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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움과 큰 기쁨 (마 28:1-10)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죽음이 제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아가서 8장 6절 말씀에 보면, 중간 부분에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다시 말하자면 지옥같이 “잔인하며”라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한가?”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할 때, 그것은 마치 “죽음처럼 강하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사랑이 강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일 센 것이 무엇일까? 제일 강한 것이 무엇일까? 했을 때, 죽음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사랑은 죽음같이 강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죽음은 정말 강력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장사라고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 약해질 수밖에 없고, 그 세월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면,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고 슬퍼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실패가 있는데, 그 실패들은 우리가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고, 그 실패 또한 인생의 자산이기 때문에, 그런 실패라고 하는 자산들이 모이고 모여서, 성공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사실 실패가 없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듯이, 그런 실패를 거듭하면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실패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두려운 것 무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다릅니다. 죽음은 더 이상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다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46편 3절과 4절 말씀에 보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음이 있게 되면, 모든 생각이 그의 생각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생각이 소멸된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계획이 중단된다는 것이죠. 꿈이 멈추어 버린다고 하는 것이죠. 그 어떠한 야망도 수포로 돌아가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도 이러한 점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의 시대는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핸드폰이 있었겠습니까? 컴퓨터가 있었겠습니까? 자동차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생명공학이 발달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아무런 과학적인 발달이 되지 않은 시대였지만, 그래도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라고 할지라도, 그 3천 년 전에도, 한 번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3천 년 전의 사람, 예수님으로부터 약 천 년 전의 사람이 다윗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요. 다윗은 밧세바와 낳은 아들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으려고 하는 그런 위험한 순간에 이르게 되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한 거죠. “하나님, 이 아이를 좀 살려주세요.” 이 아이를 좀 낫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다윗은 식음을 전폐하면서, 하나님 앞에 메어 달리고 울고 하면서, 이 아이를 좀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죽어버렸어요. 죽었다고 하는 말을 신하들은 다윗에게 전달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의 살아나는 것을 위해서, 그렇게 금식하면서까지 애걸하게 울부짖으며, 울부짖었던 그 다윗인데, 이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말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알게 되었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가 죽었느냐? 물어본 다음에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자, 다윗은 그 즉시 기도하는 것을 멈췄습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것을 멈추고, 금식하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왕이시여, 어찌 된 일입니까?” 그때 했던 다윗의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죽어서 그 아이에게 갈 수 있겠지만, 죽은 그 아이가 내게 돌아올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러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진리요. 상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면, 믿는 게 맞습니까?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이 맞을까요?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누가 말하기를, 나는 죽었었으나, 죽어서 내가 천국도 보고, 지옥도 보고, 경험을 다 했으나, 다시 살아났다고 이야기하면, 그냥 믿어야 됩니까? 일단 의심해봐야 합니까? 의심해 보는 것이 맞아요. 의심해 보는 것이 옳은 겁니다. 제가 만일 어느 날 사라졌다가 며칠 뒤에 나타나서, 내가 죽었었고, 그리고 천국을 경험하고 지옥을 경험했다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다시 살아왔노라고 말하면, 제가 말하면, 믿어야 됩니까? 안 믿어야 됩니까? 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그래요. 일단은 의심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혀 죽으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죽었으니까요. 죽은 사람에게서 무슨 소망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 그들을 만나주셔서 살아났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지만, 그래서 그것을 보게 된 열 명의 제자들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래서 그 가운데 있지 않았던 도마에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이야기했을 때, 도마는 믿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내 손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고, 내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그 손에 못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했는데, 그것은 도마가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당연한 반응인 거예요.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믿는 게 이상한 것이지,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은 선포하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2천 년 전에, 한때 절망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었고,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고 다녔으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전해 들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믿을 만한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2천 년 전에 일어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보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경험해보지도 않은 그 예수님을 어떻게 부활하셨다고 믿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기록한 성경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사건에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내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데요. 이 성경이 언제 쓰였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으로 추정되는 A, D. 30년 경에,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직 이것이 진실이다. 거짓이다. 이것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증인들이 살아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성경 말씀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아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비난하기를, 왜 당신들은 기독교만 옳다고 하느냐? 왜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하고, 다른 종교의 기적에 대해서는 부인하면서, 왜 기독교의 기적은 성경의 기적은 왜 믿느냐?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도표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조로아스터교라고 하는 종교가 있는데요. 그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사람은 B.C. 천 년에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이 쓰인 것은 A, D. 3세기로서 1300년 전의 이야기를 쓴 거예요. 1300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쓴 그 경전을 우리가 믿을 만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이죠. 석가모니에는 어떤 사람인가 B.C. 600년경에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600년경에 활동한 사람인데, 그에 대한 기록이 불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불경은 언제 쓰였는가? A, D. 1세기에 쓰인 책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약 700년 전에 석가모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걸어 나와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하고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700년 뒤에 기록했다는 거예요. 700년 전에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기적이 있었고,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고 써놓은 것을 과연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무함마드는 632년에 죽었다고 하는데요. 그 무함마드에 대해서 기록한 코란은 A, D. 767년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약 100년 전에 죽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기적이 있었다고 써놓았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는지 없었는지 증언해 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 그에 대해서 썼다고 하는 것이 코란의 이야기인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A, D. 33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를 쓴 것이 A, D. 55년입니다. 