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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눅 22:66-7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을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보내기 전에,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종교 재판을 열어서, 이제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보내게 되는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66절에 보면 “날이 새매” 그랬습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서 재판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날이 샜다고 하는 얘기는 오늘날로 시간으로 하면, 한 새벽 6시 정도 되는 시간인 거죠. 해가 동쪽에서부터 비치기 시작하는 그때에, 이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모여서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한 공회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받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모이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번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그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 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것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그곳이라고 알려진 곳을 지금 찍은 건데요. 지금은 교회로 만들어져 있는 곳이고 잠깐 보았습니다. 그다음 사진 보면 그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에서부터 밑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지하 감옥을 볼 수 있는 그 구멍이 뚫려 있었고요. 그다음 사진 보면 바로 그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지하에 이렇게 감옥이 설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번에 사진을 저희가 잘 찍지 못해서, 정확하게 그 모습들을 제대로 잘 보여주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그다음 사진도 한번 보시면 저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사진도 한번 보시고, 이런 식으로 해서 예수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지하에 감옥이 만들어져 있고, 밤새도록 어쩌면 예수님을 그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가두어 둔 다음에, 그리고 날이 새자마자 데리고 올라와서 사람들 앞에서 재판을 벌이고 있는 그 장면이 오늘 본문의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종교 재판을 여는데 이 종교 재판을 여는 그 재판장이 누구냐면, 대제사장 가야바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 재판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이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는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너무나도 말이 안 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재판하고 있습니까? 지금 심문을 당하고 있는 분, 재판을 당하고 있는 분이 누구냐면, 바로 예수님을 재판하고 있는 것이죠.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이시며, 온 세상을 심판할 심판주를 그들을 앞에 세워놓고, 재판하겠다고 하는 인간의 교만한 모습을 이 장면 가운데서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재판이야말로 얼마나 엉터리 재판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자가, 오히려 심판을 받아야 될 자가 심판해야 될 주님을 재판하고 있는 엉터리 재판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두 번째, 증거에 의해서 공평한 재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한 목적을 정해놓고, 죽이기 위해서 그 근거를 찾기 위한 엉터리 재판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9절의 말씀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그랬습니다. 증거가 있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죄악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계획해 놓고 거짓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이죠. 결국 이 재판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 가운데 넘기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있게 된 것이고, 예수님의 예수님을 유죄 판결을 내리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고 간 다음에, 또 유죄 판결을 내리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오늘 금요일 십자가의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장면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우리들의 현실 가운데 늘 일어나는 일이고, 의로운 자가 재판을 받는 것이고, 힘 있는 자들이, 악한 자들이, 오히려 범죄자들이 재판장이 되어서 의로운 자를 심판하고 감옥으로 보내고, 형벌을 내리는 일들이 안타깝게도 역사상 수없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엉터리 재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을 보여주는,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 가운데 언제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무 죄가 없으신 그 주님을 죄 있는 자들이 심판하겠다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볼 수가 있는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대제사장들이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괜찮은 것처럼 여기에 앉아있고, 괜찮은 것처럼,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에 앉아 있지만, 사실은 우리들도 대제사장들의 마음과 같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따라 복종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이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내 생각으로 재단하고, 그래서 내 생각에 좋은 것 같으면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내 자신이 재판정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상황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매일매일 반복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량한 지식과 알량한 판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으면 따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면 못 따르겠다고 버티고 있는,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한다고 앉아 있는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팔짱을 끼고, 재판석 자리에 앉아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각하는 거죠. 오늘 찬양은 영 음이 틀리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은혜가 없네. 우리들의 생각 가운데, 우리들이 우리들이 판단해 버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보다는, 우리들이 재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보다는, 내가 판단자가 되어 내 구미에 맞는 것이 있으면 따르지만, 내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내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재판장의 자리로 가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 것인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회개하며 나아가는 이 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씀이 바른 가르침인지 바른 가르침이 아닌지 분별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믿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 가운데는 믿으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그러나 이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속하지 않았는지 분별하라고 하는 말씀도 있고,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삼갈 것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분별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일이고, 참된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바른 가르침인지 바르지 못한 가르침인지 분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고 한다고 하면, 그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나 할 수 없나, 내 능력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지 못하는 일인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주님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는, 그러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서 순종하며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신 것이고, 그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받아들인 것이죠.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보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가 믿어야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2천 년 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예수님과 직접 한 시대에 동행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특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판장의 자리에 서서 거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가게 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되고, 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치유를 받게 되고, 세리가 용서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생명의 떡을 받아먹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바로 그 능력의 주님을 만났으면서도, 주님의 그 기적을 받아들일 수 없고, 주님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닫혀 버렸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 옆에 있다고 할지라도, 들을 귀가 없고 볼 수 없는 눈이 없고, 마음이 꽉 막혀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금은보화가, 보석이 우리 옆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눈이 감겨 있다고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왕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우리들의 마음을 꽉 닫아버리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보호로운 주님이 계셔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선악가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태도였던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너희가 다 먹을 수 있지만,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안 먹으면 돼요. 먹을 게 널려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 먹어도 배가 터져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해도,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꼭 먹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내가 판단해서, 하나님의 그 말씀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내가 판단하고, 사탄이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게 될 때, 하나님이 너희를 경고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그 유혹에 넘어가 버려서, 내가 재판해 버리고 하나님의 그 명령을 내가 생각하는 마음으로 판단해 버려서 순종하지 않아, 결국 멸망의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주간을 맞이하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인류의 죄의 가장 깊은 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재판장의 자리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서 하나님마저도 우리가 판단하고, 내 구미에 따라서 내가 기분이 좋으면 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지 않고, 내가 판단에 따라서 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죄악의 뿌리였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우리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 가운데 내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앞에 드리고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겸손하게 고백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주도권을 내려놓고 결정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라고 한다면 순종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의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는 그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고, 아무런 신뢰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죠. 홍해를 가르고, 그 사이로 가라 하시면 걸어가면 되는 거예요. 여리고성을 돌라고 하시면, 그 여리고성을 돌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의 판단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재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려야 하는 것이고, 주님을 찬송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어도, 고난 가운데 있어도, 찬송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해야 되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들의 삶이 기쁨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 축복이고 영생의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 온전히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한계시록의 모습을 보면 24 장로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주 앞에 드리는 장면이 나와요. 내가 왕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십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야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에 따르겠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천상의 모습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천상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살고 있고, 왜 우리가 우울하고 절망 가운데 있고, 왜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가? 그것은 그 면류관을 내가 쓰고, 내가 걱정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하지 않을 그 걱정거리를 내가 가지고 사는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이 고통 가운데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근심 가운데 있을 때, 내가 판단하면서 근심하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의 면류관을 주님 앞에 벗어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기쁨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내가 판단하면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걱정과 근심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죠. 풀무불 가운데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따라가야 되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죽는 길처럼 보였고,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인생이 완전히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온 세상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라.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라고 하셨을 때, 주님께서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위에서 물과 배를 다 쏟으시고 운명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끝난 것이 아니라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 만류의 주가 되시고, 온 세상에 구주가 되셨다고 하는 이 놀라운 역설의 진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면류관을 쓰고, 내가 그 고난의 고통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죽음의 자리 같지만 기쁨의 자리로 변화되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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