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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언의 말씀 (계 1:1-3)

목차로 돌아가기 +++ 2.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몇 주간은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이 책의 정말 상당히 어려운 책이어서,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도대체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혼란스럽고, 읽어도 별로 은혜도 안 되고, 그냥 혼란스럽기만 한, 그런 경험들을 여러분들이 많이 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요한 계시록은 자주 설교되지도 않고 자주 다루지도 않습니다. 저도 목회를 시작한 지, 목사 안수를 받은 지, 금년이 31년째 되는 해인데요. 지난 3월에 30주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가 돌이켜 보면, 요한계시록으로 설교를 한 적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 계시록을 아주 애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 애용하죠? 이단들이 애용을 많이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수없이 발생해서 물의를 일으켰던, 그런 이단 집단들에서는 한결같이 요한 계시록을 애용하면서, 자신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 가운데, 혹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음성을 들려주셔서, 이 요한계시록을 알게 되었고, 풀게 되었고, 그래서 다른 요한계시록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했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착취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해낸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무엇보다도 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잘 설명하고, 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잘 배우는 것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기독교 서점에 가 보아도 이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잘 안내해주는 책자가 굉장히 드물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 서점에 꽂혀 있는 대부분의 요한계시록에 관련된 설교집이나 해설집들이 한마디로 엉터리이고, 쓰레기와 같은 책들이 많이 널려져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제가 신약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제 전공 분야는 아니기 때문에, 저도 요한계시록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좀 배워가면서 그래서 앞으로 이 시간을 진행해야 될 텐데요. 다행히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그런대로 요한 계시록을 제대로 잘 해설하고, 설명한 책을 하나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지은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게 잘 안 팔렸나 봐요. 그래서 구하기가 좀 어려운데요. 아무튼 이 책은 그나마 이 요한 계시록을 제대로 잘 건전하게 해석해주고 있기 때문에, 혹시 필요하시다고 한다면 구해서 읽어보신다고 한다면, 큰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제가 진행하는 이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이 책을 주로 참조하게 될 것이고,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하면 제일 큰 잘못된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요한계시록이라고 하는 책이 미래에 관한 책이라고 하는 오해입니다. 요한 계시록이 무엇인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종말의 때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 것이라고 하는 미래에 대해서, 장래에 있을 일에 대해서, 쓴 책이라고 하는 오해가 사람들 사이에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를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예언이라고 하는 말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가운데, 3절 말씀을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근데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이 예언의 말씀, 여러분, 예언의 말씀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어떤 것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까? 미래의 일을 미리 이야기해주고 있구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언의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말 자체가 미리 “예” 자에다가, 말씀 “언,” 즉 미리 일어날 일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가리켜서 예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언의 말씀, 그러면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우리가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예언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문은 무엇이냐면, “프로페테이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프로페테이아”라고 하는 이 단어는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냐면, “프로”라고 하는, “프로”와,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의 “페테이아”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 “프로페테이아”의 뜻이 무엇이냐면, “앞으로 말하는 거예요.” 발설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해내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프로페테이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 가운데,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관한, 장래의 일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하나님께서 전달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을 전달하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프로페테이아”라고 하는 건데, 이 “프로페테이아”라고 하는 말을 한국말로 번역할 때 뭐라고 번역했냐면, 아쉽게도 “예언”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한 거예요. “예언”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이 말씀이 미래에 관한 말씀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프로페테이아”의 말씀을 듣고 읽고 듣고 지키라고 할 때, 이 “프로페테이아”라고 하는 이 말씀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언의 은사가 나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는데요. 때로는 병 고치는 은사를, 때로는 방언의 은사를, 때로는 통역의 은사를, 그리고 가르치는 은사를,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고 했는데, 우리가 예언의 은사 그러면, 종종 어떤 생각을 합니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의 미래에 있을 일들을 알아내서, 그것을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은사를 지닌 사람을, 예언의 은사를 지닌 사람이라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을 가리켜서, 예언의 은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고 잘 설명해서 잘 알아듣게 만드는 일을 하는, 그 은사를 가리켜서 예언의 은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은사, 그러면 기도하다가 당신은 앞으로 목사가 될 겁니다. 당신은 앞으로 선교사가 될 겁니다. 당신은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미래를 알아맞히는 것이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예언의 은사가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이 예언, 예언의 말씀이에요. 이게. 이 예언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쉽게, 알기 쉽게 설명해서 가르치는 은사를 가리켜서, 예언의 은사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미래에 대해서 점치는 것, 미래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신명기 18장 14절 말씀에 보면, “내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뭐 한다고요?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당신이 앞으로 복을 받을 겁니다. 당신에게 어려운 일이 생길 겁니다. 당신의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점을 치는 것, 장래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 일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든,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서 이야기하든, 성령님의 이름을 빌어서 이야기하든, 그렇게 장래의 일에 대해서 어떤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미리미리 예언하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속에는 예언이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켜서 예언자라고도 했는데요. 그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선포하는 것을 가리켜서 예언이라고 하는데, 그 선포하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미래에 관한 일들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포함됩니까? 당신들이 지금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 바벨론 나아가 와서 당신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지금 당장 회개하지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그렇게 연결이 되어 있는 겁니다.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내가 길흉을 얻을 것인가, 얻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것들을 알기 위한, 그런 점치는 것과 같은 예언들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금하셨다고 하는 것이죠.

