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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과 거룩 (히 12:14-17)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을 합니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토끼를 잘 간수하려고 하면, 산토끼를 잡을 힘이 없고, 산토끼를 잡으러 간다고 하면, 집안에 있는 토끼를 놓치게 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집 도끼와 산토끼를 모두 다 잡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불가능하다고까지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집토끼와 산토끼가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순간에 사람들은 저울질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집토끼가 좋은가? 산토끼가 더 좋은가를 저울질하고, 그래서 어차피 둘 다 잡지 못한다고 한다면, 더 좋은 것을 잡는 선택을 하는 게 우리 사람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런 난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잡으면 저것을 놓치고, 저것을 잡으면 이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화평과 거룩이라고 하는 토끼입니다.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다 보면, 이웃들과 화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가 되기 쉽습니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속담이 있는데요. 과학적으로는 맞는 말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 속담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이 너무 청렴해 보이면, 그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신앙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며 살 때, 그 거룩을 추구하며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수하게 살려고 하게 되면, 안타깝게도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느냐면,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죠. 술친구들이 저리 떨어져 나가게 되고,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우리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가 외톨이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그런 당황스러운 모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하다 보면 타락하기가 쉬운 것이죠.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다 보면, 그들이 하는 잘못에 동참할 수도 있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다 보면, 그렇다 보면 거룩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먹과 어울리다 보면 먹물이 튀게 되고 묻게 되는 것이죠. 인주와 어울리게 되면, 그 인주의 그 빨간 것이 묻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먹다 보면, 결국 옷에 음식물이 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가 거룩하게 순수하게 내 신앙을 지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더러움이, 세속적인 것이 우리들에게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이웃들과 화평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두 마리 토끼와 같아서, 둘 다 추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가 주를 보려고 한다고 하면, 모든 사람과 화평함도 추구해야 되고, 거룩함도 추구해야 되고, 이 두 마리 영적인 토끼를 다 잡아야 되는 것이지, 거룩함만 추구하거나 이 모든 사람들과의 화평함만 추구하면서, 두 마리 토끼 가운데 한 마리의 영적인 토끼만 잡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주님을 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화평함도 얻어야 하고, 거룩함도 얻어야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이지, 그 둘 가운데 하나만 얻거나, 아니면 둘 다 다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볼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주님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주님을 본다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영적인 하나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신 영이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성경에는 종종 주님을 본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그 영이신 하나님이신 그 주님을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팔복이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말은 팔복에서는 어떤 말로 다르게 표현되고 있냐면, “천국이 저의 것이다. 배부르게 될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바꾸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러 말로 표현되고 있지만, 팔복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것은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냐면,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말로, 구원을 받는다,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말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하여 오늘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누려야 할 것이고, 동시에 거룩함을 누려야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단순히 거룩함에만 있지 않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눈여겨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러면 다 된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거룩해지기만 하면, 그러면 다 된다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 1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돼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다시 말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거룩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거룩의 그 수준이 어디까지 거룩해져야 되는가?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단계까지 올라가는 게, 우리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내가 거룩하니,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그게 우리들의 영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함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조금만 거룩해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되냐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깔보기 시작하고, 비방하고 정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가 쉽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하다 보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거룩하게 살고 있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깔 보고 비방하고 정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나와 같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자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멸시하는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이 누구냐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너무나도 쉽게 그러한 함정에 빠졌는데요. 거룩함을 추구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되는데,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다가 누가 보이냐면, 우리 옆에 사람들이 보이는 겁니다. 마치 달리기를 하다가 보면 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야 되는데, 내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따라왔는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인 마라톤을 하면서, 저 목표를 향해서 계명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그 푯대를 봐야 되는데, 푯대를 보지 않고, 내 옆에 누가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내 뒤에 누가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보이면서,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증오와 멸시의 대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동적으로 솟아나게 되고, 그리고 그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하는 경향들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화평하려면, 화평하지가 않는 거죠.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그런 이웃들과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참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웃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평이 빠져버린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부터 35절의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인 것인데, 이런 계명에 순종하는 자가 거룩한 것이고요. 이러한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룩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내가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정작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깔보고 멸시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거룩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고 거룩과 화평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웃들과 화평하는 것,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이웃들에게 인자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그 모든 것들이 거룩이라고 하는 큰 그림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화평과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두 마리의 토끼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거룩해지려고 하면, “저 나쁜 인간들하고는 내가 가까이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이 화평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고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다 보면, 내가 거룩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화평의 이런 토끼를 잡아야 되는가? 거룩이라고 하는 토끼를 잡아야 되는가?”라고 하면서 당황해하는 거죠. 도대체 어느 토끼를 잡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두 번째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화평이 무엇인가? 거룩이 무엇인가? 화평은 거룩 안에 포함된 거예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화평이 빠져버린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웃들과의 사랑이 빠져버린 거룩은 거룩이 아니라는 거예요. 화평이 포함된 거룩이어야, 진짜 거룩이지,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포함된 것이 거룩이다 하는 것입니다. 참된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과의 화평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 보면, 참된 거룩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이웃과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거나, 내 신앙을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한 조롱하는 그런 이웃들과 싸우려고 들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경향들이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종종 영적인 전투를 오해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전투가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 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 나의 거룩을 지키기 위한 싸움인데, 그러한 싸움은 무엇인가? 사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전투는 무엇이냐면,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유혹이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인 전투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늘 두 가지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죠. “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믿음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음성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음성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네 자존심을 지켜라. 네가 그렇게 무시당하며 살지 말고, 가서 싸워라.”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즐겨라. 그냥 편하게 살아라. 교회 안 나가도 괜찮은 거 아니냐? 그냥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라. 예배드리지 않고, 그냥 살아도 괜찮다.”라고 하는 그런 사탄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고, 저 미운 사람을 미워하라고 하는 그런 사탄의 음성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에 들리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그런 사탄의 음성을 싸워서, 하나님의 소욕으로 사탄의 소욕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것이 영적인 싸움인 것이죠.