아직 그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그 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생생히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고린도 전서를 쓴 것이고, 복음서도 A, D. 70년 80년, 비판적인 학자들은 90년을 말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 예수님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복음서도,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했고 어떠한 죽음과 어떠한 부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다 보았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상황 가운데,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이것은 다 잘못된 거야. 이것은 거짓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있을 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엄청난 큰 차이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는 1세기에 갑자기 탄생했습니다. 유대 땅에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갑자기 1세기에 기독교라고 하는 종파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기독교 신앙이 얼마 되지 않아, 전 유럽에까지 아프리카까지 퍼지게 되는 그런 엄청난 발전이 기독교 역사상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역사가가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수수께끼가 하나 있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유대교라고 하는 토양 속에서, 유대교는 어떤 종교인가? 유일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오늘날의 이슬람교처럼, 신이 아닌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이 있다고 한다면, 죽여버리는 그런 이슬람교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이야기하면 죽여버리는 그런 무시무시하고 아주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던 유대교회 토양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한 분만이라고 그렇게 교육을 받고, 그런 신앙 가운데 철저하게 살았던 그들이 갑자기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앙으로 바뀌게 된 기독교가 갑자기 탄생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인 진리 진실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수수께끼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삼일 일체 신앙을 가진 개신교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게 되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부활을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미스터리에는 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세기 살았던 예루살렘과 유대의 땅에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그 강력한 증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세 번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증언 이유들을 댈 수가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오늘 하루 종일 설명해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간단하게 제일 중요한 것들만 이야기하면, 그 세 번째가 무엇이냐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리고, 고난을 당하고 기꺼이 사형당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는 수많은 가짜들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다 돈 때문에 그런 거죠. 다 떨어지고, 뭔가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짜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가짜 목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가짜 신앙인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왜? 그걸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짜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1세기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평안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또 동네로부터 축출당하고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경제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핍박을 당하면서 살면서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오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그 신앙이 사실인지 진실인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의 종교를 위해 목숨을 내놓곤 합니다.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때문에 지금 목숨을 내놓는 것이죠. 하지만 이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했는지 부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던 그 시대에, 그때에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죠. 만일 예수님의 그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 분명한데 그 거짓말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누가 있으며, 그 거짓말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고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종교적인 그런 극단분자와는 달리, 2천 년 전 그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참으로 만났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오늘 우리도 우리는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가를 확실하게 살펴보게 될 때, 이 부활의 사실이 진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제대로 잘 간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와,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또 한 사람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5절에서부터 7절 말씀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진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것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 여성들이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다른 제자들도 이 여인들의 말을 듣고 나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하고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마태복음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로 마리아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성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과는 달리, 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미개한 사회였던 것이죠. 그래서 어느 재판을 할 때 증인 2명이 필요한데 남성, 어른 증인 두 명이 나와서 똑같은 증언을 해줘야 그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성은 그렇게 증언할 자격조차도 되지 않았던 시대가 이 당시의 시대였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조작해서 쓸려고 했다고 한다면, 여성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어놓기보다는 누구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이 훨씬 더 유리했을까요? 남자들의 이름을 적어놓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을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여인들이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이 끝까지 여자들의 증언은 쓸모없어라고, 그들이 내 팽개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짜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보았던 것이고 그들이 경험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적어 놓았다고 하는 것이죠.

이 마리아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하고 너무나도 큰 기쁨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만나면서 엄청난 기쁨에 쌓이게 되었는데요. 기쁨뿐만이 아니고 다른 감정도 느끼게 됐습니다. 마태복음 28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셨다고 하는 주님을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왜 무서운 마음도 들었을까요? 그것은 성경은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어전 회의를 환상 가운데 바라보게 될 때,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그럼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때, 그들의 마음 가운데 무서운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마음뿐만 아니라 큰 기쁨의 마음도 있었는데요. 불과 지난 어젯밤만 해도, 불과 그저께만 해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서 절망하고 슬퍼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큰 기쁨 가운데 있었다고 한 것인데,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는 이천 년 뒤에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의 부활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큰 기쁨이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우리가 눈을 감아버리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부활의 모습들을 본 사람들이 이 마리아들만 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덤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도 알았어요.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몰랐는가? 대제사장들도 알았어요. 훔쳐간 것이 아니라, 신비한 일이 일어났고, 놀라운 능력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마음에서 거부해 버린 겁니다. 증거가 없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증거를 들이대도 그 마음을 닫아버려서, 그 부활의 능력이 그들의 삶 가운데 오지 못하게 된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이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히 그렇게 부활주일에만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 그렇게 봐야 되는 것이죠. 언제? 슬픈 일이 있을 때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무엇인가 막힐 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게 없고, 심지어 가장 강력하다고 하는 죽음마저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그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베풀어주셨던, 그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해 나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단순히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부활절 때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그렇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고, 우리 주님을 부활시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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