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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책 (잠 15:10-12)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1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오.” 도를 배반하는 자가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해 주고 있는데요. 도대체 도를 배반한다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도를 배반한다? 우리가 종종 이 “배반한다”라고 하는 표현을 쓸 때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그룹에 대해서 배반한다고 하는 표현을 쓰죠. 우리 편을 배반했다든지, 아니면 나를 배반했다든지,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배반했다”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 오늘 잠언서 15장 10절 말씀에서는 도를 배반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도대체 도를 배반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이 도를 배반하는 것이 되는 것인지, 그 의미가 약간 애매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어 원문을 한번 들여다봐야 되겠죠?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을 한번 살펴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를 배반한 자에게”라고 하는 번역을 했는데, 그 말이 무엇이냐면, “길을 떠나는 자에게 심한 징계가”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반한다”라고 번역을 했지만, 사실은 그 동사의 의미가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에서부터 떠나는 것, “길에서부터 떠나는 사람은 엄한 징계, 심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어떤 길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른 길이겠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기를 원하시는 길에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기를 원하는 길이 있고, 우리로 하여금 가지 말기를 원하는 그런 곳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기를 원하는 그 길에서부터 떠나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징계가 있을 것이다. 아주 엄한 징계, 심한 징계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서 15장 10절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로 걸어간다고 한다면, 그 길은 안전할 것이고, 그 길로 가면 행복할 것이고, 그 길로 가면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지만, 그 길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걷기를 원하게 만드신 바로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빠져버린다면, 그 길을 떠나버려서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아주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을 생생한 예로 비유를 하자고 하면, 기차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차는 어느 길을 달립니까? 선로를 달리는 것이죠. 기차가 다녀야 할 그 선로를 깔아놓고, 그 선로 위로 달리면 빨리 갈 수 있고, 안전하게 갈 수 있고,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종 기차가 그 레일에서부터 탈선했다고 하는 그런 끔찍한 뉴스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기차가 탈선하에 버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끔찍한 뉴스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런 그림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기차가 레일 위에 있으면 안전하고 빠르고,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는데, 그 레일에서 벗어나게 되면, 뒹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완전히 박살이 나고, 그리고 모든 것이 재앙으로 돌변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인생도 마치 기차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걸어가기를 원하는 그 길이 있고, 바른 길이 있는데, 그 바른 길에서부터 떠나는 자는 결국 엄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잠언 15장 10절의 말씀을 오늘 우리들이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싶어 하는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런 엄한 징계를 받게 된다면, (우리가 바른 길로 계속 달려가야 되겠지만, 다른 길에 서 있어야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들은 종종 그 바른 길에서부터 벗어날 때가 있는 겁니다. 그 바른 길에서부터 떠날 때가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유혹에서부터, 떠나게 되는 그 유혹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바른 길에서부터 떠날 수 있는 유혹에,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만일 그렇게 떠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래서 결국 심한 징계를 받는 일을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빨리 깨닫고, 징계를 받을 때에 빨리 깨닫고 돌이켜서, 다시 원상 복귀를 하고 바른 길로 돌아와서 우리들의 삶을 교정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오늘 잠언서 1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잠언서 15장 10절 말씀을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잠언서 15장 1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즉 길에서부터 떠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오.” 그런 엄한 징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징계, 견책을 싫어하고, 그 견책을 어 거부하고 싫어하는 자는 어떻게 될 것이다? 죽게 될 것이다. 엄한 징계를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징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징계와 견책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견책을 달게 받아들여서, 우리들의 삶을 교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길을 떠나 있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엄한 징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길에서부터 떠나 있을 때, 엄한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인데, 그 엄한 징계가 무엇인가? 견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을 수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엄청난 아픔을 당할 수가 있겠는데, 그러한 견책들이 그러한 징계들이 사실은 우리를 박살 내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죠.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혼낸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 부모가 자녀들을 징계한다고 한다면, 그 징계는 자녀들을 박살 내버리고, 인격을 무시해 버리고, 다시금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밟아 버리기 위해서 징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징계의 목적은 살리기 위한 거예요. 이 아이가 이쪽으로 가면 안 되고 이쪽으로 가면 망할 것만 같기 때문에,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징계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징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만나는 그 징계는 무엇인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면,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은혜요, 축복이요, 나를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기억하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서 징계를 받으면, 그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징계를 볼 때에 징계를 만나게 될 때, 그것을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교정하고,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시 복된 길로 가는 것이고 바른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징계를 받을 때에 오히려 불쾌해하면서, 오히려 분노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고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악한 길로 간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징계는 아직 우리를 죽이지 않았지만, 우리를 살리기 위한 징계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징계를 달게 받지 아니하고, 기회로 삼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을 지속하게 된다면,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바른 길로 가지 아니할 않을 때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징계를 받는 것을 싫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달갑게 여기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징계를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견책을 싫어한다고 하는 얘기는 그 견책받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어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질병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몸 가운데 아주 커다란 암덩어리가 놓여 있다고 한다면, 수술을 통해서 그 암 부위를 제거해 내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암덩어리가 있는 그 부분을 잘라내게 되면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수술을 받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내버려 두게 되면 결국에는 큰 문제를 당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의 육신도 그러할진대, 우리의 영혼은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징계의 수술이 있다고 한다면, 그 수술대 앞에 우리를 내어놓고,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며, 우리의 죄악 된 부분들을 도려내고 의의 길로, 바른 길로 돌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견책을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할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징계를 내려주신다고 한다면 감사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될 텐데, 오히려 싫어하면서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징계를 받아들이고, 그래서 자신을 돌아본다고 한다면, 소망이 있을 텐데, 왜 사람들은 그 징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해 버리는가? 