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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반응 (롬 6:1-4)

한 사람 때문에? (롬 5:12-21) +++ 그리스도와의 연합 (롬 6:5-11)

우리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음, 기쁨의 소식 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내 장점이 아니라, 나는 부족하여도, 나는 연약하여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비로 우리를 건져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은 정말 기쁜 소식이죠. 왜냐하면 자격 없는 자들을 향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어떤 생각이 있냐 하면, 우리가 노력한 만큼 받는다는 게,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우리가 수고한 만큼 받는 것이고, 우리가 노력한 만큼 받는 것이고, 만일 우리가 선을 행했다고 한다면 상을 받는 것이고, 우리가 악을 행했다고 하면 벌을 받는 게,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종교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은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도를 닦다 보면, 도를 닦고 또 닦고 또 닦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올라가게 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최고의 경지, 부처의 경지, 열반의 경지에까지 올라가도록, 그렇게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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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우리가 치성을 다하면, 정성을 다하고, 치성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빌면, 언젠가는 하늘도 우리들의 그 지성을 보고 감동할 거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의 시스템도 역시 종교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누가 성공하느냐? 누가 성공자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정말 뼈 빠지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실패자로서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도를 닦고 싶지만, 도가 닦이지 않는 겁니다. 마음을 비우고 싶지만, 마음이 완전히 다 비워지지 않는 겁니다. 내가 정말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부족한 게 있는 겁니다. 성공하고 싶지만 성공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하지 못하는 게, 그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렇게 부족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소식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때, 우리의 공로에 근거해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셨다고 하는 것이 그게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정말 죄가 많은 인생도 하나님께서 내 팽개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인마저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다고 하는 것이 그게 복음이고, 그게 기쁨의 소식인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들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기분 나쁜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이죠.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분 나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허탈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한테 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허탈한 소식이고, 기분 나쁜 소식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기차표를 팔 때였습니다. 요즘에는 그럴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추석이 되거나 설날이 되면 고향에 가는 기차표를 얻는 것이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습니다. 정부에서 발표를 하죠. 언제부터 귀성열차표를 판다고 하는 발표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언제부터 줄을 섭니까? 파는 그 시간에 갑니까? 그전에 갑니까? 그전에 가요. 하루 전에 가서 그때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겁니다. 내일 아침 아홉 시부터 열차표를 파는데, 그 열차표를 사기 위해서 9시에 나타나면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에 그때 가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언제 갑니까? 그 전날 가는 겁니다. 그 전날 가서 그 대합실에서 밤새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겁니다. 화장실을 가야 되면 다른 사람한테 내 자리 좀 부탁해놓고 화장실 다녀오면서, 그렇게 밤새도록 밤을 새우면서 줄을 서고 기다렸다가, 그래서 그다음 날 표를 사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기차표를 얻게 된다고 하면 너무나도 기쁘게 되는 것이죠. “야, 내가 열차표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 가지고 열차표를 샀구나.” 하는 그런 기쁨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이 열차표를 사기 위해서, 내가 9시에 가면 안 되니까, 하루 전날 가야 되겠다 하고 하루 전날 가서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가서 기다립니다. 그랬더니 벌써 줄이 길게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서서 기다립니다. 밤새도록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서 표가 매진이 되어버립니다. 얼마나 허탈합니까? 그 사람보다 더 열정을 보여주었어야, 하루 전이 아니라 이틀 전부터, 3일 전부터 나와 기다렸어야 그 표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그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리고 앞에 먼저 온 사람이 있고 나중에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을 합니다. 오늘 기차표는 줄 서 있는 대로 주는 게 아니고, 번호표 뽑아서 번호표 뽑아서 늦게 온 사람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습니다라고 발표하면 그러면 누가 좋아하고, 누가 싫어할까요? 늦게 온 사람은 기뻐하고 좋아하겠지만, 하루 전날 이틀 전날부터 와서 기다렸던 사람들은 허탈하게 되고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우리들에게 참 기쁜 소식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로 기쁜 소식처럼 들리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고 한다면 내가 뭐 하려고 열심히 살았을까? 내가 뭐 하려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고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내가 열심히 의를 행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정말 신실하게 살아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산 사람들에게만 천국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사기꾼들, 저 살인자들, 저 음란한 자들마저도 그들도 천국에 그냥 공짜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억울하겠습니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들려지는 사람은 누군가? 죄를 지은 사람은 기쁜 소식으로 들리는 거죠. “아,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렇게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 복음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가 있는데요. 탕자가 집을 떠나가 버리고, 그리고 여러 가지 죄악을 저지르며 아비의 살림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허랑방탕해버리고, 다 써버린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버리고 축하해 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큰 아들의 마음은 불편하는 겁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나는 집을 떠나지 않았더니, 나에게는 환영해준다고 하는, 축하해 준다고 하는 아무런 칭찬도 없는데, 저 나쁜 짓을 저지른 저놈은 돌아왔더니, 아빠가 그렇게 좋아해 주고, 그렇게 환영해 주고, 먹을 것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큰아들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 앞에 어떤 한 여인이 나왔습니다. 