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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2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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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아버지 vs. “나의” 아버지

오늘은 주기도문 강자 두 번째 시간인데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떻게 불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아버지여”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라고 하는 말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게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로 불러야만 한다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걸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지금 (가르침의) 대상이 복수의 사람들이니까, 너희가 기도할 때 “우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한 것일까요?

어떻게 판단하면 좋겠습니까? 두 가지 가능성들이 모두 다 있는 것이죠. 첫 번째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이 “우리”라고 하는 말 자체에, 그렇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그렇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러야만 하는, 반드시 그렇게 불러야만 하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되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주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지금 제자들 복수의 사람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복수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기도니까, 공동체가 하는 기도니까, 그냥 하나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부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기도문을 보면 “우리”라고 하는 말을 빼먹었어요. 그러니까 만일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반드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런 복수형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불러야지,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라기 보다는, 그냥 상황에 따라서 “우리”라고 한 말이 들어갔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이 “우리”라고 하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겠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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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는데요. 물론 누가복음에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는 말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우리 아버지여”라고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 우리라고 하는 말이 호칭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그렇게, 내게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게 아니라, 마태복음의 표현이든, 누가복음의 표현이든, “우리에게 우리의 양식을” 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문 전체가 사실은 “우리”라고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튼 두 가지 가능성들이 다 존재하고 있는데, 그런데 아무튼 다 존재한다고 하는 얘기는 그러니까, 우리라고 하는 그 공동체성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걸로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계명에 아주 중요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크게 둘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리고 또 누구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이 율법을 요약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그리고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이중 계명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기도도 역시 나의 이기적인 목적, 나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공동체적 선, 공동체적 그런 복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 것 여기에는 그만큼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게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부르라고 한 것은, 우리가 특별히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나라 말과는 달리 헬라어나 그리고 영어권 서구권에서에서의 표현은 “우리”라고 하는 말을 별로 잘 사용하지 않는 문화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우리라고 하는 말을 아주 즐겨 사용하죠. 그래서 아내를 표현할 때도 뭐라고 표현해요? “우리 아내”라고 표현해요. 남편을 표현할 때도 “우리 남편”이라고 표현하고, 아버지 혹은 우리 자식을 표현할 때도 “우리” 아버지 “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하는 등,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말을 마치 “나의”라고 하는 말에 대용어처럼 쓰는 언어가 우리나라 말입니다.

하지만 헬라어는 그리고 서구권의 언어는 그런 식의 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분명하게 영어에서는 뭐라고 표현하죠? 마이 와이프(my wife) 그러는 거지 아워 와이프(our wife)라고 말하는 법은 절대로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단수와 복수의 구별이 확실한 언어가 서구권의 언어이고, 그리고 성경이 쓰인 이 헬라어의 그 언어의 그 특성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그렇게 표현하기보다는,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이 주기도문의 아주 중요한 근간 중에 하나가 “공동체성에 강조점”이 있다. 공동체성에 방점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어떤 한 개인의 하나님이 아니고, 어떤 한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것은, 그러니까 다른 모든 민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 계획 속에는 온 세상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 그 모든 인류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제사장 나라를 통해서 모든 복이 흘러나가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원리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그 정신이 공동체성에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양식을 달라고, 그렇게 나만 먹을 양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양식을 기도하고 있고, 그리고 서로 죄를 용서하면서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우리가 모든 유혹에서 우리 모두를 건져주시고, 공동체적으로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중요한 원리이고 주기도문도 이런 공동체성이 충분히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을 마친 다음에 마태복음 6장 14절 1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덧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다음에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면서, 그렇게 같이 사랑하며 살 것을 권고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주기도문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나만을 위한,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기도문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우리 모두가 다 복된 그런 삶을 살기 위한 모두를 위한 공동체성을 가진 기도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지난주에 질문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습니까?

2. 저주의 기도와 주기도문

그렇다고 한다면 한 번 여기서 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성경에는 어떤 기도가 있냐면, 저주의 기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저주의 기도가 있는 걸 아십니까? 있습니까? 있어요. 시편에 보면 다윗이 썼던 기도문이 시편에 여러 편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도문 가운데는 어떤 기도문이 있냐면, “하나님, 저 원수를 파멸로 이끌어주시고, 자자손손이 빌어먹게 해 주시고. 그래서 저 원수를 완전히 짓밟아 달라”라고 하는 자신의 원수를 파멸로 이끌어 달라고 하는, 그런 저주의 기도문이 구약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주기도문의 정신에 비추어 보면 그 기도문은 잘못된 기도문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부터 48절의 말씀을 보면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죠.

