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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17-20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본문 연구

1. 기뻐하며 돌아온 70인의 제자들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1을 따로 세우셔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지역은 예수님께서 친히 방문하시려고 하는 지역이었는데 미리 제자들을 보내신 것이었다(눅 10:1).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이 담당하게 되는 사명이 쉽지 않고 아주 험난한 길일 것임을 미리 말씀하셨다. 그들은 마치 어린 양이 이리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눅 10:3). 원래 잡아먹힐 수 있는 나약한 양들이라는 이미지는 이방인들 사이에 있는 유대인들을 나타내는 것이었다(솔로몬의 시편 8:23, 30).2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대상인 유대인들에게 나아가야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표현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기에 과장적인 요소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어린 양이 이리들 사이에 들어가면 잡혀먹거나 찢기게 되는 것처럼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가는 현장이 녹록치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70인의 제자들은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충만했다(눅 10:17). 그들이 갔다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기쁨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발견한다. 기쁨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무서워하여 피하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명을 가지고 수행하면서 그러한 고통을 직면하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소위 불교의 관점과는 정반대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의 마음의 욕심과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마음을 비우는 것을 통해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나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서 자신을 비우면 고통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는 과연 우리가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가능성의 문제이다. 물론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음을 통해서 고통의 문제를 완화할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아무리 비우고 비워도 도무지 비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둘째는 과연 그렇게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이다.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서 부모 자식과의 관계도 끊어버리고 나 혼자 산 속에 들어가 고통에서 해방받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성경적인 관점의 기쁨의 방법은 정반대이다. 이리의 소굴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기쁨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땅에서 고통받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오히려 이 땅에서 고통받는 자들은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마 5:11-12; 눅 6:22-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는 사건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근심이 결국에는 기쁨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요 16:20-22).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믿음의 도에 굳게 머물렀다(행 5:41).

2.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셨을 때,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실 과장법적 대조(hyperbolical contrast)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기법이다. 과장법적 대조라는 수사학적 기법은 강조할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으로 부정하는 기법인데, 부정하는 내용을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을 대비하여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으로만 부정하는 기법을 뜻한다.3 예를 들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원망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신들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고 부정적인 표현을 하였다(출 16:8).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원망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수사학적 기법이 과장법적 대조기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기쁨 자체가 아예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귀신이 쫓겨나는데도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제자들의 기쁨이 궁극적으로 귀신이 항복했다는 현상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근거를 둔 기쁨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셨다. 기쁨이 결과 또는 현상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 됨을 가르치신 것이다.

복음서는 기쁨이 단순히 현상적인 결과에 따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는 여러 해 쓸 물건들을 많이 쌓아두었다는 사실 때문에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기뻐)(헬, 유프라이누 εὐφραίνου)하고 싶어 했다(눅 12:19). 이러한 부자의 생각은 쾌락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cf. 전 8:15; 사 22:13). 하지만 그러한 부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눅 12:20).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즐겼(기뻐했)는데(헬, 유프라이노스, εὐφραινόμενος) 그의 기쁨은 이 세상의 것들에 근거한 기쁨이었다(눅 16:19). 예수님은 이러한 종류의 기쁨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평가하셨다.

물론 제자들의 기쁨은 어리석은 부자의 기쁨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자들은 사역을 통해서 얻게 된 좋은 결과를 보고서 얻은 기쁨인 반면, 부자의 기쁨은 물질적 풍요로움에 근거한 기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 공통점도 있는데, 그것은 나타난 결과에 따른 기쁨이라는 점에서이다. 예수님은 기쁨의 이유가 나타난 결과에 근거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만일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뻐하게 된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는 이내 절망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에 따라 사명을 가지고 사명의 현장으로 났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항상 귀신이 항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낙망해야 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좋은 결과를 보게 될 때, 그 나타난 결과와 현상을 보고 기뻐하기 시작하면 기대하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경우에 그 기쁨이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돌밭에 뿌리어진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 하지만 이내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는 순간 그 기쁨은 사라져버리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만다(마 13:20-21; 막 4:16-17; 눅 8:13). 이러한 모습은 현상적인 것에 따라 기쁨이 좌우되는 것을 나타낸다.

복음을 들고 가는 길에는 항상 귀신이 항복하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의 선교여행을 보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오히려 바울 사도 일행을 박해하고 핍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복음을 전한 결과 좋은 결과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는 우울해 하고 절망해야 하는가?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권고하였다(갈 6:9). 실제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기뻐하였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냈지만,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행 13:52). 또한 선교여행 중에 고통을 많이 당했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행 16:25).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능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기뻐하였다(헬, 카이론테스, χαίροντες). 이러한 태도는 주를 위하여 박해를 당한다면 오히려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마 5:11-12; 눅 6:22-23).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보고 기뻐하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현상에 중독되기 쉽다. 그래서 결국 목적이나 본질을 망각하게 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바나바라는 사람이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그것을 보고 따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다. 그들도 자신들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가운데 일부를 감추어둔 것이었다(행 5:2). 만일 결과만을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바친 헌금도 기뻐할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악했다.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추구했던 것이었다.4 나타난 결과나 현상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기뻐하게 되면, 결국 죄성이 많은 인간들은 목적이나 본질을 망각한 채 결과나 현상만을 추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비슷한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서 예수님은 지금 웃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네 가지 화 가운데 하나로 선언하셨다(눅 6:25). 이 말씀은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눅 6:21)과는 대칭이 되는 개념이다. 이 말씀은 아무런 설명이 없이 독립된 경구 스타일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앞에 나오는 “너희 부요한 자”와 “지금 배부른 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 또는 물질적인 소유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에 대한 화의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참된 기쁨은 물질적 소유를 인한 것이 아니다.

