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 (잠 15:20-22)

오늘 읽은 말씀 잠언서 15장 20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당연한 말씀이죠. 자녀가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하면, 자녀가 슬기롭게 행동을 하면, 그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기쁠 것입니다. 너무나도 좋은 것이죠. 자녀가 미련하고 어리석게 행동한다고 하면, 참 마음이 아프고, 참 괴로울 것이지만, 그러나 자녀가 지혜롭게 슬기롭게, 자신의 앞길을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하면, 부모로서는 너무나도 기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교회에서 톡투유를 했는데, 우리 청년부로 하여금 톡투유를 한번 진행해 보라고 부탁을 했는데, 참 지혜롭게 모든 것을 잘 행하는 그 모습을 볼 때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아, 참 대단하구나! 우리 청년들이 참 훌륭하구나! 참 지혜롭게 모든 것들을 잘 준비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정말 제 마음에 엄청난 기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셨나요? 좋았죠? 우리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청년들을 보면서, 마치 우리 자녀들을 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잘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나도 기뻤던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자녀들이 지혜롭게 행동한다면, 슬기롭게 행동한다면, 부모로서는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미련한 자녀가 있다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근심 가운데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지혜로워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인데요. 어떻게 하면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슬기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서 20절 하반절의 말씀이 힌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만 업신여기겠습니까? 아버지도 같이 업신여기겠습니까? 다 업신여기겠죠? 다 말을 안 듣고, 무시하는 거겠죠. 오늘 20절 말씀을 우리가 가만히 보면, 슬기로운 자식은, 슬기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즐겁게 한다고 얘기하고 있고, 미련한 자는 어머니를 업신여긴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아버지만 즐겁고, 어머니만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한번 설명드렸던 것처럼,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서, 두 개의 문장을 서로 같이 연결시켜서 해석해야 되는 겁니다.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혜로운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하게 되겠지만, 미련한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를 모두 다 업신여겨버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왜 미련한 자인가? 20절 하반절에서는 말하기를, “어머니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위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에서 충고를 하고, 바른 길로 가라고 교훈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래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있지만, 미련한 자는 부모의 말을 업신여기고, 무시해 버리고, 듣지 아니하면서 미련한 길로 가게 될 때, 부모의 마음은 근심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혜롭게 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지혜로워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무슨 말씀입니까? 미련한 자는

그 어리석은 일을 계속한다는 겁니다.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계속 즐겨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 어리석은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인데요. 왜 미련한 자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즐겨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모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데, 그 부모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자녀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들어 있기 때문인 것이죠. 아직 자기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부모보다 더 많은 인생을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이 최고인 것인 양, 자신의 생각이 전부인 것인 냥. 부모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그저 미련한 짓을 계속해서 반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연약해서 늘 실수도 있고, 여러 가지 계획에 차질을 빚을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지혜로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실수했다고 한다면, 잘못 잘못된 길로 한번 갔다고 한다면, “아, 이게 잘못된 것이구나.”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구나.” 깨닫고 자신의 길을 수정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죠. 미련한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부모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고를 함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고 수정하지 않고,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그 미련한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아주 미련한 무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완벽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실수할 수 있어요. 넘어질 수 있어요. 여러 가지 부족함이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러나 잘못된 것을 행했을 때, 그러지 말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권고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행위를 고치고 바꿀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아주 간단한 겁니다.