교만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지혜의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겁니다. 잠언서 16장 18절 말씀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오.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교만해버리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앞에서 겸손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그 사랑의 징계가 있을 때 회개하지 않는 것이죠. 내 맘대로 하는 것이죠.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마치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 사람들 가운데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말을 해도 전문가가 말을 해도 귀를 딱 닫아버리고 전혀 꿈쩍도 반응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건강을 망친다고 이야기를 해도 교만한 자는 결코 듣지 않아요. 그렇게 듣지 않는 것은 자유일 수 있겠으나, 결과는 결국 심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길에서부터 떠나는 것은 무엇이 떠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에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를 배반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도에서 떠난다고 하는 것을 “행위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도에서부터 떠났는지 떠나지 않았는지, 우리의 행위가 나타나면 그때서야 우리가 행위 도에서부터 떠났는지 떠나지 않았는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의 행동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 떠나나요? 마음이 먼저 떠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삶이 나뉘게 될 텐데, 실제로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과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뉘게 되기 이전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그 길로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버린 상태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겠는데요. 어떤 사람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바른 길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도둑질도 하지 아니하였고, 나는 살인도 하지 아니하였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이미 미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어떤 한 사람을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싹이 트고 있는데, 그런데 그 미움이 더 자라고 더 자라서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거나 죽이거나 그러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도둑질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 가운데는 탐욕적인 마음이 있어서, 그리고 그 탐욕적인 마음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해 아직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죄에는 단계가 있죠. 그래서 마음속에서 생각만 한 것보다, 그것을 실제로 계획하고, 계획한 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겨서,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 사이에는, 죄의 경중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죄의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마음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마음에서 떠나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으로는 더 떠나기가 쉬운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때문에, 그냥 거룩해 보이기 때문에 속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경고해 주시죠. 우리가 마음으로 이미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신약에 들어와서만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잠언서 15장 1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오?” 우리의 마음이 길에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길에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숨겨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스올과 아바돈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스올과 아바돈이 하나님 여호와 앞에 드러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스올이 무엇이죠? 스올? 스올이 도대체 뭡니까?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 성경에는 “음부”라고 번역해 놓았던 단어가 스올입니다. 음부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무덤, 지하 세계, 더 나아가서 지옥을 상징하는 단어가 스올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스올에 내려간다고 표현을 해요. 구약 성경에서. 그러니까 이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곳이냐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죽게 되면 땅속에 파묻혀버리는 그런 무덤, 지하세계, 감추어진 곳이 스올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 스올, 감추어진 그 스올도 하나님 앞에는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아바돈은 뭡니까? 아바돈? 아바돈은 옛날에는 “유명”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그냥 아바돈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아바돈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깊음, 이런 죽음, 이런 것을 의미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올과 아바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을 의미해요. 저 땅 밑을 의미해요. 깊은 곳을 의미해요. 사람들이 우리가 볼 수 없는 저 지하 세계, 아주 음부의 세계를 나타낼 때, 스올과 아바돈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 스올과 아바돈은 우리는 볼 수 없지만, 그것도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것도 보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잠언서 15장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른 길로 가지 않고 바른 길에서 떠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우리가 실제로 행동을 통해서 실행해 옮길 때에서야, 그래서 그때야 드러나는 게 아니라, 우리 사람들은 언제 그걸 알죠? 실행에 옮겨졌을 때만 압니다. 실행에 옮겨도 알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실행에 옮겨지면 그때 알 수 있죠. 그런데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 마음의 생각은 잘 몰라요. 그렇잖아요?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압니까? 모르잖아요?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아니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고 계시다. 마음에서든 행동에서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에서 떠나게 되면 징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가 회개하고 그 징계를 달게 받고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하면서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게 된다면, 결국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오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징계는 사실 은총입니다. 지금은 징계들을 안 받으시니까, 이런 말을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징계를 받는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많이 내겠지만, 우리가 징계를 받게 될 때가 있을 텐데,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게 되고, 발가 벗겨져서 우리의 죄와 허물들이 다 낱낱이 드러나면서, 엄청난 징계를 받게 되는 날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거에 따라서, 그럴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윗이 범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외면해 버리고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버리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범죄를 정말 철저하게 다루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고, 감사했고, 그리고 그 앞에서 회개하며 나아갈 때 그의 영원한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죄악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면, 괜찮은 게 아니라 괴로워해야 되는 거예요. 아무 일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안심할게 아니라, 걱정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 죄를 다루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고, 나를 바른 길로 빚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더 엎드려야 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실수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기시고, 우리 대신에 발가 벗기시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셔서, 우리를 회복케 해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우리가 악용하고 뻔뻔하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인 양, 그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징계를 그저 무시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를 늘 감사하고 생각하며 회개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로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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