3.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은 결과나 현상에 따라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그 자체로 기뻐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항상 좋은 일들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증거하면 항상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는 낙망할 것이 아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빌 4:4)는 말씀은 우리가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기뻐하라는 것인데,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기록한다(눅 15:10). 그래서 다시 찾은 양의 비유(마 18:12-14; 눅 15:1-7), 다시 찾은 드라크마의 비유(눅 15:8-10),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눅 15:11-32)에서 잃었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다. 바울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든지 절망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도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고전 15:9-10). 원래 자신이 행하던 것에 마땅한 보응은 하나님의 심판일 것이다. 그는 교회를 핍박했는데, 심지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관여하였고,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불러 주셨다. 그가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구원받을만한 행위를 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고, 주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쁨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들었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4. 기쁨의 감정과 기쁨의 의지

기쁨이란 마음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기에, 기쁨이란 감정도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감정이다. 따라서 좋은 일이 있을 때 또는 자신이 바라던 것을 경험하게 될 때 또는 예기치 못한 좋은 일들을 경험하게 될 때, 기쁨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가룟 유다의 제안을 듣고 기뻐하였고(막 14:11),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이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뻐하였다(마 2:10). 스가랴는 노년에 요한이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을 때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천사가 말하였다(눅 1:14).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뻐하는 것이며(마 13:44), 잃은 양이나 드라크마나 아들을 다시 되찾게 되었을 때 찾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눅 15:5-7, 23-24, 29, 32). 비록 주님께서 어리석다고 판단하셨지만 부자는 많은 수확을 보고서 기뻐하였다(눅 12:19). 삭개오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기뻐하였다(눅 19:6).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마 28:8-9, 눅 24:41, 52; 요 20:20). 좋은 일을 만나게 될 때 기쁨이 솟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소외되는 문제로 인하여 논란이 일어났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7명의 집사들을 선택하라는 사도들의 제안을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행 6:5). 골치 아팠던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될 때, 마음에서부터 기쁨의 감정이 솟아난 것이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실사하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부탁을 받고 살펴보는 가운데, 안디옥 교회 내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때 기뻐하였다(행 11:23). 헤롯 왕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는데, 이를 보고서 유대인들이 기뻐하였다(행 12:3). 그들이 원하던 바를 헤롯 왕이 이루어주었기 때문에 솟아오른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또한 로데라는 여자 아이는 옥에서 풀려나 대문을 두드리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였다(행 12:14).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전달하는 편지를 읽게 될 때, 그들의 마음이 기뻤다(행 15:31). 또한 바울과 실라를 지키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게 되어 크게 기뻐하였다(행 16:34). 이 모든 기쁨의 기록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가치를 두는 것들을 볼 때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감정으로서의 기쁨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기쁨에는 의지적인 요소도 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명령형이 가능하고 기뻐하지 말라는 금지명령도 가능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는 기뻐할 것이 아니고,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눅 10:20). 어떻게 기쁨이 감정적인 요소인데, 의지적으로 기쁨을 컨트롤할 수 있을까? 사실 마음과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바꿈으로써 가능하다. 기쁨이란 우리의 가치가 기대하는 만큼 또는 기대 이상으로 충족될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반응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바꾸면, 기쁨의 종류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 부요함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물질적 풍요가 보장될 때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둔다면(마 6:33), 우리의 마음이 반응하는 대상이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당하여도 오히려 그 고통이 주를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하는 일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것이고 기쁨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주님을 위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둘 때에는 그 순간에 기쁨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5: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으면 천국을 얻게 될 것임을 기억한다면,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마 5:10). 그래서 실제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을 만난다 할지라도 마음으로 그 고통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될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쁨을 가질 수 있었다(행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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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네슬 알란드 27판에서는 둘을 의미하는 “두오”(δύο)를 괄호 안에 넣었으나, 사본학적으로 72명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개역성경의 번역에 따라, 그냥 70인으로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하라. Bruce M. Metzger, “Seventy or Seventy-two Disciples?” NTS 5 (1959), pp. 299-306.[]
  2. Darrell L. Bock, Luke (Downers Grove: IVP, 1994), 188.[]
  3. A. B. Du Toit, “Hyperbolical Contrasts: A Neglected Aspect of Paul’s Style” In PETZER, J.H. and HARTIN, P.J. eds. A South African Perspective on the New Testament: Essays by South African New Testament Scholars Presented to Bruce Manning Metzger during his Visit to South Africa in 1985. (Leiden: E.J. Brill, 1986), 179-181.[]
  4. William J. Larkin Jr. Acts (Downers Grove: IVP, 1995),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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