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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송이 같은 말 (잠 15:23-24)

오늘 우리가 잠언서 15장 23절, 24절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먼저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대답하게 되는 것에 따라서, 기쁨을 얻게 된다. 사람의 대답이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 “기쁨을 가지게 만든다”라고 하는 말씀인데요. 누가 기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대답하는 사람이 기쁨을 얻게 된다는 얘기입니까? 그 대답을 듣는 사람이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일까요? 듣는 사람이요? 말하는 사람이요?

원문을 한번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원문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입술의 대답으로 사람에게 기쁨이 있고,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어 원어의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 좀 동사가 잘 안 보이죠? 하지만 충분히 어떤 동사의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넣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입술의 대답으로 사람에게 기쁨이 생기고, 그리고 그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 그의 입술이라고 했을 때, 그의 입술은 누구의 입술이겠습니까? 사람의 입술이겠죠. 그러니까 사람이 그 입술로 대답을 하는 것이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고 하는 것이니까, 원문으로 보면, 누가 기쁨을 갖는 것인가? 아마도 대답하는 사람이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그러나 여기서 사람이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그런 개념으로서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냥 듣는 사람이든 말하는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기쁨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대답을 하게 되면, 그 대답하는 것을 들은 그 사람이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또 그 대답을 들은 사람만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한 사람도 기쁨을 가지게 될 거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대답하면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주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대답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대답이 있어야 될 텐데, 대답이 없어요. 특별히 우리 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말하면 아주 예쁘고 해맑은 목소리로 부모가 부모와 대답을 하고, 부모에게 말을 하고 대답을 하고 반응하던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런 우리 아이들이었는데, 그 아이들이 사춘기로 들어가면서 입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물어도 대답을 안 하고, 대답을 하더라도 정말 귀찮다는 듯이 마지못해 아주 간단한 대답만 해버리는 그런 우리 자녀들을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 사춘기 아이들 또래를 보면, 자꾸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고, 아이들의 대답이 사라져 버린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대답을 안 하는 걸까요? 우리 사춘기에 우리 청소년들이 왜 말을 하면, 무시해 버리고 씹어버리고, 대답하지 않고, 그렇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나이 또래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당연한가요?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지만, 제가 미국에 살면서 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같은 청소년 시기의 아이들인데도, 대답을 안 하는 아이들이 없고, 아주 해맑고 아주 부모와 대답을 대화를 주고받으며, 해맑게 아주 행복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지내오다가, 한국에 와서 우리 아이들이 사춘기 시절에 입을 꽉 닫아버린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충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왜 우리 한국의 아이들은 그 청소년기가 되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입을 닫아버린 것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해맑고 밝았던 그런 우리 아이들이 그 사춘기 연령대로 성장하는 그 과정 가운데, 우리 기성세대로부터 어른들로부터 여러 가지 상처를 받아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무시할 뿐이고, 나에게 전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일들을 계속해서 또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하고 하면서, 내가 말해보았자 우리 부모님은, 우리 선생님들은, 우리 어른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고, 말해보았자 입만 아플 것이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에 그 입을 닫아버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해결책이 있을까요?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지금 된 아이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정말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해결책이 있다고 한다면, 어려서부터 정말 1살, 2살, 3살 이때서부터 우리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을 우리 어른들이 배워야 합니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아이들과 대화해야 하는 것이죠. 집안의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아이들은 아는 게 없고,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정의 대소사에 전혀 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고 소외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집안의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사소한 것에서부터 아주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부모와 자녀들이 마음을 열고서 그 문제에 대해서 같이 대화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말하는 것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주고,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님이, 우리 어른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구나.”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심어주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 내가 아파하고 있는 것을 우리 아빠 엄마가 알고 있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아이들을 무시해 버리고, 모든 대화에서 배제시켜 버리고, 아이들이 조금만 이야기하려고 하면, 네가 뭘 한다고 하냐고 하면서, 네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라고 말해버리고, 아이들이 말하게 되면 왜 참견이냐고 하고,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무시하면서, 아이들을 윽박지르게 될 때, 우리 아이들은 입을 계속해서 닫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우리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많이 늦었지만, 그리고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더 크게 어려운 것이겠지만, 지금이라도 계속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저는 미국에 있으면서 보니까,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말하면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시끄럽다고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네 생각은 그렇니? 아, 내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무나도 좋은 생각인데 하면서, 그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그리고 네가 한번 더 얘기를 해봐라. 네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니? 하면서 아이들의 말을 자꾸만 인정해 주고, 그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내가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에도 아이들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시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참 많은 것을 생각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어떠한 비즈니스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디에 계약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냥 나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네 생각은 어떻니? 내 마음은 어떻니? 하면, 그 아이들이 정말 하찮은 것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그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앉아 있으면 대화의 자리에 있으면, 아이들이 입을 닫아버리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화에 다 끼어들어서, 온 가족이 어른부터 할아버지서부터 꼬마 아이에 이르기까지 다 같이 이야기하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게 될 때 말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냥 위에서 눌러버리고, “시키는 대로 해. 무조건 따라 하기만 해” 하면서, 아이들을 윽박질러 버리게 될 때, 우리 아이들이 입을 닫아버리면서, 부모는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점점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무시하고 소리 지르고 분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늘 우리 아이들을 대화의 파트너로 생각하고, 정말 중요하게 존중해 주고, 아이들이 꼬마 아이가 아니라, 정말 인격체로서 받아들여주는 그런 훈련들이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해와야, 그래야 대화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윽박지르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강요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전혀 존중해 주지 않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이야기해도, 그건 안 돼. 이거 먹어. 그러고 이 옷을 입고 싶다고 그래도, 그건 안 돼 하고 저 옷을 입게 만들고, 아이들에게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렇게 지내오는 과정 가운데서, 아이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이제 청소년기가 되면 모든 면에 있어서, 이제 조금씩 조금씩 반항을 하게 되는 것이죠. 신앙에 있어서 반항을 하게 되고, 생활에 있어서 반항을 하게 되고, 입을 닫아버리고, 무슨 얘기를 해도 듣지 않는 그런 모습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늦었어요.

