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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롬 12:1-2)

오늘 우리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살펴보게 됐는데요. 이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첫 단어가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말은 앞뒤를 어떻게 연결시켜 주는 것인가요? 논리적인 결론 격으로 말하는 것이죠.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쭉 이야기한 다음에, “그러니까 말이야” 하면서 얘기하는 거죠.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한 다음에, 그 많은 이야기들에 근거해서, “그러므로 이제는”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를 기억해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앞에서 무슨 내용이 있었죠? 다 까먹었죠? 괜찮습니다. 아무튼 로마서를 우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로마서 1장에서부터 11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것인가에 대한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설명해 왔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그게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내가 열심히 착한 일을 많이 해가지고, 그래서 완벽하게 되었을 때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율법을 열심히 잘 지켜서 완벽하게 수행해서 그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인가를 하나님 앞에 많이 드려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셔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신 그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게 만드셨고, 바로 그 주님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거저 값없이 공짜로 구원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 1장에서부터 11장까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준 내용입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떠한 우리의 노력에 따라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이제 “그러므로” 오늘 12장의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짜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결론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다음 “그러므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우리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번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그럼 어떤 결론이 나올 것인가? 두 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결론이 있다고 한다면, “그래? 그러면 그냥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겠네”라고 하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 지워주십시오.) 우리가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죠. 우리가 무엇인가 완벽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완벽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그러한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면, “그래? 그러면 내가 굳이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 없겠네. 굳이 하나님의 말씀 지키면서 살지 않아도 되겠네.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한 달 뒤면 무엇이죠?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있습니다. 11월 16일에 하나요? 지금 대학 수능이 지금 다가왔는데, 그 수능을 앞에 두고 우리 학생들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에요? 좋은 점수를 맞아야 좋은 대학에 가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만 되고, 그래야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는 겁니다. 정말 불쌍하도록 열심히 공부해요. 그런데 만일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성적순에 의해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 입학시켜 줄게.” “너는 내 아들이니까 입학시켜 줄게.” 하면 공부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공부 안 하죠. 누가 공부하겠어요? 그냥 대학 갈 수 있다는데, 그냥 좋은 대학 아무나 들여 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열심히 공부하려고 들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가 생활비를 어떻게 버는가? 그냥 누가 주는 게 아니고, 열심히 일을 하고 수고해야, 그래야 생활비를 벌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정부에서 매달 우리가 충분히 먹고살 만한 돈을 계속 공짜로 준다고 한다면, 여러분들 일하겠어요? 그냥 놀러 다니겠어요? 놀러 다닐 겁니다. 굳이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그냥 주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래? 그러면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겠네.”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만이 아니라 두 번째 반응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아까 보여줬던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만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가? 이제는 정반대로 “그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단 말이야?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그 은혜가 너무나도 놀라워서, 하나님, 이제는 내가 더러운 짓을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이제는 이기적으로 살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반응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럴 수 있나요? 그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경우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예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사랑을 다 쏟아집니다. 아프면 그 아이가 건강해질 때까지 열심히 돌봐줄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공급하고, 입을 것을 공급하고, 이 아이가 잘 되기를 위해서 노심초사하면서, 이 아이를 기르는 그 부모의 그 마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인데요. 그 사랑을 자녀들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가 학교 가서 공부 잘해야만 그런 사랑을 받나요? 내가 무엇인가 금메달을 따와야만 그런 사랑을 받나요? 아니요. 실패해도 별볼 일 없고 오히려 약하면 약할수록, 부모가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부모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어서, 내가 무엇인가 완벽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한없는 그 부모님의 그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게 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래, 부모님은 나를 무조건 사랑해 주는구나. 끝까지 우리 부모님을 내가 마음껏 이용해 먹어야지.”라고 하는 생각이 드나요? 그게 아니에요. 너무나도 고마워서 우리 부모님에게 잘해주고 싶어요. 잘 모를 때는 그냥 우리가 부모님을 속 썩인 적도 있지만, 철이 없었을 때는 우리가 그냥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을 그냥 내뱉었지만,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된 그 이후로는,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내가 아기를 낳아보니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줬구나. 내가 우리 아이를 이렇게 사랑하면서 정말 애쓰면서, 우리 아이를 길러보니까, 우리 부모님도 나를 저렇게 사랑해 줬구나.” 생각이 나서 우리 부모님이 연약해진 지금 그 부모님에게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길 원하고, 부모님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마음일 거라고 믿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서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셨으니, “이제는 주님,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고백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1번의 반응이 아니라 2번의 반응이 우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반응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악용해서,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구원파가 아니더라도 우리 정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나, 예수님 믿어. 나, 교회 다녀. 그러니까 언젠가는 구원받겠지.”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악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들을 마음대로 행하면서도, 사랑을 베풀지 않고 살고,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살면서, 미워하는 삶을 살면서도,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고,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받을 거라고 그렇게 잘못된 확신을 가지며,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리킵니까? 로마서 12장 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여기서 남자들만 들으라는 얘기인가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들어야 될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영적인 산 제물로 드려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몸을 산 제물, 살아있는 제사,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이죠? 어떻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죠? 여기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요? 우리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인가요?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몸이라고 하는 말로 우리들의 삶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라” 이 말이에요. 우리의 인생 전체를 우리들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데, 어떻게 제물로 드려라? 죽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죠?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죄의 싹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어야 마땅한데, 내가 죽어야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짐승을 대신 잡아 죽여서, 우리가 죽는 것을 대신해서 짐승이 죽게 만들고, 그래서 대신 우리의 죗값이 치러진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짐승을 잡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이 구약의 제사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죠. 왜 없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의 몸으로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죗값을 다 치러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다시는 그런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죠.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드리신 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들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 완벽한 제사를 드리셔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말하고 있는데요. 그런 이제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우리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냥 마음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인생으로 살아있는 제사, 죽이는 제사가 아닌 살아있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는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거룩한 삶을, 변화된 삶을 살아라. 이제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면서 살아라 이 말이에요. 죄 용서함을 받았으니까 이제 나는 마음대로 살아야 된다가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생각하며, 그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살아라 이 말이에요.