사람은 완벽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완벽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일을 지혜롭게 행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를 슬기롭게 행할 수 있겠는가? 자기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듣고 고쳐 나가는 것이죠. 내 고집대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이야기하면 그 부모님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사람들이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수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2절 말씀에서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생각을 모으고,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지략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모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만들어 간다고 한다면,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모으지 아니하고, 그냥 독단적으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즉흥적으로 모든 일을 해 나간다고 한다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고, 같이 논의해야 되는 것이고, 머리를 맞대야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한 가정도 마찬가지고, 어느 한 공동체도 마찬가지고, 국가를 경영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잼보리가 파행으로 치달았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뉴스를 듣게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들으셨습니까? 너무나도 속상하죠. 우리나라에 이 세계적인 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것도 우리 지역에서 열리게 됐는데, 이것이 파행으로 치달았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될 때,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저 더워서 고생하고 있는 우리 잼보리 청소년들에게 얼음물이라도 좀 갖다 줬으면 좋겠다 싶어 가지고, 전주시 기독교 연합회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회장님, 목사님, 우리가 좀 물이라도 갖다 줍시다.” 해서 지난 월요일 갖다 주고 왔어요. 갖다 주고 왔는데, 아무튼 이 잼보리가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지도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문제가 생겼으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모으고, 생각들을 모으고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모든 것을 고려한 다음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 지도자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그냥 자기가 아는 지식 선에서 이야기해 버리고, 그것을 지시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더 문제가 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지금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지금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서 문제가 터졌는가?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서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바른 진단이 되는가? 그것을 서로 다양한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서,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함께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문제가 100% 완벽한 게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하다 보면 실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고, 계획대로 안 되는 것도 있고,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고, 많은 것들이 발생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그것을 그냥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의논하면,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면,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이고, 잘못되었던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결과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의논이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하면 안 될까? 저렇게 하면 안 될까? 그냥 즉흥적으로 대책을 발표해버리고 만다면, 그러면 더 큰 혼란만 가중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의견이 있어야, 서로 의논해야 모든 일이 제대로 잘 돌아간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되는가?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니까, 제갈공명과 같은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말한 대로, 한번 잘 됐으니까, “무조건 이 사람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되겠다”라고 하면서,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사안마다, 사건마다, 문제마다, 각각의 특성이 다르고, 현실이 다르고, 모든 요소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을 들어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인데, 이거 하나 잘 맞춘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모든 일들을 결정해 버린다고 한다면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것이죠.

특별히 사람들은 자기의 입장에서만 말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말할 때는 객관적이고 충분한 타당성이 있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기에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을 말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 것이죠. 일하기 싫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일하지 않게 만들까를 설득하기 위한 대책들을 내놓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돈을 많이 빼먹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가능한 쪽으로 이야기들을 할 겁니다. 따라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한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타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람이 이기적으로, 또 그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어서 잘못된 주장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우리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되는 것이죠. 병원에 갈 때도 어떻게 가야 돼요? 이 병원에서 “당신 수술해야 됩니다” 하면, “아, 그래요? 수술합시다.” 그래야 되나요? 그게 아니고 다른 병원에도 한 번 더 가봐야 돼요. 왜 그렇죠? 수술합시다 말하는 그 병원이 최근에 수술 기계를 비싸게 도입해서 본전을 뽑아야 되니까, 그 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는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에 어떤 유명한 병원이 서울에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만 가면, 암 진단을 받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다 암의 진단을 받아서, 다 입원하고, 다 암 치료를 받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까 순 엉터리예요. 그냥 환자들을 다 암 환자라고 얘기해 버리고, 그렇게 해서 그냥 가짜 암 환자들을 많이 만들어내서, 수술을 많이 하려고 했던 병원이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에 발각이 돼가지고, 그게 뉴스로 한번 크게 난 적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모르세요? 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만든 식품회사가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어느 식품 회사인지 개인적으로 물어보세요.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왜 저런 얘기를 할까?”를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의 주장일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들을 때,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의논을 하고, 그리고 지략을 모으고, 그래서 무엇이 바른 길인가? 판단하면서, 제대로 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아무튼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모든 일들을 바르게 처리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종종 입을 막아버리고, 나쁜 말을 못 하게 하고, 그래서 칭찬 일변도의 말만 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등장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서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논이, 의견들이 많아야, 그래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것인데, 잘못된, 비판적인 이야기들은 다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억압해 버리고, 불리한 것들은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오로지 듣기 좋은 이야기들만 듣기 시작한 한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그 사람은 지혜롭지 못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지혜로워질 것인데, 결국은 한쪽 이야기만 듣게 되는 결과, 그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어떤 사람인가? 