이미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하면, 그것을 다시 원상 회복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죠.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 주고, 아이들이 정말 허접한 것 가지고 놀고 있으면, 그런 장난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같이 게임도 하고, 게임을 못하면 네가 얼마나 점수 많이 냈니? 아이 잘한다. 격려도 해주고, 아이들의 그 관심사에 귀 기울여주고, 아이들이 어떤 케이팝 가수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좋아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고, 이해해 주고 그 아이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 자녀를 제일 많이 사랑하는 자가 바로 부모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꾸준히 매일매일매일 그것을 해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미 청소년기에 들어가면, 이미 닫혀진 입은, 한 번 닫혀진 이은 더 이상 열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오늘 세대에는 대답이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걸로 대답을 하는데요. 무엇으로 대답을 하죠? 문자로 대답을 하고 카톡으로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단체 문자나 단체 카톡을 보내는 것은 공해처럼 느껴져서 굳이 답변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문자를 보내서 무슨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대답해 주는 것, 말로 대답하는 것, 문자로 대답하는 것, 그 어떤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해 주는 것이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그 기쁨이 듣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사실은 역으로 대답하는 자에게까지도 동시에 기쁨이 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나 하면 다 좋은 것인가? 아무 대답이나 하면 다 기쁜 것인가? 그게 아니죠. 오늘 잠언서 15장 23절을 다시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는데요.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해놓고, 그다음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그러니까, 아무 대답이나 하면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하긴 하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말하는 그 대답이 아름답고, 그 적절하게 하는 그 대답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고, 그 기쁨을 준 그 기쁨이 또 나에게까지 돌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말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때에 맞아야 된다는 것이죠. 경우에 맞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무조건 옳은 말만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때에 맞아야 되는 것인데, 때에 맞지 않게 되면 기쁨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서 25장 11절 말씀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말은 다 이쁜 것이 아니라, 말은 다 기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합당할 경우에만, 기쁨을 가져오는 것이고, 경우에 합당한 말이 기쁨을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도 마찬가지예요. 설교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까, 어떤 주제로 설교해도 다 괜찮은 것인가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 청중과 그 상황과 그 타이밍에 적절한 메시지를 전해야 그게 은혜스러운 것이고, 그게 기쁨을 주는 것이지, 그냥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냥 어느 상황에든지 그냥 무조건 전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항상 누가 이 메시지를 듣는가를 고려하셨어요. 그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그 여인을 향해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해 주셨지만, 그 메시지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하지 않으셨어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하고 계신 그 주님께서 왜 똑같은 말씀을 해주지 않는가? 대상이 다르면, 경우가 다르면, 그것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가 아닌 것이고, 경우가 맞지 아니하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잘못된 말씀이고,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케 만들고,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늘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맞는 말이기 때문에, 어떠한 형편이든,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냥 말해버리면 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정당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경우에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그게 아름다운 말씀이고, 기쁜 말씀인 것이지, 경우에 합당하지 아니한 말씀은 그것이 아무리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름답지 못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40일 동안 금식하셨던 예수님에게 나타나서 사탄이 했던 말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사탄의 말을 예수님에게 들려준 것이 아니라, 사탄은 놀랍게도 성경 말씀을 그대로 낭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해 준 거죠.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네가 만일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해서 내 발을 상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메시지가 아닌 겁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 말씀은 그 상황 가운데서 전해져야 될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은 정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신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고난을 당하고 있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인 것이죠. 정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런 참된 성도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그냥 내 팽개쳐주지 않고 보호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지, 그냥 저 성전 꼭대기 위에서 그냥 뛰어내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그냥 뛰어내려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었던 것이죠.