어느 날 다윗은 왕궁 위를 걷다가 저 멀리 목욕하는 여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밧세바를 보게 되는 그 순간에, 그의 마음 가운데 음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음욕이 들었을 때 그것은 벌써 사탄이 유혹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한 유혹 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싸워서 이기고 죄를 짓지 않는 결단을 하는 것이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내적인 싸움 영적인 싸움인 것이죠. 안타깝게도 다윗은 그러한 영적인 싸움에서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죄악을 저지르게 되어 버린 것이죠. 영적인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인데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은 욕구들이 솟아오를 때, 그런 사탄의 유혹이 있을 때, 그것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오해하느냐면, 우리 밖의 싸움으로 오해를 합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을 방해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막고, 나의 믿음의 길을 장애를 두는 그런 모든 것들과 싸워서 그런 자들과 싸워서 내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전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전투를 해야 된다고 선동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웃들과 싸우기 시작한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이웃을 미워하게 만들고, 그래서 이웃과 화평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사탄의 유혹에 우리가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싸워서,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쟁취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지 못하고 싸우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사탄에게 진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길에 다윗을 비난하고 싸움을 걸어오는 엘리압이라고 하는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을 향해서 비난하고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네가 무슨 이유로 전쟁터에 왔느냐?” 하면서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그 다윗을 비아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충동질을 했을 겁니다. 너를 모욕하고 무시하는 네 형 엘리압과 싸워서, 그 엘리압을 제압해 버리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그 다윗의 마음 가운데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때 엘리압과 싸워서 그리고 엘리압을 제압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러면 싸움에서는 이겼을는지 몰라도, 사탄의 유혹에 지게 된 것일 겁니다. 사탄의 유혹에 굴복한 것이고, 사탄의 노예로서 굴복해버린 영적은 전쟁에서 진 싸움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순간에 다윗은 지나쳐 버립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은 골리앗이지, 엘리아 자기 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압은 나와 함께 협력해야 될 동지인 것이지, 같이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그 순간에 다윗은 그 자리를 지나쳐 버리고 말고, 그리고 골리앗에게로 걸어가서 싸운 것이죠.

그런 유혹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되었죠. 한 번은 사울 왕이 굴 속에 들어왔을 때, 한 번은 그냥 광야에서 사울이 자고 있을 때, 다윗은 그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 가운데 그 사울 왕을 죽여야 된다고 하는 사탄의 음성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가운데도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서 계속해서 사탄의 음성을 들려주는 겁니다. “지금 사울 왕을 죽이십시오. 그 사울 왕을 죽이고,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 나쁜 왕 사울 왕을 죽여버리고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유혹들을 듣게 된 것인데요. 사탄의 충동은 언제나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나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거룩을 위장해서 우리들에게 유혹하는 것이죠. 그래야 속아 넘어가니까요. 만일 사탄이 우리를 향해서, “너 나쁜 짓을 해. 악한 일을 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는 항상 어떤 식으로 유혹하냐면, 거룩을 위장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겁니다. “저 나쁜 왕 사울 왕을 죽여버리고,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느냐? 사울을 이어서 두 번째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런 마음을 주면서, 그래서 저 사울을 죽이고 네가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는 유혹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혼란스럽게 되고, 속아 넘어가게 되고, 그래서 사울 왕을 죽이는 게 정의이고 사울 왕을 죽이는 게 거룩이고, 사울 왕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혹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다가와서 도둑질해라 훔쳐라 은행을 털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유혹했냐면, 배고픈데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거예요. 그게 뭐 나쁜 일이에요? 좋아 보여요. 예수님께 다가와서 사탄은 뭐라고 유혹합니까? 나에게 경배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너에게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뭐예요? 이 세상을 얻기 위해서 왔어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서, 세상의 메시아로, 세상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겁니다. 너무나도 그럴듯해 보이는데, 그 순간에 사탄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죠.

사울 왕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다윗은 넘어간 것이 아니라, 만일 그 소리를 듣고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한다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에는 성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적을 무찌르는 것은 아마 승리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하지만 그렇게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고, 영적인 전투에서 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은 그 순간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는 있는 사탄의 충동질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사울 왕을 대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이웃이 너희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면, 그 이웃들과 싸워서 이겨라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들의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라고, 칼을 들어서 그들을 물리치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이 너희를 핍박하고, 박해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고, 오늘 성경 말씀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추구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부터 2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내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누구에게 있으니?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이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악과 싸워서 이기는 건 악에게 지는 거예요. 아까 싸워서 승리하는 건 패배한 거예요. 이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지,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누구와? 우리와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만 화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고 조롱하고 우리를 모욕하는 그런 사람들과도 화평을 추구하라. 그런 화평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룩함을 잃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의 길로 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선 우리들을 보시면서 “너희들은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너희들을 상대하지 않겠다.”라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셨어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셨어요. 우리와 함께 사귀기를 원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와 사귀기 위해서 선물을 보내주신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와 다시 사귀자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 10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만일 그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한일서 4장 11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화평이 빠진 거룩은 거룩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거룩은 하나님 앞에 빵점짜리 거룩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 가운데, 화평함을, 모든 사람과의 화평을 빼어버린 채 거룩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빵점짜리 거룩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가장 힘든 일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육신의 정욕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하는 것이죠.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화목을 추구하기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꼭 닫아버리고 마음은 닫아버리고,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열지 않는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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