니느웨 백성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40일 안에 멸망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단순히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표현과 모든 것들이 다 신앙적인 용어를 쓰고 있지만,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수단화시켜버리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그런 일들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언도 그중에 하나인데요. 사람들이 예언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미래의 일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해서, 앞으로 무슨 일들이 내게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예요.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면, 나의 행복이 제일 소중하고, 미래의 일들이 우상이 되고,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 되는 것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쳐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수단화되는 것을 철저하게 싫어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남녀 간의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면, 그리고 결혼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참 성스럽고 참 보기 좋은 것이고, 고귀한 것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정말 좋은 거예요. 어제 결혼식에 참여했는데요. 참 그 모습이 너무나도 좋더라고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하며, 나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방에게 맡기며 복종하며,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참 감동이었는지 몰라요. 결혼하게 되면, 혼자 외로웠지만, 지금은 같이 행복하게 될 것이고, 같이 밥도 먹고, 같이 모든 것도 하면서,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 나갈 겁니다. 그건 정말 거룩하고 고귀한 것이죠.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결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혼이 줄 수 있는 유익 때문에, 그 결혼을 선택한다고 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가장 추악한 것이 되고야 말 겁니다. 한 나라의 영주권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로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고요. 얼마 전에 제가 동영상을 하나 봤는데, 염전을 운영하는 어떤 여자 염전 주인이 있었는데, 60세가 넘으신 그 주인이 있었는데, 그 자기 염전에서 오랫동안 일한 노동자와 결혼을 한 이야기가 동영상에 올라와 있는 것을 봤습니다. 염전 주인인 60대 여성이 자기 집안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남자 직원과 결혼을 했다. 이거 감동적인 스토리 같습니까? 아주 추악한 스토리 같습니까? 감동적일 것 같아서 봤는데요. 알고 보니까, 추악해요. 왜냐하면 이 염전 주가 결혼을 하면,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월급을 안 줘도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한 거예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 남성을 더 착취하기 위하여, 결혼 신고를 한 겁니다. 하지만 같이 살지도 않아요.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아요. 전혀 생활을 따르게 하면서 그냥 결혼 신고만 한 거예요. 그 남자는 그냥 계속 노예처럼, 그 직원들 숙소에서 사는 거예요. 가장 거룩해야 될 결혼이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전락하기가 쉬운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그렇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 은혜스러운 그 말씀들을 우리가 때로는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추구한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한 계시록이라고 하는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예언서라기보다는, 사실 지금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요한 계시록이 언제 쓰였냐면, 1세기 말에 쓰였습니다. 누가 썼습니까?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유일하게 장수한 사람이 누구냐면 요한이라고 하는 사도예요. 유일하게 90 넘게 살았어요.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당하고, 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서 다 사라지고 없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오랫동안 살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90 넘게 살아남은 사람이 바로 이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요한이 그냥 편안하게 잘 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밧모섬이라고 하는 곳에 유배되어서, 거기서 유배 생활을 하는 겁니다.

지도를 보시면 보시겠지만, 지금의 터키라고 할 수 있는 소아시아와 그리고 그리스 중간에 있는, 터키 쪽에 좀 더 가까운 조그마한 섬이 바로 팻 모스, 밧모스라고 하는 밧모섬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지금은 배 타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고, 지금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만, 당시에는 유배되어 가서 살아야만 했던,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곳이 바로 그 밧모섬이라고 하는 곳에, 노년에 혼자 유배되어 가서, 쓸쓸하게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요한 사도에게 주신 겁니다.

