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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금과 은 (약 5:1-6)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금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금욕주의적인 경향이 있는데요. 예를 들자면, 먹지 말고 금식해야 하는 것을 거룩하게 여기고, 말하지 않고 침묵해야 하고, 결혼하지 말고 혼자 독신으로 살아야 하며, 돈을 버리고 무소유로 살고, 쾌락을 즐기기보다는 고행을 하는 것이 그게 영적으로 뛰어난 일이라고 가르치는 게 이 세상 대부분의 종교들이 가르치는 금욕주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상하게도 종교라고 하는 그런 것은 우리들의 인간의 모습들을 억압하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억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종교적인 가르침에 열광하면서 따라가곤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도 그런 금욕주의로 이해하려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그 원리는 이 세상에 금욕주의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탐욕주의는 더더욱 아닙니다. 탐욕주의도 일종의 종교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세상의 종교는 탐욕주의로 치우치든지, 아니면 금욕주의로 치우치든지, 양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으면서도, “무소유로 살아야 된다. 찢어지게 가난해야 그래야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요. 성경의 가르침은 때때로 금식해야 될 필요성에 대해서 말을 하기는 하지만, 금식을 하는 게 무조건 최상의 신앙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말을 절제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지만, 아예 말을 안 하고 무건 수행을 하는 게 최상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결혼을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무절제한 그런 쾌락을 장려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고행을 하면서 살아야 그게 진짜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잘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요. 성경에는 부에 대한 탐욕 그리고 이러한 과도한 욕심에 대한 경고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야고보서 5장의 말씀을 우리가 함께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누가 들어야 할 메시지일까요? 누구에게 주는 메시지일까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그랬으니까, 부유한 자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은 부자들에게 대한 경고이고, 다시 말하자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부자로 살면 안 된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무소유로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 이 부에 대한 경고가 많이 있고, 가난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냥 얼핏 생각하기를 “우리 크리스천들은 부자로 살면 안 된다. 그건 죄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오늘 메시지가 주어진 것은 모든 부유한 사람들을 향해서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있고, 조롱하고 있는 불신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불신 부자들을 향해서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불신자들은, 특별히 부자들은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조롱하기도 하고, 박해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이 부자들이 크리스천들을 조롱하는 경우가 더욱 많았는데요.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추악한 방법을 다 사용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 부자가 되었을까요? 자기 밭에 곡식을 추수하라고 일을 시켜놓고, 그 노동자들에게 삯을 주지 않는 겁니다. 노임을 지급하지 않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노동 착취를 하면서까지, 그렇게 부를 축적했던 것이죠. 4절 말씀에 그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사악한 부자들은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기까지도 했는데요. 6절 말씀에서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자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죽였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부자들이 직접 살인을 했다고 하는 의미로 보기보다는, 아마도 간접적인 살인을 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마땅히 주어야 할 수고의 대가를 주지 않고, 노동 착취를 하게 해서, 그래서 사람들이 가난에 찌들어 살아야만 했었고, 그 지독한 가난함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죠. 더 나아가서 그 당시에 부패한 사법기관에 사람들을 재판에 넘기고, 그리고 사형을 시키기까지 하는 일들을 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정의롭지 못한, 그리고 부패한 사법 시스템을 통해서 탈취하고 죽이고 있었던 일들이 초대교회 당시에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법이 정의의 편에 서 있기보다는 불의의 편에 서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고,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되어 오고 있는 일인데요. 이렇게 사악한 부자들이 그렇게 나쁜 짓을 통해서 탐욕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일 때, 그때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크리스천들이었던 것이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런 크리스천들이 불신 부자들에 의해서 착취를 당하고,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그런 일들까지 있었던 것이 초대교회의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오늘 야고보서 5장의 말씀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부자들 성도들 중에서, 부자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는 경고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이 불신 부자들이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압제하고 착취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을 때에, 그런 불신 부자들을 향해서 해주는 경고의 말씀이 오늘 야고보서 5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부자들을 향해서 해주는 경고의 말씀이 어떤 내용이죠? 야고보서 5장 2절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의 장점이 무엇이죠? 썩지 않고 녹슬지 않는다는 게 장점일 겁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썩어버리잖아요? 사과나 배나 상추나 이런 식물들은 많이 있으면 좋기는 한데, 많이 있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은, 가지고 있다 보면 다 썩어버려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겁니다.