어떤 한 여인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눈물을 흘리며 향유를 붓고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떤 바리새인이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 줄 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랍비께서 저 여인을 그냥 저렇게 허용해 두면 안 될 텐데, 저 여인이 얼마나 나쁜 죄인인지를 안다면, 저렇게 놔두면 안 될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아시고 그 바리새인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누가 더 사랑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500 데나리온에 빚을 졌는데, 500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고, 어떤 사람은 50 데나리온만 빚졌는데 50 데나리온을 탕감받았다고 한다면, 누가 더 기뻐하겠는가? 누가 더 사랑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바리새인이 대답합니다. “네. 더 많이 빚졌다가 탕감받은 자가 더 기쁠 것이고 더 좋아할 것이고 더 사랑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을 향해서 말합니다. 이 여인이 지은 죄가 너무나도 커서, 그래서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사랑함이 크다고 말씀해 주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기는 하지만, 그 복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죄를 더 많이 지은 사람인 것이죠. 지금까지 바르게 살아왔던 사람,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왔던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 죄를 더 많이 지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 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은혜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죄를 더 많이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느낄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6장 1절에서부터 4절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이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장에서부터 5장까지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는데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지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버리시지 아니하시고, 그런 사람마저도 커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주게 될 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지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를 이야기로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데, 그런 축복을 더 많이 체험하기 위해서 은혜를 더 체험하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모순된 말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혼란스러웠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어느 부흥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부흥 강사 목사님이 누구였냐면, 전과가 굉장히 많으신 분이었어요. 전과가 아무튼 엄청난, 죄를 많이 지으셔가지고, 그래서 감옥에 수차례 다녀왔던 분인데, 그분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죄인마저도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그 감옥 속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까지 되셨어요. 그래서 그 목사가 되어가지고, 이제 부흥강사가 되어서 부흥집회를 하고 있는데, 부흥회를 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자신이 예전에 이렇게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그래서 쫙 설명을 해준 다음에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너무나도 커서 나와 같은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하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아, 나는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는데, 나는 어떡하나?” 제 부모님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선교사님께서 이 나라에 오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가지고, 그때부터 믿음이 연결되고, 또 연결이 되고 또 연결이 되어서 저에게까지 내려오다 보니까,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신앙생활을 해왔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하나님을 한 번도 부인해 본 적도 없고, 나쁜 짓을 그렇게 세상 말로 그런 악한 일들을 한 적도 없고, 그저 꾸준히 신앙생활을 잘 해왔는데, 저는 앞에 나가서 설교를 하려고 하면, 그런 드라마틱한 간증의 이야기를 할 게 없어요. 나쁜 짓을, 소위 말해서 그런 나쁜 짓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어서, “내가 죄를 좀 더 지어야 했었나?”라고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배도 그랬습니다. 대학 다닐 때 어떤 선배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그 선배가 저를 붙들어 놓고 이야기하는 말이 무슨 얘기를 하냐면,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를 별로 지어본 적이 없어서, 별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좀 경험하기 위해서 죄를 좀 지어봤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죄를 짓고 왔어요. 죄를 짓고 와서,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너무 행복하다.” 그러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뭘까? 큰 죄도 아니고 술 좀 마셨던 것 같아요.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대해서 오늘 성경 말씀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로마서 6장 2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에서 반대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더 많이 진 사람들에게 더 크게 느껴지게 된다고 하는 그 사실에 의해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사람, 그러니까 죄를 더 많이 지을까?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달을 수 있어.”라고 그렇게 궤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됐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받은 것이고, 죄에 대해서 죽게 된 것이라고, 오늘 말씀에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늘 죄를 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바뀌어서 거룩하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때마다 시마다 늘 잘못들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워하는 경우도 많고, 탐욕적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신앙생활에 게으름을 피우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의 탐욕을 쫓아서 가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사탄의 노예였던 신분의 상태가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사탄의 노예, 죄의 종이었지만, 죄와는 관계가 끊어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사탄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거예요. 