자신들의 동료였던 모든 다른 사도들은 이미 다 죽어나갔고, 성도들은 다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기는 이렇게 밧모섬에서 유배되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약속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시면서 해 주셨던 주님의 약속, 너희가 나를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거라고 약속해 주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님이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은 안 오는 거예요. 황제는,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으로 섬기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그렇게 활개 치고 있는 그 순간에, 이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이 요한에게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지금이 언제냐 하면, 가장 힘든 때에요. 여러분,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 중에서 언제가 제일 힘듭니까? 다 힘들죠. 다 힘든데, 그래도 시작할 때는 벅찬 게 있어요. 벅찬 게. 시작하면서 감격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처음 입학하는 그 순간에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감격이 있어요. 그래서 시작하는 것은 그래도 재미있어요. 마지막은 어떤가요? 마지막도 영광스러워요. 마라톤 42.195km를 달려서, 마지막 그 꼬인 순간을 들어가는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 박수하고, 환호하고 이제 “내가 끝냈구나. 이제 완성했구나” 하는 그런 기쁨 가운데서, 정말 행복한 거예요. 그런데 제일 힘든 구간이 언제예요? 중간. 마라톤 20km를 뛰면서, 30km를 뛰면서 드는 생각이 뭐예요? 내가 왜 마라톤을 한다고 그랬을까? 포기하고 싶다.

어쩌면 요한의 상황이 바로 그 상황에요. 주님을 믿기 시작해서 교회가 시작이 됐습니다. 그런데 끝날 것 같은, 그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은 오지 않고, 지금 방황할 수밖에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 답답하고 괴로운 그 순간, 근데 그 요한의 모습이 누구의 모습이에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에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역시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우리들을 향해서, 그런데 우리들을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슨 음성이냐면, 계시록 1장 3절 말씀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무엇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언의 말씀을 읽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데 읽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말을 들으면, 그 말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말을 통해서 말하는 자의 숨결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말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글씨로 적어서 보내면, 그 감격과 그 느낌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그냥 모호한 철자로 남아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딱딱한 문자가 돼버리는 것이죠. 이게 문서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말로 하면 감동이 될 수도 있고, 말로 하면 흥분이 되게도 할 수도 있고, 우리들을 열광케 하는 그런 음성이 들릴 때, 우리는 그런 반응을 가질 수가 있는데, 똑같은 그 말을 글씨로 적어놓고 그걸 읽으라고 하면, 도대체 이게 뭐야? 아무런 감동이 없이, 죽은 활자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은 것이, 그런 위험이 있는 것이 바로 문자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성경이 근데 무엇이죠? 음성이 아니라, 글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이 생생하게 우리에게 들리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활자화되어 버린 그 활자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활자를 보면서, 하나님의 그 생생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미건조한 하나의 율법 규정으로만 받아들이게 되고, 이 성경 말씀을 읽는데, 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우리를 얽어매는 하나의 규정으로만 들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1세기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은 성경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에 더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곧 썩게 마련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쓰이지 않을 때 그것은 불경한 표현의 재료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은 곧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아주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잘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이 문자화 된 이 성경 말씀을 내가 몇 번 읽었다고 하는 자랑거리로 만들었어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필사했다고 하는 성취의 수단으로 바꿔버리는, 성경 말씀 몇 구절을 암송했다고 하는 명예로 바꾸어버리는 것이죠.