또 다른 물건들은 어떻습니까? 녹슬어 버리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오래 두면 시간이 지나서 다 녹슬어버려서 쓰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철로 만든 그런 제품들, 정말 좋아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 녹슬어 버려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하락해 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금과 은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세계의 모든 통화가 금을 단위로 해서, 금을 본위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고, 사람들이 금을 모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금이라고 하는 것은, 은이라고 하는 것은 녹슬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오래되어도 이 금과 은은 녹슬지 않는 것인 것이죠.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썩어버리고 녹슬어 버리지만, 이 금은 언제든지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금만큼은 은만큼은 그 가치가 하락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재물을 모아두는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 5장에서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의 금과 은이 녹슬어 버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녹슬어 버릴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런 표현을 통해서 전달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그러한 불신자들 부자들이 가지고 믿었던 것들이 결국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재물이든 옷이든 금이든 은이든 그 어느 것도, 내가 믿었던 것들이 결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을 경고해 주는 말씀이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의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요. 만일 야고보라고 하는 사도가 오늘날 우리들을 향해서 편지를 썼다고 한다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고, 여러분들이 사모았던 부동산은 그 땅값이 완전 떨어져서 더 이상 쓸모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 마치 방사능이 퍼져서, 그 지역은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는 땅이 되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고, 여러분들이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은행 예금은 은행이 파산해서 되찾을 수 없고, 여러분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는 망가져 버린 것이라고, 그렇게 아마 경고를 내렸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야고보서 5장에서 내리고 있는 첫 번째 경고가 무엇이냐면, 그 부자들이 가지고 있었고, 자랑하던 그 모든 재물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은 없어질 것이고, 썩어져 버릴 것이고, 녹슬어버릴 것이고, “결국 마지막 때에 우리를 살려낼 만한 물건들이 되지 못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믿고 있지만, 의지하고 있지만, 그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두 번째 경고가 무엇인가요? 두 번째 경고라고 하는 것은 부를 얻기 위해서 악을 행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기도 했고, 빼앗아 버렸는데, 그리고 그렇게 행동을 했어도, 아무런 심판이 없는 것처럼 생각돼서, 그냥 악을 계속해서 저질러 왔는데, 그런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악에 대해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요. 불신 부자들이 크리스천들을 압제하면서, 폭행하면서, 그리고 착취하면서,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게 만들었을 때, 그런 사람들이 전혀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견뎌온 것이죠. 썩어 빠진 사법 시스템을, 충분히 돈을 이용해서 권력을 통해서 요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정권을 잡은 자들은 자기편이기 때문에, 계속 뒷배를 봐줘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냥 계속해서 잘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었을 것인데, 오늘 야고보서 5장 4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보라 너희 밭에서 주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착취했고, 그래서 내가 돈을 많이 벌어들였을 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주지 않아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울부짖음, 나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있었던 그 사람들의 그 절규가 누구에게 들린다? 하나님에게 들리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 옛날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가인은 아벨을 쳐 죽였는데요.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아무 증인도 없어서 몰래 죽였을 때, 가인은 자신이 죽였던 그 일이 발각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해 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4장 10절 말씀에,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던 아벨의 피가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고,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규가 하나님 앞에 들려지고 있는 것이고, 내가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아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절규가 하나님 앞에 들려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안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안 듣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핏값을 찾을 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 불신 부자들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말씀의 요지가 되겠습니다. 만일 이러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오늘 야고보서 5장 1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부자들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안전한 줄 알았지? 너희들이 괜찮은 줄 알았지? 이렇게 악을 행하고 나쁘게 행해도 아무런 심판이 없으니까,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울고 통곡하라.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울부짖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무엇이 다가올 것이다? 고생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울고 통곡하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서 5장 1절에서 “고생”이라고 번역된 말은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고생”이라고 번역하려면 “좀 그까짓 고생이야. 좀 하고 말면 그만”이잖아요? 하지만 헬라어 원문의 의미는 “고생”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 한번 보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에게 재난이 닥칠 거다. 불행이 닥칠 거다. 비참함이 닥칠 거다. 영어로 misery가 올 거다. 이 말이에요. 단순히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단순히 고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비참한 일이 너에게 일어날 것이다. “정말 엄청난 재난이 너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지금까지 나쁜 일을 해왔던 악한 자들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울면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야고보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말을 들어야 될 이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될 사람들이 누구예요? 불신 부자들이 이 경고를 들어야 하는 것이죠. 지금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면서, 탐욕에 찌들어서 온갖 착취를 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포악한 짓을 저지르면서 부를 모으고 있는 그런 불신 부자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니까, 누가 이 말을 들어야 돼요? 불신 부자들이 이 말을 듣고 돌아와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 편지는 누구에게 쓰여진 편지입니까?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쓴 편지예요. 야고보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이 편지를 보내면서, 그 교회 사람들이 들어야 될 메시지가 아니라, 불신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여기다 적어놓은 것이죠. 