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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징계 (잠 13:24-25)

오늘 두 절을 함께 읽었는데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니까, 이 두 가지 주제를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잠언서 13장 24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도, 그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고쳐주지 않고, 그냥 그 잘못된 길로 가도록 방치해 버린다고 한다면, 결국 그 자녀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자녀가 망하는 길로 가지 않도록 막고, 그 자녀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고쳐주는 것은 부모에게 주어진 아주 중요한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매를 아끼면 안 된다고 오늘 잠언서 13장 24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매를 아끼면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다음 행에 나와 있는 표현대로, 근실히 징계한다고 하는 의미이겠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고요. 그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게,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망치는 것이고, 그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다시 말하자면 미워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아마 그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고 한다면, 엘리 제사장의 예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 제사를 폄훼하고, 그리고 그 제사의 그 물건을 탈취하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그 제사를 모욕하는 그런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이 있을 때, 그 여인을 겁탈하는 등, 정말 사악한 일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은 그 홉니와 비느하스를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만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그 가정에 미치게 되었는데요.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가서 전쟁하는 가운데, 그 전쟁 가운데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었던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서 넘어져, 결국 그 엘리 제사장까지 죽게 되는, 아주 엄청난 비극이 엘리 제사장 가정 가운데 있었던 이야기가 사무엘상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정말 아끼고 정말 사랑한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껏 때려도 괜찮고, 폭력을 쓰고, 우리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마음대로 체벌을 가해도 괜찮은 것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우리가 지내오던 그 방식에서 성경을 읽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한국적인 상황에서 살아왔는데요. 유교적인 그런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고, 또 군대 문화나 일제시대 때 우리가 배웠던 교육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로부터 받았던 그런 것들을, 그것이 우리들에게 몸에 익숙해져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고, 아이들을 향해서 정말 체벌을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당하다”라고 하는 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읽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막 때리고, 채벌을 하고 하는, 그것이 그것이 정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유교적인 관념으로, 우리 한국적인 그런 관념 속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아, 정말 성경에도 보니까, 매를 아끼는 자는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고,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이 방식, 우리가 지금까지 해오던 이 자녀들을 향해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체벌을 아주 강하게 하고, 때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했던 그 방식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너무나도 쉽게 결론을 내릴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렇게 오해하시면은 안 됩니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고, 교육의 효과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수많은 우리 한국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리고 우리의 문화와 관습 속에서, 이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그러니까 마치 부모가 폭력을 쓰는 것이 무한대로 정당한 것인 양 오해를 해서, 그래서 우리 자녀들에게 함부로 때리고, 함부로 처벌하다가 심지어 아이들을 죽이게 되는 그런 끔찍한 일들도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종종 뉴스에 나온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부모가 자녀들을 훈육한다는 명목으로 체벌을 했는데, 그 체벌이 과해서 결국 아이가 목숨을 잃게 되었으며, 그 아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드러날까 봐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발각이 되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경우가 우리나라의 뉴스에 종종 나왔던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했던 사람들 가운데, 그 당사자가 누구였냐면 목사였어요. 외국에서 신학교에서 공부까지 했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런 안타까운 그런 결과를 나타나기까지 했던 것인데요. 그렇게 우리가 잘못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우리가 마음대로 때려도, 마음대로 학대를 하고, 마음대로 인격을 무시하고, 우리 자녀들에게 내 마음대로 행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 면죄부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는 체벌을 해서 우리 자녀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신문과 뉴스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죽이지는 않았어도, 사실 우리들의 아이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만들고, 우리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돌이킬 수 없는 부모에 대한 증오와, 그리고 정말 반발하는 심정, 그런 것들을 심어주는, 정말 육신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을 죽이는 것과 같은,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결과를 보여주는, 그런 잘못들을 우리 크리스천들이 많이 해오고 있었고, 저도 그것이 예외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이런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우리 자녀들에게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의 말씀에 보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1절의 말씀에서도 똑같이 교훈하고 있는데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라고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가르칠 때,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 그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는 그 자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너무나도 참 속상해서, 그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부모님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그냥 화를 내버리거나, 그냥 체벌해버리거나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제대로 된 교육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죠.

