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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지혜 (잠 12:18-19)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혀로서 하는 이 말이 한편으로는 가장 위험하기도 하고,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펜이 칼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하는 말인데요. 여기서 펜이라고 하는 것은 언론을 의미하는 것이죠. 언론이 그 어떤 무력보다도 더 강력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 언론이라고 하는 것도 크게 보면,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강력한 것인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도 있는, 그런 칼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속담이 되겠습니다. 흔히 우리들의 삶을, 우리들을, 인간을 둘로 구분하면, 몸과 정신, 육체와 정신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요. 영혼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고, 아무튼 육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 육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으로 우리가 나눌 수 있겠는데요. 우리들의 육신, 우리들의 몸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서는 칼과 같은 것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칼로 찌르거나 무기를 이용해서 사람을 쓰러뜨릴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의 육신은 그런 무기를 통해서 쓰러뜨릴 수 있는데, 그럼 우리의 정신적인 면은 무엇으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까? 말로써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칼이 육체를 쓰러뜨리는 무기라고 한다면, 말은 정신적인 부분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는데요. 건강한 신체의 건강한 정신이라고 하는 그 말의 의미는, 우리의 신체가 건강해야, 우리의 정신도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리고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신체가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신체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정신은 쓰러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체로는 육신이 연약해지면, 함께 정신도 무너질 가능성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꼭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육신이 망가져 버리고, 아무리 육신이 연약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정신은 전혀 손상되지 않고 오히려 강인한 정신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정신이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정신이 무너지게 되면, 아무리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육신은 무용지물이 돼 버리고 망가져 버리는 겁니다. 육신을 친다고 해서 우리의 정신이 망가지지 않지만, 않을 수 있지만, 정신을 쳐버리게 되면, 그 육신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굳이 우리가 구분을 해서, 우리들의 육신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으로 이렇게 두 구분할 수 있겠는데, 이 육신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중에서 무엇이 훨씬 더 중요하냐고 물어본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겠어요?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죠. 둘 다 다 좋으면, 더 좋지만, 그러나 육신은 정상적이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육신은 연약해진다고 할지라도, 정신이 바로 서 있을 수 있고 강인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정신이 무너져 버리면, 그 육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과 정신 가운데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정신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 따라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칼이 아니라, 말이 가장 치명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칼을 막 휘둘리고 다닌다면 무섭잖아요.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길 중간에 서서 날카로운 사시미 칼을 들고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 앞을 우리가 지나가기가 무서울 겁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 칼에 맞아서 다칠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 칼을 흔들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피해서 다른 길로 가든지, 도망가든지, 그 칼을 쓰는 사람을 피해 다녀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실 칼보다도 더 날카롭고 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을 함부로 휘두르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말이라고 하는 무기를 늘 휘두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써 사람을 무너뜨리고, 말로써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그 일들을 계속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볼 때 만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함부로 칼을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그냥 집에 있는 칼 들고 나가서 함부로 막 휘두르는 분 계십니까? 안 계시잖아요? 왜 그렇게 안 하시죠? 위험한 걸 알기 때문에, 이 칼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집에서 요리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과일을 깎을 때 사용하는 것이죠. 아주 조심해서 칼을 다루지 아니하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 제한적인 용도로만 칼을 사용하는 것이지, 칼을 늘 들고 다니면서 휘두르고 다니면서, 그냥 던져도 봤다가, 막 휘두르고 다니면서, 그렇게 칼을 휘두르면서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칼을 휘두르면서 다니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칼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말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늘 휘두르면서 다닙니다. 내가 한 말에 의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고,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든 말든,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우리들은 말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다니고 있는, 너무나도 위험한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처럼,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함부로 말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치명상을 주는 일들을 하지 않아야 되는데, 놀랍게도 말에 있어서는 모두가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고 있어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있어요. 바보와 같이 살아가고 있어요. 이 말을 사용할 줄 모르면서, 함부로 막 사용하고 다니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쓰러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그냥 말하고 다니면서, 나는 전혀 그 사람을 건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잠언서 12장 18절 말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함부로 말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까? 어리석은 자입니까?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 12장 18절 말씀도 대구법으로 되어 있는데요. 히브리 병법 평행법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앞에 있는 한 문장과 뒤에 있는 그 문장이 서로 대칭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면, 함부로 말하는 자는, 그 함부로 말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와 대비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함부로 말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함부로 말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함부로 말하는 것은 내가 한 그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냥 말해버리는 사람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말을 사용한다고 하면, 내가 하는 이 말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지, 이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정말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하고, 힘과 용기를 얻게 해주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아니면 내가 한 이 말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정말 죽을 것 같고 정말 고통스러워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말을 내뱉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부로 말을 하는데요. 함부로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저 사람을 죽여야 되겠다. 내가 저 사람을 쓰러뜨려야 되겠다. 내가 저 사람을 망가뜨려 버려야 되겠다. 내가 저 사람을 밟아버려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는 함부로 말을 하는가? 저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요.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데, 내가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고,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고, 우리 부모를 사랑하고, 우리 성도를 사랑하고, 우리 지도자들을 사랑하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다가 망할까 봐, 함부로, 그냥 내버려 두면, 이 사람이 그냥 잘못된 길로 가다가 죽을까 봐, 내 마음 가운데 사랑의 동기가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죠.