지혜로운 부모는 아이들이 말하는 것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부모가 지혜로운 부모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입을 닫아버리고, “우리 아빠한테는 이야기해 봤자, 아무 말도 통하지 않아. 우리 엄마한테는 이야기해 봤자, 씨알도 안 먹혀.” 그러니까 그 입을 닫아버리고,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들로 만들어 버리면, 그러면 그 가족이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어떤 부모님이냐? 내 생각을 무조건 자녀들에게 강요해서, 아이들이 순종 잘하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지혜로운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아이들의 고민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서, 그 여러 가지 말들을 다 들어볼 수 있어야, 열린 귀를 가진 부모가 지혜로운 부모일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내 생각과 내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의논과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무엇이 바른 길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은 타고나는 것처럼 생각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 지혜로움의 차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가? 아니면 귀를 닫아버리고 아집을 부리고, 고집부리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귀를 닫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발이라고 하는 부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양털을 깎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사람들을 보내어서, 그 잔칫날, 정말 기쁜 날 먹을 것을 좀 얻어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그 말을 듣고 다윗을 모욕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찌 내 떡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나누어줘야 되느냐? 요즘 주인에게서 떠나버린 도망친 그런 종이 많다고 하면서, 다윗을 비난해 버린 것이죠. 그냥 자기 생각으로, 다윗을 비난해 버리기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그 나발은 자신의 종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종들은 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인이시여, 다윗은 우리를 선대해 주었고, 그동안 우리가 양을 치는 가운데, 다윗이 보호해 주어서, 우리가 다치거나 이런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를 위해서 담이 되어 주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양을 잘 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양을 잘 칠 수 있었다고 종들이 그 여주인에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나발은 들을 수 없는 겁니다. 듣지 않는 겁니다. 종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닫아버리고, 그리고 독단적인 생각으로 다윗을 비난하고, 욕하면서, 결국은 그 나발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적이었던 자의 어리석음, 그 나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귀를 닫아버린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합 왕입니다. 아합 왕은 어느 날 아람 나라와 전쟁을 하러 가야만 했었습니다. 전쟁을 하러 갈 때, 과연 이 전쟁을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원하시는가? 원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불렀는데요. 어떤 선지자를 불렀냐면 자기에게 지금까지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선지자들을 부른 거예요. 다 거짓 선지자들인 것이죠. 그 거짓 선지자들을 불러서 이야기하니까, 그 거짓 선지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왕이시여, 전쟁하러 나가십시오. 전쟁하러 나가면,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나가십시오.” 모두가 다 아첨하는 말만 하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모아놓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죠. 그러자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다른 선지자는 없습니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다른 선지자가 없습니까?” 그랬더니 이 아합 왕이 하는 얘기가, 선지자가 한 명 더 있기는 있는데, 그가 누구예요? 미가야 선지자라고 한 명 더 있는데, 이 선지자는 나한테 늘 부정적인 얘기만 한다고, 늘 나쁜 얘기만 한다고, 그래서 이 선지자만 보면, 기분이 나빠 죽겠다고 안 부르는 거예요. 듣지 않고 싶다는 거예요. 결국 데리고 와서 얘기를 하는데, 얘기해도 안 들어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통해서 아합 왕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그 경고의 말을 듣지 않고, 전쟁하러 나갔다가, 결국 그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성경에 보면 듣지 않아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저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만 해주는 이야기만 듣다가 망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지혜로운 것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어서 정말 진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아무 말이나 다 들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죠. 말에는 진실도 있을 뿐만 아니라, 거짓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말을 들을 때 말을 무조건 듣고 말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 말이 조언이 과연 좋은 조언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어떤 사람은 “전쟁하러 가도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하러 가면 안 됩니다”라고 조언을 해주었을 때,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다 마음을 열어놓고, 다 들으면서 이것을 분별해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변의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향해서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시어,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한다면 분명히 결박당할 것이고,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서 안 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갔어요. 이것은 독단적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안 듣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독단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아예 고려도 안 하는 사람의 태도와 바울의 테우도와는 좀 다른 것이죠. 바울은 그 사람들의 말을 받았어요.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잡힐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들었어요. 그리고 그 들은 것을 보면서 결정하기를, 그런데 이러한 위험이 있어도 내가 가야만 할 것인가?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지 말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분별하기 시작했고, 내가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겠다고 결정을 한 것이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마음과 내 뜻대로 그냥 독단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다 들어보아야 하고, 또 그것에 대한 만반의 준비도 해야 하고,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또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면서, 그래서 마음이 열린 상태에서 결정을 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듣는다고 하는 것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줏대 없이 따라다니는 것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논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들어볼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 안에 있는 교만함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죄성이 있어서, 겸손하게 사람들의 말을 듣기보다는 교만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해 버리기가 쉬운데, 특히 바른말이라고 하면, 더 무시하기 쉬운 그런 죄성이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앞에 나아가서, “주여, 저희들의 마음을 씻겨 주셔서 죄를 씻어주시고, 교만한 마음을 벗겨주시고, 겸손하게 해 주셔서, 지혜로운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는 가운데 더욱더 지혜로운 삶,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는 삶,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