이제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는 우리가 사탄 나라의 왕국의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죄와는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천국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티켓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입장권으로 생각하고, 승차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천국 구원 열차를 타기 위해서 승차권이 필요한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승차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 천국의 입장권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받는다고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면, 그러니까 이제는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성열차 티켓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대합실에 가서 줄 설 필요가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천국 티켓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착하게 살 필요가 있나요? 없나요?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예요. 왜?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입장권만 있으면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렇게 입장권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되면, 우리의 시민권이 사탄의 왕국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시민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어떤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남편이 그 아내 될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선물도 사서 주고 꽃도 사서 주고 이벤트도 하고, 오늘 만난 지 천일 만난 지 1,500일 하면서 기념 날을 다 챙기면서, 그렇게 공을 들여가지고, 그러니까 이 남자를 보고 이 여자는 너무나도 마음이 좋은 겁니다. 이 남자는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는구나. 이 남자가 이렇게 나를 너무나도 좋아해 주는구나. 그게 생각이 들어서 결혼해달라고 했을 때 기쁨으로 승낙하고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났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생일도 안 챙겨주고 아무런 것도 없는 겁니다. 이벤트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나도 속상해서 물었어요. 여보, 결혼 전에는 그렇게 나한테 잘해주더니, 결혼한 다음에는 왜 싹 달라졌냐고, 태도가 이렇게 변했느냐고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뭐라고 말했어요? 잡은 물고기에게 미끼 주는 어리석은 낚시꾼은 어디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근데 결혼 관계가 그건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물고기가 잡는 게 목적이고, 먹어버리는 게 목적이지만, 결혼은 결혼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함께 같이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존중하면서 행복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게 결혼이잖아요? 그게 행복의 길로 같이 걸어가는 것이고, 그게 결혼의 목적이잖아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결혼하는 것을 그저 어떤 천국 입장권을 획득하고. 기차 열차표를 획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인 것처럼, 우리가 천국이 들어간다고 하는 것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그러니까 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 번은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은 세리장이요 그 당시에 죄인이었습니다. 그 삭개오는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미워하고 무시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갔는데요. 아무런 자격도 없는 그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셨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었습니다. 이 삭개오가 잘한 것이 무엇일까요?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게 잘한 건가요? 우리가 종종 이 삭개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삭개오가 무엇을 잘했나? 자꾸 그런 데 신경을 쓰려고 하는데, 사실 삭개오가 잘한 거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늘 죄를 저지르며 살았고, 남의 것을 토색 하며 살았고, 악한 짓을 행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삭개오를 주님께서 영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습니까? 내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나를 그냥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네? “계속 죄를 더 지어도 괜찮구나”라고 하는 반응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삭개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쭈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지금까지는 돈이 우상이 되어서, 돈을 섬기느라,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속이고 취했던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돈을 우상으로 삼지 않고, 내가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물로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오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9장 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 임이로다”

이 삭개오가 이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마태복음 6장 48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거룩한 삶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통 타 종교인들을 보면 굉장히 착해요. 불교도들을 보고 이슬람교도들을 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착하게 살려고 굉장히 무던히 애를 씁니다. 이슬람교도들도 우리가 흔히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그런 인상이 많이 박혀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들은 정말 착합니다. 정말 정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원으로 쓸 때 이슬람교도들을 이렇게 쓰는 그런 정말 환영하면서 쓰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실하고 정직하고 정말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어떤 인상들이 많죠? 뻔뻔한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렇죠. 다른 종교인들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열심히 살지 아니하면 착하게 살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저 극락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을 열심히 살려고 하다 보니까, 착한 모습이 나타나는 거죠.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는 이미 구원받았어요. 죄인도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천국 입장권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열차표를 확보했다고 생각이 되니까,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구원파적인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있어서, 죄악을 마음대로 저지르면서도 뻔뻔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바른 크리스천이 아니라 그것은 성경 말씀을 오해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신실하게,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백성 한 명 확보했으니까 됐다 하고, 내 팽개쳐두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 편 하나 더 확보했으니까, 됐다. 인원 많이 늘렸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괜찮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와 사귐이 있기를 원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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