그런데도 우리들의 삶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는 읽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생생한 숨결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묵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쓴 <묵시>라고 하는 책 내용을 좀 길게 인용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글이 일단 기록되고 나면 그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명사는 어원 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무수히 많다. 성경 역시 그런 운명에서 면제된 적이 없다. 예수님이 가장 격렬한 논쟁을 벌이셨던 대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은 1세기 당시 성경의 문구에 대해서는 정통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음성은 전혀 듣지 못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폭넓고 철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성경을 경외했고 암송하기도 했다. 성경을 사용해서 삶에 구석구석까지 규제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그토록 통렬히 비난하셨을까? 그들은 말씀을 연구하기만 했지, 귀 기울여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할 책으로 여겼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로 여기지 않았다. 즉 그 책을 언약의 명령과 복음의 약속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은 그 책을 인간의 듣는 행위 곧 믿음과 추종과 사랑의 행위로 이어질 그 행동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성경을 기록하는 데 사용된 인쇄용 잉크가 그 성경을 읽는 일에 아무런 감동 없이 느낌 없이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시체 방부처리 액체가 되어 버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성경 많이 안 읽어야 된다고 하는 말씀도 아니고, 필사하지 말라는 말씀도, 암송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을 읽는데, 그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알고 깨달아야 한다는 거예요. 문자화 돼 있는 것을 그냥 읽어버리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생생한 음성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불가피한 상황이 되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어서 집에서 동영상으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집에서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면, 적어져 있는 내용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책을 읽는 것보다도, 우리가 직접 음성을 들어야 하기도 하고, 우리가 예배 현장에 참여도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생생하게 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무미건조하게 그냥 읽어버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내게 들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스포츠 경기를 볼 때 집에서 한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 가서 보는 것이고, 경기장에 못 가면 함께 모여서라도 “대한민국” 하면서 보는 거예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문자화 되어 버린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생동감을 잃어버린 채, 숨결을 잃어버린 채, 그저 종교적인 명예 자랑거리로 전락해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크나 큰 저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예언의 말씀을 있는 자에게 복이 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복이 있다. 어디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연애편지에 비유할 수 있는 거죠. 수십 년 전을 생각해 보세요. 그 남자가 내게 써주었던 연애편지를 집에 와서 읽으면서, 그녀가 내게 주었던 그 꽃과 함께 전해 주었던 그 편지를 읽으면서,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아 그래서 잠 못 이루던 그 밤 기억나시나요? 문자인데 문자가 아니에요. 그 표현 하나를 읽으면서,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미소가 떠오르고 행복해지고 감격하는 그 단계로 가는 것이 연애편지를 읽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고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연애편지이기에, 이 예언의 말씀을 그렇게 읽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 성경을 몇 독하고 어느 정도 공로를 쌓으면, 그 결과로 무엇인가를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만나는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이죠.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공부를 잘 못하는 학생들처럼,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여백이라고 말하는 그런 학생들처럼, 성경을 보면서 몸이 건조해져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지 말고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주님을 만나라.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보실 때, 사랑의 눈으로 보셨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가 아니라, 저는 주일날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뒤돌아서면 저분이 왔었던가 안 했었던가 헷갈려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시고, 글자 한 자, 그냥 시커먼 우리가 족보 성경 속에 나오는 족보만 봐도 지겨운데,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지겹다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보석처럼, 진주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계셔요. 뛰어난 사람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도, 홀로 눈물 흘리는 바로 그 사람의 아픔을 느끼며, 나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다 이해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다 꿰뚫어 보셔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대충 보고 읽어 넘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읽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주님 앞에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마카로니 앤 치즈”라고 하는 음식을 아십니까? 지난 금요일날 제가 2년 만에 간 어느 한 식당이 있어요. 그 식당에 갔더니, 거기 뷔페식당이었는데요. 거기에 나온 메뉴 중에 하나가 “마카로니 앤 치즈”라고 하는 요리입니다. 저기 사진에 나오네요. 저 노란 치즈에 버무려진 마카로니.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담으면서 돌다가 그걸 본 거예요. 제가 무슨 생각이 났을까요? 우리 딸 생각이 났어요. 미국에 있는 둘째 딸아이가 생각이 났어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학교에 가서 급식시간에 나왔던, 조그마한 미국 요리, 이탈리아 요리인가요? 그걸 먹고 맛있었나 봐요. 집에 오더니만, 제가 물었어요. 어디 뭐 먹으러 갈까? 그랬더니, 우리 딸아이가 하는 얘기가, “아빠. I want Macaroni and cheese. I want Macaroni and cheese.” 그러는 거예요.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얼굴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그 안면의 미소를 가지고, 그러는데, “도대체 그게 뭐냐?” 나를 한 번도 들어, 듣도 보도 못한 건데, 알고 봤더니 그거예요. 맛은 없는데, 우리 아이가 그걸 먹고 좋아하는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코로나19로 인해서 실업자가 돼버리고, 지금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그 아이가 지금은 뭐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어떤 아픔과 고통이 있을까?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바라보셔요. 수많은 인파들 가운데, 아무 가치 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키가 크든 작든, 예쁘든 예쁘지 않던,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던 장애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부모로서 실패한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의 아픔과 고난과 슬픔을 다 아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생생하게, 머리카락 보시면서 그냥 새카만 것은 사람이고, 하얀 것은 그냥 바닥이다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발견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마도 안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보다 더 크고 더 놀랍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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