘기했나요? 잘못된 전쟁이라고 그랬나요? 잘못된 전쟁이에요. 그래서 참 역사에 참 별로 좋지 않은 그런 오점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안 좋은 것만 있었느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십자군 전쟁을 하면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이렇게 전쟁을 하면서, 이슬람 사람들과 어느 정도 교류가 이루어진 거죠. 포로로 잡는다든지 등등 뭐 하다든지 해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어떤 학문을 가지고 있었냐면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 희랍 철학자의 철학을 이 모슬렘권 이슬람 사람들이 많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서양은 플라톤 개통의 철학을 그대로 전수받은 사람들인데, 그래서 플라톤 중심의 학문만 많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이슬람교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많이 받아들인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전쟁을 하면서 그런 식으로 어쨌든 교류를 하다 보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다시 이 유럽 사람들이 발견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슬람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내용들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최초는 아니고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가운데 많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당시의 여러 가지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스콜라 철학이 스콜라 신학이 많이 발달하게 됐다. 긍정적인 면은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질문들에 대해서, 교회가 자꾸만 이런 방법이든 저런 방법이든 대답을 해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는 점은 아주 박수를 쳐줄 만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질문들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줘야 됩니까? 대답을 해줘야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많이 해줘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에서 어떻게 하냐면, 옛날에 배웠던 것들만 그냥 반복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옛날에 배웠던 그런 교리들 이런 것들이 다 좋은 얘기고 맞는 얘기고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 현재의 문제들이 막 제기가 되고 있는 그 문제들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대답을 해줘야 되는 그런 과제를 우리가 안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고 장점과 단점들도 또 있고 그래서 그 당시에 학문의 발달은 한편으로는 긍정적, 근데 이제 또 한편으로는 뭐가 부정적이냐 하면, 이제 막 쓸데없는 그런 학문적 논의 있잖아요? 촛대 위에 천사가 몇 명 앉을까? 막 이런 걸로 맞서 싸우고 다투고 하는 그런, 쓸데없는 논쟁들을 했던 것은 단점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많이 발전시켜서 후대에 교리를 정착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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