오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무엇이냐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가 무엇이 예배입니까? 오늘날 지금 이렇게 우리가 주일날 함께 앉아서 드려지는 예배가 예배죠. 그런데, 이 예배로 충분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아, 우리가 예배드렸으니까 됐어 우리가 이번 주일날 예배드렸으니까, 나는 예배드렸어.” 이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렇게 주일날 와서 1시간 예배드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 많은 예배가 필요하다 이 말이에요.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늘 드려지는 이 예배가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예배는 정말 중요합니다. 때때로. 그래서 우리가 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고 항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매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때를 보면 예배를 드리고, 나도 내가 예배드린 것에 대한 감흥이 없을 때가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있나요? 대답을 안 하셔, 그럴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예배에 참석했는데 설교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도 않고, 예배에 참석했는데 아무런 마음에 뜨거움도 없고, 어떤 예배는 그냥 잠만 자다 간 것 같고, 어떤 때는 그냥 온갖 복잡한 생각 때문에 그냥 예배의 몸뚱어리는 와 있지만, 그냥 의미 없이 그냥 흘러간 것만 같은 때가 있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내가 도대체 이 자리에 왜 와 있나?” 생각될 정도로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정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예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양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밥 먹다 보면 밥이 항상 맛있나요? 맛이 없을 때도 있나요? 입맛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나요? 없을 때가 있죠. 저는 항상 맛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밥을 먹는데 어떤 때는 식욕이 떨어져서 먹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내가 이거 참 먹고 싶지 않다 이렇게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매일 식사를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일매일 밥을 먹고 식사를 해야, 그게 우리들에게 육신의 에너지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렇죠. 먹기 싫어도 먹어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병원에 가서 밥 먹으려면 밥이 잘 안 들어가는데, 그래도 먹어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그래야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이고 밥이 보약인 것이고, 그래야 내가 힘을 내서 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도 마찬가지 예배도 때로는 어떤 때는 재미가 없는 것 같고, 때로는 어떤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예배를 사모하고 주님 앞에 나와야 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 시간이 중요하기는 한데, 그런데 오늘 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배가 무엇인가? 우리가 모여서 드리는 이 예배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 나가는 게 예배다 이 말이에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는 우리들의 전 삶이, 우리들의 모든 시간 하나하나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 삶을 살게 될 때, 그게 진정한 예배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개념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새로 생긴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번제를 드려라 희생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번제를 그냥 드려버리기만 하면 됐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그 관심사가 뭐겠어요?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이 제사를 드리는 자가 얼마나 값비싼 좋은 제물을 드렸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라보시는 건가요? 아니요. 하나님은 그게 상관이 없어요. 양을 드렸느냐? 소를 드렸느냐? 비둘기를 드렸느냐? 얼마나 가치 있는 걸 드렸느냐? 그게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그 사람이 동요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느냐?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는 심령으로 나왔느냐?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죠. 회개의 제사를 드리면서 마음에 통회하고 자복하면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결단하면서,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런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 앞에 죄 지었으니까, 그냥 좋은 제물 드리고, 또 나가서 또 죄 짓고 또 악한 일하고, 또 형제 미워하고 또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남의 것을 탈취하고 악한 짓을 계속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번제를 드렸으니까 됐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 제사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 나는 그거 싫어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상하고 회개하는 심령을 원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시편 51편 16절, 17절의 말씀에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서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울면서 통회하며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다시 받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고 나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불신자들, 우리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구역질 난다고 말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우리도 사실 내 자신이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증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에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아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살아있는 제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일주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삶이, 직장에서의 삶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없이 우리들의 삶은 완전히 내팽개쳐버린 채 우리들의 가족 가운데서, 우리들의 이웃과의 관계 가운데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미워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누구에게 하듯 하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누구에게 하듯 하고?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사람으로 보지 말고 누구로 봐야 됩니까? 주님으로 봐야 됩니다. 옆에 사람 한번 쳐다보세요. 주님으로 보셔요. 주님으로.

우리가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는 예배 시간에 정말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서 예배에 나오는 모습들을 봅니다. 교회에 올 때 그냥 대충 하고 나오시는 분 계신가요? 없어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 보면 교회 나올 때 어떻게 하고 나오시냐면 정말 최선의 모습을 하고서 교회 예배에 나오세요. 왜 그래요? 왜 그래요?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가지 예배하러 가니까, 그냥 함부로 갈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에 나의 가장 좋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어디서도 나타나야 된다는 말이에요. 24시간 일주일 내내, 평상시에 다 나타나지. 내 남편을 바라볼 때, 아내를 바라볼 때, 우리 자녀를 바라볼 때, 우리 이웃을 바라볼 때, 그 누구를 바라볼 때 그 모두를 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듯이, 내가 하나님 앞에 서듯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길이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보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의 예배가 모든 삶의 구석구석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제사로 드리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제사는 원래 어떻게 드리는 것이죠? 죽여서 드리는 것이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죽이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철저한 그 헌신처럼 우리를 죽이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상태로 살지만, 그러나 내가 죽음을 무릅쓴 것과 같은 그런, 힘든 결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죠? 왜 우리가 그렇게 거룩한 삶을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 위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먼저 받았기에 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우리의 모든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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