우리 아이를 볼 때 정말 안 좋은 습관이 있어요. 우리 아이를 볼 때 저렇게 놀기만 하고 공부도 안 하고 하면, 그 앞날이 정말 깜깜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하는 것이죠. 우리 아이가 이런 잘못이 있고, 이런 잘못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잘못되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죠. 우리 남편에게, 정말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고, 우리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에게 또한 지도자에게 할 말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악한 동기를 가지고, 저 사람을 밟아버려서 쓰러뜨려 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정치인들을 빼놓고는.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무 말 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모르다가 결국 문제가 심각해져 버려서, 그래서 결국 망할 것 같으니까,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죠. 동기가 너무나도 선하고 아름답고, 너무나도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진실을 사랑으로 말해 주어서,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인데요. 에베소서 4장 15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면,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해 주어서, 모든 면에서 우리 모두가 모든 면에서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 머리 되신 주님의 그 단계까지, 우리 모두가 다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가? 무엇인가 잘못이 있고,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고, 무엇인가 부족한 면들이 있다고 한다면, 못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주어서, 제 얼굴에 뭔가 좀 더러운 게 묻어 있으면, 사랑으로 말해 주어서, “목사님 얼굴에 더러운 게 묻었어요. 닦아보세요.”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그래야 다른 데 가서 창피한 당하게 되는 것처럼, 말해주어야 내가 그 더러운 것을 씻고, 그래서 창피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부족한 게 있으면, 잘못된 게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서로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 주어서, 그래서 영적으로 함께 성숙해져 가도록 만든 것이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정으로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목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침묵할 게 아니라 말해야만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동기가 괜찮으면 동기가 좋으면, 그러면 다 괜찮은 것인가? “내가 좋은 선한 동기에서 말하기만 하면, 괜찮은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태풍이 와서 우리나라에 엄청난 큰 피해를 입혔는데요. 힌남노라고 하는 태풍이 불어서 포항 지역에 물난리가 났습니다. 물난리가 난 그 상황 가운데서, 아파트 관리 직원이 다급하게 아파트에 전체 방송을 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지하에 침수가 될 우려가 있으니, 차량을 지하에서 빼내는 것이 좋겠다고 방송을 한 것이죠. 그렇게 방송을 한 것은, 그것은 선한 동기였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순식간에 물이 차오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했던 말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선한 동기로 했던 그 말에 의해서, 차를 빼러 갔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어요. 나는 정말 선한 동기로 아파트 주민의 재산을 보호해 주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당연히 알려주어야 될 일이기에, 그래서 했었던 일인데, 그런데 그 말이 그 말 때문에 내려갔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언제나 우리들의 말 가운데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한 말이에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 가족을 위해서,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사랑으로 했던 그 말들인데, 그래서 정말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말을 했는데, 우리가 했던 그 사랑의 말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폐부를 찌르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고, 완전히 망가져버리게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을 했으나, 오히려 자신감은 더 없어져 버렸고,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말을 했으나, 오히려 더 불신하게 되어 버렸고, 나는 정말 선한 목적으로, 이 사람을 위해서 정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다 다 실패해 버리고 맙니다.