종종 부모가 무서워서 그 일을 중단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반발심 가운데, 그냥 지금은 내가 힘이 약자이고, 지금은 내가 부모님에게 대들 수 없고, 지금은 내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리고 그 집안에서 부모의 그 보호 아래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집을 떠나가면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어디 가서 먹을 수도 없잖아요? 할 수 없이 부모에게 붙어 있어야만 하는 그 약자의 입장에서, 할 수 없이 두드려 맞아도, 그래도 이 집 안에 있어야만 하는 그런 약자의 입장 가운데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에 동의가 돼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모가 무서워서 그 말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응을 할 뿐인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신앙을 가르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신앙을 우리 부모가 억압적인 방법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부모가 교회에 제때 가라고 말하고, 복장을 제대로 갖추어서 가라고 말하고, 시간을 늦지 말라고 말하고, 여러 가지를 윽박지르면서 말하면, 어렸을 때는 힘이 없으니까 들을 수 있겠지만, 그 아이의 마음 가운데, 그렇게 그것을 따르는 이유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맞으니까, 내가 혼나니까, 혼나지 않기 위해, 그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지, 그 아이의 마음 가운데 참된 믿음이 들어가서 그런 것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참된 복음을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인데, 그래서 늘 실수가 많고 늘 잘못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는 자들이기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고, 그 보혈의 피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 자녀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그래야 마음속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매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수는 없는 것이죠. 말을 억지로 강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윽박지르고 때림으로써, 그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길을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어느 한 구절에 있는 잠언서에 있는 그 한 구절의 말씀만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대하는 방식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시면, 큰 실패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정말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데요. 성경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성경이 아닌 곳을 통해서도 많이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훈육 방법을 연구한 학자들이나, 그런 교육의 대가들, 그런,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잘 다룰 수 있는지, 그런 여러 가지 연구한 학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한 일반적인 학문들은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예요.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만 하나님의,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의 법칙이고,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인 그런 가르침과 교육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정말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고, 저런 문제를 가지고 있고 하는, 그런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방법들은 다 내 팽개쳐 버리고, 다른 모든 방법들에 대해서는 귀를 하나도 듣지 않고, 이 세상에 주어진 그런 법칙들도 다 하나님의 법칙들인데, 그 법칙들은 다 내 팽개쳐 버린 채, 그저 잠언서에 나와 있는 이 한 구절만 가지고, 때림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매를 드는 경우가 정말 아이가 잘못을 했고, 그리고 바른 길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매를 들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은 왜 부모가 그런 긴박한 느낌을 가지고, 자녀를 향해서 훈육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는 것이고, 그리고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그 분노가 동기가 되어서 때리고, 매를 들게 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제가 한국에 와서 어린이날 울산에 한 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인데요. 그래서 점심때가 돼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옆 상에서 한 가정이 식사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그 식당이 무슨 식당이었는가? 아마 비빔밥을 먹는 식당이었는지,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한식이었어요. 한식. 그런데 그 아이가 밥을 안 먹는 걸 보고, 부모가 왜 밥을 안 먹느냐고 윽박지르면서, 그 아이를 울고 있는데 막 때리기도 하고, 그러는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정말 너무나도 깜짝 놀랐어요. 어린이날, 어린이날에 짜장면 먹으러 간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좋아하는 한 식당에 와서, 아이가 싫어하는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때리고 윽박지르는 그 부모를 보면서 왜 이럴까? 근데 그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그게 기억에 남는 게, 어쩌면 그게 우리들을 그대로 바로 드러낸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훈계해야 될 것을 훈계해야 하는데, 훈계해야 될 이유가 아닌 것으로 훈계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면, 배가 불러서 안 먹는 거예요. 먹기 싫으니까 먹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왜 먹으라고 윽박지르고,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 대부분의 경우는 부모가 자녀들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하고, 우리 자녀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아이가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면, 왜 밥을 먹지 않으려고 하는지, 맛이 없는지, 속이 더부룩한지, 지금 다른 무엇인가를 더 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여러 가지 다양한 그 욕구들이 있을 텐데,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 그 아이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는 마음을 하나도 없는 채, 목표는 내가 세워놓고, 그 목표에 따라 따라오지 아니하면, 윽박지르고 때리고, 그리고 그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체벌을 하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 부모들이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들이대고,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고 말하는 그런 황당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거예요.

