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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의 비유 (마 13:47-50)

오늘 또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에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그 마을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신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은 그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낚는 장면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부들이 고기를 낚는 광경을 많이 보았을 겁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그 모든 사람들이 그물로 곧 물고기를 잡는 그 광경을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는데, 그렇게 익숙한 그 장면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영적인 교훈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유대 어부들은 물고기로 물고기를 잡게 되면, 그물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면, 그 잡은 물고기를 모두 가지고 집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물고기를 먼저 잡은 다음에, 그 호수 주변에서 물고기를 분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먹을 수 있는 물고기와 먹지 못할 물고기를 나누어서 먹지 못하는 물고기는 아마 다시 호수로 던져 넣었겠죠. 아니면 그냥 버리든지. 오로지 먹을 수 있는 물고기만을 모아가지고, 이제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과 행복하게 먹을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런 어부들의 모습을 예수님과 제자들은 흔히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낚시해보셨어요? 해보셨습니까? 좀 대답 좀 해요. 저도 낚시를 굉장히 좋아는 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그런데 아마 물고기 낚시를 해보신 분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으면서 아마 이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버릴 물고기가 없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면 버리는 게 없고, 모두 다 먹어요. 저는 물고기를 먹는 그걸 볼 때마다 참 감탄을 합니다. 세상에 이런 물고기도 먹는다니, 실치 같은 조그마한 물고기도 잡아서 먹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물고기도 먹고, 꽃게도 조그마한 꽃게, 조그만 건 꽃게가 아니죠? 무슨 게라고 하죠? 아무튼 조그마한 그런 개도 잡아가지고, 그것도 다 먹고 못 먹는 게 없을 정도로 아무튼 다 먹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방식일 것인데, 유대 사람들은 그물로 물고기를 낚은 다음에는 바다 호숫가에 앉아서, 물고기를 분류하는 겁니다. 이건 버리자. 이건 가지고 가자. 이건 버리자. 이건 가지고 가자 하는 겁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도 꽤 성숙해져서 그물로 낚시를 했다고 할지라도 낚시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할지라도, 작은 물고기들을 살려주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큰 고기냐 작은 고기냐에 따라서 물고기를 분류한 게 아니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분류를 한 겁니다. 모세의 율법에 보면 생선 중에서 먹을 수 있는 생선과 먹지 못할 생선에 대해서 규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먹을 수 있는 생선은 어떤 생선이죠? 비늘이 있는 생선은 먹을 수 있어요. 하지만 비늘이 없는 생선은 더러운 생선, 부정한 생선이니 먹을 수 없다고 하는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가서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어부들은 그 호수 주변에 앉아서, 그물에 걸려온 물고기 가운데, 비늘이 있는 것들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챙기지만, 먹지 못하는 물고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징어? 맞습니다. 오징어 같은 거. 또 뭐가 있을까요? 장어 같은 거. 장어 같은 거 잡히면, 못 먹는 거예요. 비늘이 없기 때문에, 먹지를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 가운데, 장어류의 물고기는 비늘이 없기 때문에, 그냥 다시 버려버리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장어를 너무 좋아하잖아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분리해 버리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너희가 너희 자녀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바로 그런 장어와 같은 물고기를 말하는 거예요. 아들이 배고프다고 생선 좀 달라고 하는데, 비늘이 없는 물고기인 장어와 같은 물고기를 줄 아빠가 어디 있겠느냐? 하물며, 너희 악한 아버지라도 사람이라도 자식에게 좋은 걸로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을 때 거기에 나오는 뱀을 주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은 아마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잡히는 장어류의 물고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광경을 가지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면 그 물고기를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물고기와 먹지 못하는 물고기로 분류하고, 그래서 그것을 처리하듯이, 이 세상 끝날에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분류하실 것이다. 사람들을 분류하는데 어떻게 분류하는가? 선인과 악인으로 분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일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심판받을 사람으로,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거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에 말씀을 함께 읽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그물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그 당시에 아주 흔한 광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대한민국에서 사셨다고 한다면, 그물의 비유를 하지 않고 어떤 비유를 했을까요? 아마 이런 비유를 했을 것 같아요. 너희들이 쓰레기를 치울 때, 재활용과 재활용되지 않는 걸 서로 구분하지 않느냐? 그래서 재활용 용품은 이쪽에 넣고, 재활용되지 않는 물품은 저쪽으로 넣어서, 그래서 서로 따로따로 분류하듯이, 세상 끝날에도 이렇게 분류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 예수님께서 아마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마 예수님께서 우리나라에서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아마 수험생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하셨을는지도 몰라요. 시험을 공부했지만 어떤 사람은 합격을 시키고, 어떤 사람은 불합격시키듯이, 공무원 시험을 하든 대학 시험을 하든, 결국에 지금은 다 같이 공부하는 학생 같고, 다 같은 수험생이지만, 그러나 나중에 가면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나누는 것처럼, 이 세상 끝날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을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13장 47절부터 50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지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비유는 최후의 심판 때에 의인과 악인을 갈라낼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을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데요.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분리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핵심은. 두 번째 핵심은 무엇입니까? 