잘못된 상황 가운데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100%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옳은 말이 아니고, 사탄의 말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악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 강단에서, 그리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일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 엉뚱한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십계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을 너무나도 자주, 너무나도 뻔뻔하게 어기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메시지는 결코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닌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에게 했던 그 말들은 다 잘못된 말을 욥에게 한 것일까요? 세 친구들이 했던 그 말들은, 그것은 옳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전혀 우리가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고 갖다 내버려야 되는 사탄의 말을 이 욥의 새 친구들이 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새 친구들의 말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서 이미 하셨던 그 말씀들이에요. 성경 말씀, 그 가르침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욥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죠. 잘못된 상황 가운데서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주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하와이에서 불이 나서 엄청난 재난을 겪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관광객들이 와서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스노클링을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와이 주민들이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 있었는데요. 원래 하와이라고 하는 것은 관광지이고, 우리 마을로 놀러 오라고 그렇게 선전을 많이 해서 갔던 것인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지금은 슬픔의 때였기 때문이죠. 지금은 재난의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너무나도 지혜롭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상대방의 상황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냥 맞는 말만, 하나님의 말씀만 그냥 막 뿌려대서 마치 소금을 상처에 뿌리듯이,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아픔 가운데 몰아넣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대답을 하여서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이고, 그러나 더더욱 기도해야 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때에 맞는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그리고 정말 우리가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정말 아름다운 경우에 합당한 말들을 해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기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참 어리석어서 내가 말한다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주고, 나는 좋은 뜻으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그리고 오히려 더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참 좌충우돌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하나님,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지혜롭게 말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정말 따뜻한 말로 위로의 말을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될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사람들의 말 때문에 시험 들었다고 말하고,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을 중단하게 되기도 하고, 교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센스를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런 지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공감하는 마음. 상대방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돼야 되는 거죠. 공감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이죠.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100% 변하게 되면 그게 공감이죠. 공감이 100%가 돼야, 그래야 우리들의 말이 지혜롭게, 때에 맞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 공감 능력을 길러야 하는, 길러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수가 있겠는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인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너무나도 간단해요. 내가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원하는 그 방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내가 그렇게 듣기 원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에 말씀해 주신 행동의 원칙이고, 그 원칙을 우리가 가지게 될 때, 공감 능력이 있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가 경우에 합당한 말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들을 우리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저 입장이라고 한다면 무엇일까? 누군가 실수했다고 한다면, 그 실수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화를 내고, 그리고 그 사람을 비난하는 그런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내가 실수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어떻게 되었을까? 왜 실수를 하게 되었고, 내가 그 실수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슨 소리를 들어 듣기를 원하는가? 그 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을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실수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되고,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의 그 마음의 상태로 우리가 들어가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공감하고,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할 것인데요.

공감을 했는가 공감을 하지 못했는가를 측정할 수 있는 그 바로메타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 가운데 어떤 감정이 드는가? 분노의 마음이 생기는가? 화가 나는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그러면 아직 나는 그 사람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측은하고 불쌍하고, 참 여러 가지로 참 안 됐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면 그러면 우리는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분노 가운데, 화가 나서, 열받아서 있는 상태라고 한다면, 그때 나오는 대답은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대답이고, 때에 맞지 않는 대답이고, 그런 대답으로서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 자신도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면서 계속해서 악순환의 고리를 타면서 너무나도 힘들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이 분노했는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지근한 마음과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측은한 마음을 갖기보다는. 늘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내 입장에서만 분노하고, 그래서 함부로 말해버리는 그런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우리들의 죄성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의 십자가 앞에 또다시 엎드리고, 또다시 엎드려서, 주여 저희들의 완악한 마음을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공감할 수 있는 마음,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이해하고 그리고 경우에 합당한 바른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솟아 있다고 한다면, 화가 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여 도우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2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정말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말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생명길로 향하게 되는 것이고, 그 스올의,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주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니고 서로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때에 맞는 좋은 말, 경우에 합당한 말들로 대답해 주고, 그래서 기쁨을 주게 만들고, 그래서 자꾸만 사랑의 물들을 우리 주변에 뿌리면, 그러면 우리 주변이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날아드는 그런 에덴동산과 같은 곳으로, 우리 주변이 변하게 되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겠지만, 계속해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우리 부모님을 향해서도 마음을 닫아버리고, 친구들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교우들을 향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저 정죄하면서 비난하고 욕하고, 그러면서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말들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계속해서 해 나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 주변을 마치 광야와 같은 곳으로, 사막과 같은 곳으로 만들어버려서 결국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다 우리를 떠나게 돼버리고,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이 외로운 섬에 그냥 혼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광야 한가운데 나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이유는 내가 주변에 사랑의 물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말들로 계속해서 사람들을 쫓아내 버렸기 때문인 것이죠. 지혜로운 자라고 한다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선택, 기쁨을 주는 대답, 말 그 꿀송이와 같은 말들로써 우리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고 또한 우리가 행복해지는 그런 기쁨의 삶을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많이 늦었죠? 많이 늦었어요. 지금까지 너무나도 힘들게 살아왔어요. 너무나도 실패를 많이 하면서 살아왔어요. 우리가 어리석어서, 바른 선택이 아니라 꼭 나쁜 선택만 하면서 살아왔어요.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어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다시 한번 새롭게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는데 오늘 이제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서 이제는 다시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말 경우에 합당한 말 때에 맞는 말로, 우리의 이웃들의 마음에,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우리 부모님의 마음에, 함께 동역하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경우에 합당한 말들을 함으로써 사랑의 물을 뿌릴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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