성경의 교훈은 무엇인가? 잠언서 18장 13절의 말씀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예요. 사연을 들어봐야죠. 왜 그런 행동이 나왔는지, 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이를 이해하려고 하는, 내 눈을 낮추어서, 그래서 그 아이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을 해야. 그렇다고 한다면 사실은 체벌할 이유들이 사실은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의 체벌은 자녀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다 역효과를 낼 뿐이고, 더 심각하게는 우리 자녀들을 율법주의자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조그마한 잘못에 대하여 참을성이 없고, 그리고 비난하고 욕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조그마한 마음의 여유도 없이 비난하고, 욕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아주 힘들게 만드는 율법주의자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실은 우리 부모가 우리 자녀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체벌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그리고 정당한 사유에 의해서, 그리고 자녀들이 그 차별의 이유에 대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부모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화풀이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때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망치는 일이 될 것인데, 그런 망치는 일들을 하면서, 나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것이라고 하는 어줍지 아니한 자기 정당화를 성경을 들어가면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의 말씀에 사람에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로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체벌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은 정당하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부모가 바른 길을 가지고 있어야,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고, 바른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자라온 환경과, 지금까지 경험해 온 문화와 관습과 습관에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학습되어진 것이, 그런 것이 정말 진짜로 옳은 것인지, 진지한 반성이 없이,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강요하면서, 그리고 화를 내게 될 때가 많은데, 특별히 그래서 우리가 유교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꼰대처럼, 우리 자녀들을 대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무장되어 있어야 되는 거죠. 우리의 꿈이 세속적인 꿈이 아니라, 우리의 꿈이 하나님의 그 말씀에 따른 정말 정당하고 바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인데, 대부분 우리 부모님들이 하는 것은 “공부 잘해라. 그래서 성공해라.”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 내가 성공하는 것을 바라는 탐욕적인 그런 가치관에 의해서, 우리 자녀들을 어렵게 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먼저 성경적으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지혜를 주시옵소서. 인내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시고, 또한 하나님의 그 가치관을 회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정말 바른 길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 13장 25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의인은 포식하고, 악인이 주린다고 하는 말인데요. 그렇다고 한다면, 포식하고 있는 사람은 의인이고, 주리고 있는 사람은 악인인 것일까요? 그런데 그런 결론을 내리기가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정반대로 보이는 경우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73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악인이 잘 먹고, 잘 살고, 이렇게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면서 울부짖는 내용이 시편 73편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인이 배부른 것이 아니라, 의인이 배고픈 때가 더 많아요. 그리고 악인이 오히려 더 배부른 경우가 더 많이 있는데, 왜 잠언서 13장 25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포식한다. 주린다”라고 하는 말은 “그 삶이 복된 삶이다. 그 삶이 화가 있는 삶이다. 화를 당할 인생이다.”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표현하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의인이 정말 물질적으로 배부르고, 그리고 “악인은 물질적으로 다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성경은 대부분 이런 영적인 가치를 가르치기 위해서 물질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성경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복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하냐면, 나가서도 복을 받고 들어와서도 복을 받고 광주리가 복을 받고 등등 이렇게 물질적인 복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게 진짜 복이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표현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물질적으로 표현을 해야, 우리가 생생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질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잠언서 13장 25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의인이 포식하게 될 것이고 악인은 주리게 된다고 하는 얘기는, 그러니까 우리가 의롭게 살면 부자가 되고, 악하게 살면 가난하게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의인의 삶이 결국은 복된 삶이고, 악인의 삶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런 “불행한 불행한 인생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들려주시기 위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때, 우리가 절망할 것도 아니고 변절할 것도 아닙니다. 의인은 고난을 받고 악인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들은 때로는 절망할 수 있고, 때로는 변절해서 “에이. 그냥 악하게 살아도 되겠구나.”라고 변절하기가 쉬운데, 그런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결국은 복된 길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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