성도들이 읽을 편지에 불신 부자들이 읽어야 할 내용을 담아 놓았다고 하는 것이 조금 약간 이상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이 읽을 이 편지에 불신 부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불신 부자들의 횡포와 착취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성도들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성도들의 모습은 불신 부자들 때문에 지금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믿음을 지키려고 사는 가운데, 여러 가지 참 불리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있는 것, 빼앗기기도 하고, 착취당하기도 하고,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있는 거예요. 왜? 믿음 때문에.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렇게 불이익을 주고 있는 불신 부자들을 보니까, 그 불신 부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는 것만 같아요. 악을 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잘 나가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상황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흔들리기가 쉬운 겁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가고 있고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고 악을 행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들은 변절하기가 쉬운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면, 그런 불신 부자들이 악을 행하면서 물질을 얻고 있고, 착취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이 경고의 말씀을 여기에 써놓은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렇게 불신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재물들 옷들 금과 음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될 것이다? 썩어질 것이다. 그거, 녹슬어 버릴 거다.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그 악과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는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믿음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성도를 박해하며 착취하고 온갖 탐욕에 짖은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거예요. 선한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잘 나가는 그런 정말 황당한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거예요.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억울하고 정말 치사한 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는데, 그런데 정말 불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나가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 성도들은 종종 혼란스럽게 되는 겁니다.

이거 내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닌가? 그냥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그래야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유혹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런 악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의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우리들을 착취해버리고, 우리 것을 빼앗아가 버리고, 우리를 부당하게 재판에 넘겨서 그래서 억울하게 엉뚱한 판결을 받게 만드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늘 메시지에서 주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원칙이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원칙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믿음 때문에 부당하게 박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로마서 12장 19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내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믿습니까?

우리를 억울하게 박해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나를 괴롭게 하는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를 향해서 원수를 갚아버리고, 싸워서 그래서 그들을 짓밟아버리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내가 승리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를 부당하게 정말 힘들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을 짓밟아버리고 콧대를 눌러버려서, 그래서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렇게 원수를 갚아버린 일들을 할 게 아니라, 누구에게 맡겨라? “하나님께 맡겨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며,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정의로우신 그 하나님께서 그 원수들을 향해서 심판하실 수 있으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우리가 만일 부당한 취급을 당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원수를 갚을 게 아니라, 모든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려라.

오늘 야고보서 5장의 말씀은 무엇이냐면, 그 부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심판하실 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들이 쌓은 재물이 오히려 그들을 죽일 것이고,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고, 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경고의 말씀으로 보여주시면서, 성도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가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하나님 아래 심판에 맡겨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무엇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불신 부자들에 의해서 착취를 당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재판에 끌려가게 되고 힘든 일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면, 절망하고 괴로워할 게 아니라, 그것이 복된 일이라 기억하고, 기뻐하고, 오히려 하늘의 상이 클 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는 게 성도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은 한 번도 이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성경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이 말씀을 마음속에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억울할 수 있어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정말 우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정말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악한 자가 승리하고 선한 자가 많은 것 같은 그런 상황들을 만나게 될 때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모든 심판은 하나님 앞에 맡겨야 할 것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누구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으나, 의인이셨으나, 우리 때문에 억울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져야만 해야만 하는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런 죄가 없었던 그분께서 채찍을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며, 그리고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영이나 되는 그 전사들을 동원해서, 저항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묵묵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믿음의 이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그 옛날 이 이야기가 초대교회 일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도 늘 반복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손해 보는 일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들을 참 이용해서 온갖 착취를 하고 온갖 잘못된 일들을 할 때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망하거나 믿음을 잃어버릴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가 스스로 원수를 갚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절망할 것도 아니라, 주님만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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