마치 우리가 강아지들을 대하는 것과 같아요. 강아지에게 강아지를 만났는데 강아지가 달려듭니다. 달려드니까,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강아지 들어오지 말라고 “오지 마” 그러면서, 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강아지는 그걸 보고 “아, 나랑 같이 놀자는 이야기구나. 멍멍멍멍” 하면서, 더 달라드는 거예요.

지혜로운 자는 그 말을 양약과 같이 하는데,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한다. 어리석은 자를 말을 함부로 해서, 그래서 칼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이야기해야 됩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함부로 말하면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한 그 말이 상대방에게 전달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될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그래서 이 말이 지혜로운 말인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말인지, 분별하면서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고 정답을 말하면, 그러면 다 괜찮은 줄 알아요. 우리 전도가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전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진리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 진리를 말하고, 정답을 말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전도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전도의 말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나는 절대로 교회에 안 가겠다고 하는 다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공중(公衆)에서 큰 소리로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소리를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 전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아, 저분들은 뭔가 정말 깨달은 게 있으니까, 저렇게 소리 지르나 보지. 나도 좀 한 번 교회에 가볼까?”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미친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절대로 교회 근처에서는, 그 교회 근처에 가지 않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다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겁니다.

옳은 이야기를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이 될지 계산해 봐야죠. 수를 한번 읽어봐야죠. 수를. 바둑을 둘 때, 여러분 가운데 바둑 잘 아시는 분 계십니까? 바둑 몇 급까지 두십니까? 몇 단 두시는 분 계십니까? 저는 바둑 이래 봬도 18급입니다. 18급은 그냥 그냥 바둑은 흰돌 까만 돌 아는 정돈데, 그런데 바둑 고수들을 보니까요. 몇 수를 앞에 봅니다. 몇 수를 앞에 봐요. 초보는 어떻게 둡니까? 바로 내 눈앞에 있는 돌 하나 따기 위해서, 그거 포위해서 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고수는 안 먹어요. 그 돌을 따지 않아요. 오히려 돌을 내줘요. 그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저곳에, 돌을 하나 딱 놉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또 보고 있다가, “아니, 저런 깊은 수를?” 하면서, 장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곳에 하나 돌을 딱 놉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쫙 보고 있다가, “아니, 저런 깊은 수를?” 하면서, 또 고민을 하다가, 또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도를 딱 넣는 거예요.

고수들이 만났습니다. 고수들이 바둑을 딱 두는데, 어떤 먼저 흑을 가진 바둑을 두는 사람이 돌을 하나 딱 놨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대방이 그걸 딱 보고 있더만, “아니? 내가 졌습니다.” 모든 수를 다 읽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냥 해버리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몇 수를 내다봐야 되는 것이죠.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은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이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 것인가를 계산해 봐야 하는 겁니다. 그게 지혜인 것이고, 함부로 말하는 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생각이 났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머릿속에 말이 떠오르면, 이 말이 어떻게 이해되고,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 또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한 번 생각해 보고, 또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말을 생각나는 대로 즉시 해야 하나요? 좀 더 생각해 봐야 되나요? 좀 더 생각해 봐야죠.

야고보서 1장 19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칭찬과 격려를 하는 말을 해야 하고, 지적하거나 혼내거나, 불평하거나 여러 가지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해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말해야 하는데,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정말 행복해질 수 있도록, 정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엄마 아빠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엄마 아빠라고 하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이야기해줘야 되는 것이죠.

