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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족반 교재 – 제4과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

광야(廣野)에서의 독백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광야에 홀로 외로이 서 있을까요? 여기에는 물도 없고 풀도 자라지 않고 뜨거운 태양만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지쳐갑니다. 도대체 나는 왜 이곳에 서 있을까요?

원래 나는 이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내 마음을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사람과의 껄끄러운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누기 원했고, 숨기는 것이 없이 교제를 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것은 상처뿐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나는 그 사람을 향해 내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갔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안전해진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내 주변에 나를 괴롭히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광야(廣野)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광야. 낮에는 뜨거운 바람으로 숨이 막히고, 밤에는 찬 기운으로 오돌오돌 떨어야만 하는 광야 한복판에 나 홀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광야는 내가 사람들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시킨 결과였습니다.

어머니의 고백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기가 있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아기만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고,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기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데, 나는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난생처음으로 해보는 일이라 모든 것이 두려웠고, 어설펐습니다. 아기에게 좋은 것이라 생각한 것이 오히려 아기에게 좋지 못한 것이었을 때, 너무나도 괴로웠습니다.

한번은 아기가 아파서 밤새도록 울고 보채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너무나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내가 편하게 잠을 잘 수는 없었습니다. 정말 엄마가 되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것이었을까요? 나의 어머니도 나를 위해서 이렇게 길렀겠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내겐 가장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이 아이의 엄마이고 싶습니다. 사실 내가 아이를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기르면서 내가 성숙해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가 어느새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내가 아이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했는데, 사실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나였습니다.

1. 사람은 혼자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함께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전도서 4:9-11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9-11)

2. 신앙의 길을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이지만(즉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등산을 하면 쉽게 지쳐서 올라가기 힘들지만, 동료들과 함께 등산하게 되면 서로 격려하면서 끝까지 등정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혼자서 마라톤을 달리면 너무나도 힘들지만, 함께 마라톤을 달리면 해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죄인일 뿐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31-32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1-32)

유명한 병원에는 건장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온갖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를 짓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며, 그래서 영적으로 낫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실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로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심각하게 추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참된 치료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영적으로 도와주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성숙이라는 산을 함께 등정하는 셈입니다. 그 누구도 영적인 성숙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올라가다 보면 쉽게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격려하면서 같이 영적인 성숙이라는 봉우리를 향해서 올라가면, 서로가 서로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격려하는 일은 교만한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완벽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1-4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립보서 2:1-4)

4.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것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7-8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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