자 여기서 헷갈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라? 우리의 사랑의 대상에는 누구까지 포함시켜라? 원수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주기도문의, 그 기도의 제목은 주기도문의 정신은, 나만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잘 될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다윗의 시(詩)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다윗의 시는 “저 원수를, 하나님, 가만 놔두지 말고, 파멸로 이끌어 주십시오. 그 후손 그 사람을 작살내 주십시오, 패가망신하게 해 주시고, 자녀들은 빌어먹게 해 주시고, 그래서 아주 하나님께서 그 집안을 완전 박살 내달라.”라고 하는 그런 저주의 기도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제목대로 기도해야 되나요.? 다윗이 했던 기도의 모범을 따라서 기도를 해야 하나요? 문갑열 장로님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지워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누구만 사랑합니까? 우리를 향해서 좋게 해주는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워할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미워할 대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당은 어떻게 해야 돼요? 사랑해야 돼요? 박살 내 버려야 돼요? 미워해야 돼요? 동생의 자는 어떻게 해야 돼요? 사랑해줘야 돼요? 미워해야 돼요? 박살 내 버려야 돼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은 우리에게 나이스(nice)하게 대하는 사람들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우리와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고, 우리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짓밟아버리고, 파멸시켜 버려야 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저 우리끼리만 사랑 잘하면,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가르쳐 주셨냐면, 너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희 원수를 향해서라도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철천지 원수였어요. 마치 우리 남한 사람과 북한 공산주의자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듯이, 그 이상으로 싸우던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이슬람교도들을 아주 미워하고 그렇게 하듯이, 이슬람교도와 크리스천들이 서로 막 이를 갈고 막 부딪히듯이, 그렇게 아주 적대적인 세력이 바로 사마리아와 유대인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은 거예요. 그러면서 그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 원수를 사랑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너희도 가서 이같이 하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걸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냐면, 그것은 바로 “이슬람교도를 사랑해”라고 하는 그런 말과 똑같아요. 동성애자들을 사랑해주라고 하는 말과 똑같고,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해주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잘 비껴 나가냐면,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에는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비껴가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을 사랑했대 그걸로 끝이에요. 우리들의 형편에서 그 사람들이 누군가? 우리의 원수들이 누군가? 그리고 그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 우리의 상황 가운데 직접 적용하지 않고, 그냥 옛날이야기만 반복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이웃으로 사랑하는 게 어디까지 나타나야 되는가?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뭐 공산당이 돼도 좋다고 말씀드린 거 아니고요. 동성애를 해도 좋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고, 이슬람 교를 믿어도 좋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 누가 또 졸다가, 졸다가 그 얘기만 바짝 듣고, 세상에 우리 목사님이 괜찮다고 그랬더라. 그런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공동체적인 그런 가르침을 주셨고, 모두를 다 사랑하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리고 기도문에서조차 하나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로, 그리고 우리를 위한 기도로, 우리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이렇게 주셨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의 시편에는 저주의 기도가 나온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 말은, 다윗이 했던 그 기도는 그것이 잘못된 기도라기보다는, 사실은 기도가 무엇이냐면, 정답을 이야기하는 게 기도가 아니고, 우리들의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는 게 기도거든요. 그냥 아파도 “괜찮아요”. 미운 마음이 들어도 “안 미워요.” 그렇게 자신을 포장해서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게 기도가 아니고, 자신의 억울한 마음, 슬픈 마음, 분노하는 마음, 모든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이 그게 참 기도이기 때문에,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자신의 그 억울한 마음 분노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가 잘못됐느냐 하면, 사실은 기도라고 하는 그 정의로 본다고 하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기도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냐면, 다윗이 이렇게 원수를 파멸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겠다고 하는 결단이 들어있는 거예요. 이 세상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원수가 있으면, 우리가 쫓아가서 복수해 버리는 거죠. 하지만 다윗은 원수가 있을 때, 원수를 복수합니까? 복수를 안 해요. 어떻게 하죠?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요. 오히려 용서를 해요. 사울을 죽일 수 있을 그 기회가 있을 때, 죽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서 죽이지 않는 겁니다. 왕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죽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름 부분 받은 자라고 이야기하면서 죽이지 않는 것이죠. 다른 사람도 그 사람이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가면서 죽이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그 죽이지 않으면서도, 그러니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맡기는 것이죠. 로마서 12장 1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러니까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수 갚는 것을 맡겨버린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진노의 시편을 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겠고요.