분리해서 악인은 영원한 심판에 들어갈 것이고,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비유를 보면서 지엽적인 것을 보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을 던질까요? 목사님 그런데 그 물고기들은 잡혀가지고 결국 어부가 먹어치우잖아요? 그럼 우리도 나중에 하나님에 의해서 잡혀 먹혀 죽나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비유의 의도가 아니죠. 비유를 우리가 볼 때 항상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면, 그 비유가 전달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봐야 되는 것이고, 그 핵심 메시지가 아닌 것은 유사점이 아니라 대조점이고, 이것은 전달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비유에 있어서 유사점과 대주점을 한번 그림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그물의 비유에 있어서의 유사점과 대조점이 무엇이냐면, 이 비유 그늘 고기 잡는 어부, 어부 그리고 그물이라고 하는 비유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 비유가 마지막에 가르치는 그 실제인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그 실제를 이야기해 주려고 하고 있는데, 그물, 고기 잡는 어부와 심판하시는 하나님, 천국과 지옥과의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면, a 지점만 유사점이 있는 거예요. 이쪽에 a와 저쪽의 A가 유사점이 있고, 나머지 부분들은 유사점이 아니라 대조점인 것이죠. 그래서 이 비유의 유사점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그물, 어부와 심판, 하나님과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면,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서로 구분할 것이다. 마지막 날에 다른 운명으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심판하기 이전인 지금은 현재 섞여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비유와 비유가 가리키는 실제 사이의 유사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점들이 전혀 관련이 없습니까? 물고기는 잡아서 잡아먹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아먹나요? 아니란 말이죠. 그것은 유사점이 아니라 대조점이죠. 어부는 물고기를 잡을 때, 무엇이 잡힐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어떤 사람이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계시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대조점이지 유사점이 아닌 것이죠. 그물을 던졌을 때 그 물 안에 들어오지 않고, 여전히 호수 안에 있는 물고기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에 운명에 가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어부는 한 번만 잡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잡으러 가고 또 잡으러 갑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가 물고기를 전혀 잡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가 가지고 있는 한계인 것이죠.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면서 성경은 대부분 비유의 언어로 되어 있는데, 이 비유를 바라볼 때 유사점이 무엇인가에 착안해서 성경을 해석해야지, 그 유사점이 아니라, 대조점 차이점마저도 유사점이라고 착각해서, 성경을 이해하다가는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물의 비유에서는 핵심 비유가 무엇이냐? 핵심 요점이 무엇이냐면,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악한 사람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 우리는 함께 섞여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비유가 해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첫 번째는 심판 날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다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의인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고, 참된 신자와 가짜 성도가 섞여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같이 공존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참된 믿음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섞여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종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닌 가짜 믿음의 사람이 섞여 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어떻게 교인이 저럴 수 있어? 세상에 어떻게 교회 장로라고 하는 사람이 저럴 수 있어? 세상에 어떻게 교회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저럴 수 있어? 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도 섞여 있는 것이고, 교회 안에도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 가짜는 누가 가짜일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가짜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도 가짜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의 털을 쓴 양의 그 털을 쓴 늑대가 같은 그런 선지자가 있을 것이다. 가짜 선지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같고, 겉으로 보기에는 제대로 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언제나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살다가, 그런 가짜를 만나거나 악인들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낙망해 버릴 것인가? 우리는 실망해 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낚싯배가 바다 위를 항해해 갈 때, 그 낚싯배에는 항상 갈매기들이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 갈매기 떼가 그 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듯이, 교회 안에 가짜 성도들이 들어와 있다고 해서, 그 가짜 성도들이 교회의 구성원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정말 좋은 교회 완벽한 교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만들기가 어려워요. 언제 가야 이것이 해결돼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가야 해결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진짜 성도도 있고, 가짜 성도도 있고 다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다 섞여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가짜라고 하는 것을 숨기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에 드러나게 될 때, 우리가 깜짝 놀라거나 실망하거나 혹은 낙심하고 또는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에는 가짜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위조지폐가 있는데요. 위조지폐는 진짜 돈하고 아주 비슷하게 만든 겁니다. 위조지폐를 혹시 보셨습니까? 전 아직 못 봤습니다. 하지만 위조지폐는 진짜처럼 만들었는데 진짜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위조지폐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짜 지폐, 화폐의 그 가치를 훔치기 위해서 가짜 지폐가 있는 거예요. 위조지폐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가 경제생활을 하다가 위조지폐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세상에 위조지폐가 있구나. 다시는 경제활동 안 해야 되겠다. 다시는 돈을 사용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시나요? 아니요. 위조지폐에 잘 분별해서,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분별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는 거죠.