나의 아내를 향해서, 나의 남편을 향해서, 그냥 말 나오는 대로 해버릴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떻게 느껴지게 될 것인지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냥 감정 상하는 대로 기분이 나쁜 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숙고하고, 생각하고 계산하고 또 생각한 다음에 그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왜 우리 아이들이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우리 남편이 저따위일까요? 그것은 다 내가 만든 거예요. 내가 함부로 내뱉었던 그 말이 비수가 되어서, 우리 아이들을 잘라버렸고, 우리 남편을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고, 내 말이 그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었고,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든 겁니다. 내가 지혜롭지 못하게, 나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했지만, 그러나 감정에 따라서 내가 화풀이하기 위해서 말을 했었을 뿐이지, 정말 우리 아이들의 영적인 유익과 우리 가정의 행복과 정말 우리 교회의 행복을 위하여 차분히 깊게 생각하면서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마치 조폭들처럼, 길에서 칼을 함부로 휘두르고 다니는 그런 조폭들처럼, 우리가 말을 함부로, 우리 가정에서 함부로, 우리 교회에서 함부로, 우리가 있는 그 모든 것에서 말에 칼을 함부로 휘둘러 버렸기 때문에, 모두가 다 상처를 입고, 그리고 그 안에 쓰라림이 생기고, 분노가 일어나고, 결국은 망가져 버리는 그런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내게, 칼의, 칼 같은, 칼과 같은 그 혀가 있다고 하는 것도 모른 채, 함부로 말을 해버려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그리고 그 지혜로운 자가 하는 그 말은 양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칼은 위험한 것이고, 치명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 그렇게 아주 위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말이 양약과 같을 수도 있는 겁니다. 말이 천냥 빚을 갚기도 하는 겁니다. 아무것을 가지지 않았어도,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육신이나 재물이나 이런 것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 우리가 지혜롭게 말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우리 교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이유는, 마치 고슴도치와 같이 말들을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말을 해주어야 사람들이 끌리게 되어 있고, 나에게 다가올 수 있고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고, 내가 차가운 말을 하고, 칼과 같은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우리 주변에서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떠나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말,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고, 담대하게 만드는 그런 말, 슬픔에 빠진 자들,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 기력이 없는 자들에게 놀라운 힘을 얻게 만들어주는 그 사랑의 말을 우리 모두가 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얼마나 실패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들을 정말 좋은 아이로 성장시키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으나, 지혜롭지 못해서 함부로 소리 질렀고, 함부로 말을 해서 결국 더 심하게 만들어 버린, 그래서 모든 그 잘못들이 저의 책임일 수밖에 없어서 너무나도 안타까워요.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면, 제가 실패했던 그 실패를 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부족한 사람은 우리 성도님들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위로와 격려 때문에, 그 양약과 같은 말 때문에, 너무나도 큰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정말 제가 설교를 했는데, 설교하는 내내 너무나도 힘들고, 너무나도 이번 설교는 내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설교를 하는 내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예배를 앉아서 드리는 성도님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제대로 준비되지 아니한 어설픈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에게 너무나도 죄송하고, 너무나도 정말 부끄러워서, 예배 마치고 성도님들과 함께 인사를 나눌 용기조차 나지 않은 채, 예배를 마치고, 문 앞에 서 있는데, 참 연세 많으신 우리 어르신들 나오시면서, 제 손을 붙잡고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은혜 너무 많이 받았어요.” 하는 그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거짓말인 거 아는데, 너무나도 힘이 들어 내가 쓰러지지 말라고 내가 자신 있게 사역하라고 해주는 그 말 한마디 들으면서,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연약해서, 우리는 사랑의 말을 하기보다는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에 죄성이 너무나도 강해서,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포장을 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분풀이하고 있는 것이고,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분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 우리는 정말 말에 있어서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우리의 부족한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바로 우리들의 그러한 죄악 때문에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셔서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하나님 고쳐주옵소서. 오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이 어리석은 이 혀에 세례를 베풀어주시고, 정말 한 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리들의 연약한 안목에 능력을 더해주셔서, 정말 지혜롭게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도록, 주여 만들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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