오늘날에는 수많은 엉터리 보이스피싱, 전화와 보이스피싱, 문자들이 보이피싱은 보이스피싱 문자가 아니고요. 아무튼 아주 스팸 문자들이 우리의 안에 자꾸만 전달이 됩니다. 저한테도 그런 문자가 왔어요. “아빠, 나 휴대폰 액정 깨졌어.” 깜짝 놀랐어요. 우리 딸이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나? 보이스피싱이라든지, 사기꾼인 것이죠. 그런 가짜 문자 나를 속이기 위해서 보이스 피싱하는 그런 사람들 어떤 보이스 피싱하는 거 들어보셨어요? 어떤 사람이 보이스피싱을 한 겁니다. “여보세요. 아무개 씨죠? 아무개 씨, 아버님 계시죠? 아버님 지금 병원에 입원해서 위독하게 됐습니다.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 아버님 장꽐라예요“ 하면서 놀리는 그런 보이스 보이스피싱을 들어봤는데, 보이스피싱 전화가 우리들에게 오고, 가짜 문자가 우리들에게 오니까, 그러면 우리는 다시는 전화를 안 받겠다. 다시는 문자를 쓰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를 분별하면서, 사용하겠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맞는 것이죠.

우리 가운데는 돌팔이 의사들도 있습니다. 의사가 진짜 의사가 아니라 가짜 의사이고, 또 환자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알고 있는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정말 착취를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큰 피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면 아 이제는 내가 병들어도 병원에 안 가야 되겠다. 다시는 치료 안 받으러 가야 되겠다고 결론을 내릴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의사가 누구인가? 분별해서 다녀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혹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가짜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믿음을 저버릴 이유가 아니라, 분별하면서 살아가야 될 이유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아야 되는데, 왜냐하면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들은 절망적일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면 참 모순된 세상 아닙니까? 이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정말 정의가 바로 서고 모든 것들이 참 바르게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이상하게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승승장구하는데, 정말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겁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계속해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진행될 것만 같아요.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세상에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단 말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저 악인은 그냥 내버려 두는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저 의로운 사람은 왜 고통을 당하는가? 우리들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그 물에 비유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마지막 날이 있을 것이고, 그날이 되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고, 그리고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악인은 영원한 심판에 처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낙담하지 말아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언젠가 그 마지막 심판의 때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해야 하는 것이죠. 지금까지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면, 그 마지막 때가 다가오기 전에,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기 전에, 그때가 오기 전에 그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지금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비유를 보면 장어와 같은 물고기가 먹을 수 있는 물고기로 변하는 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한가요?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악한 사람도 의인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선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종종 비유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장어가 먹을 수 있는 생선으로 바뀔 수 없듯이 사람은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의인이고,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어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그날이 다가오기 전에,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살아가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사람과 물고기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물고기는 장어가 먹을 수 있는 생선으로 변화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삭개오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것이고, 내가 전에는 악한 일을 하면서 세리로 살았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고, 창기로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죄악을 저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게 그게 사람의 마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그때가 오기 전에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으로 살라고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해 주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언제가 마지막일까요? 지금 당장일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어젯밤에도 그날 그때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간 사람이 있었을까요?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그냥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 간 것이고, 그리고 정말 스트레스 풀려고 그런 좋은 마음으로 갔을 거예요. 그날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면 더 이상 그 삶을 유지할 수 없고, 그 삶이 중단되듯이 오늘 우리들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우주적인 종말이든, 개인적인 종말이든, 언제든지 우리에게 다가올 텐데,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그날이 무엇같이 이를 것이다? 도둑같이 임할 것이다. 도둑이 언제 와요?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오는 것이죠.

저는 도둑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 도둑을 당했느냐? 내일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결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를 부모님과 함께 먹겠다고 생각하고 밥 먹으러 갔다 왔는데 다 없어져버린 거예요. 그때 눈앞이 노래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큰일 났다. 지금 내일 비행기를 타야 되는데, 그래서 그때 부랴부랴 새벽부터 다시 뭐 해가지고, 그래서 겨우 간신히 비행기를 탄 적이 있습니다. 그날 도둑이 올 줄 알았으면, 조심했을 텐데, 조심하고 있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도둑을 맞게 된 것이죠.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은 마치 도둑과 도둑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우리 젊은 청년들이라고 해서 안심할 게 아니에요.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

지금 이 물고기들은 어부가 데려가지 않는 그 물고기는 어디다 버릴까요? 호수에다 다시 버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또 다른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50절 말씀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그리고 매일 잠자기 전에 오늘이 마치 나의 마지막인 것인 양,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녁에 잠잘 때에도, 내일 아침에 일어날 때에도, 주여 오늘의 삶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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