뿐만 아니라 공의를 세워달라고 간구하는 겁니다. 용서하는 것은 그냥 유야무야 하는 것이 용서가 아니고요. 모든 것을 바로잡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되는 것이죠.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해줄게.” 그걸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람이 회개를 하고, 피해를 보상해주고, 그런 관계 속에서 용서가 성립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이 다윗이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셔서 나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고, 두 번째는 내가 당한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풀어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원수를 미워하면서, 그리고 죽이려고 달려든 것이 아니라, 다윗은 오히려 용서하고 그리고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으면서, 그리고 그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향한 측은한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동체성 기도와 저주의 시가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서로 배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큰 그림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수를 만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바르게 잡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런 사람들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 그런 것들이 함께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죠.

누군가 우리들의 돈을 떼먹고 안 갚으면, 어떻게 하면 돼요? “안 받으면 그만이지”가 아니고, “하나님,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세요.”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고, 그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들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공동체성을 생각하면서 저주의 기도와 그럼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3. 3인칭 명령형 기도

그럼 이제 첫 번째 기도의 제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 있는 표현이, 주기도문에 우리나라 말 번역에는 빠져 있습니다. 무슨 단어가 빠져 있을까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번역이 안 된 게 있어요. 뭐가 빠져 있죠? “당신의” 이름입니다. 그냥 이름이 아니고, your name,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기도하는 것이죠.

그래서 직역을 제대로 한다고 하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냐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져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어떤 표현을 쓰죠? 하나님 무엇 무엇 무엇 해 “주세요”라고 우리는 기도문을 끝을 맺지 않습니까? 그 기도문의 끝을 그렇게 표현하잖아요? 영어나 헬라어에서는 기도문이 어떤 형으로 돼 있을까요? 명령형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양식을 주세요. 죄를 용서해주세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표현으로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어식 표현을 보면. 그리고 헬라어식 표현을 보면 뭐라고 되어 있냐면. 하나님을 향해서 명령하는 것처럼 기도문이 돼 있어요.

Give me bread. 그것을 직역하면 어떻게 돼요? “빵 줘” forgive me “나를 용서해 줘.” 또 Deliver us from evil. “악에서부터 구원해 줘.” 명령형으로 돼 있는 게, 기도문이에요.

우리나라 말은 하나님 앞에 명령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우리나라 표현은 “주세요.” “주세요.” 공손하게 얘기해야죠. “네 주세요.” 우리는 늘 “주세요”로 언어 습관이 돼 있습니다마는 영어 표현은 명령형입니다. Give me bread, 하나님 Give me bread. 빵 주세요. Forgive me.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줘. 빵 줘. 구원해 줘. 명령형으로 돼 있는 거죠.

근데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돼 있지만, 이것을 영어로 보면 그리고 헬라어로 보면, 어떤 표현이냐면 역시 이것도 명령형이에요. 어떻게 명령이 돼 있습니까? “당신의 이름이 거룩해져라.”로 돼 있어요. 직역을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라.”라고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어나 헬라어나 명령 형이 두 가지인데요. 첫 번째 명령형은 2인칭 명령형이라는 게 있고, 또 하나의 명령형은 3인칭 명령형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2인칭 명령형은 뭡니까? 바로 내가 지금 대화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명령하는 것이 2인칭 명령령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Give me bread. “빵 내놔”라고 말하자면, 그게 2인칭 명령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빵 내놔. 하나님, 죄 용서해. 하나님, 나를 죄에서 건져줘.라고 2인칭 하나님 기도를 들으시는 그 당사자에게 하는 명령이 2인칭 명령 기도문인 거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기도문은 뭐냐 하면, 3인칭 명령형 기도문입니다. 3인칭 명령.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아, 거룩해져라.”라고 하는, 하나님에게 하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여금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는 제3인칭 명령인 것이죠. 제가 설명을 좀 제대로 했습니까? 이해가 좀 됩니까?

하지만 이 “하나님의 이름아, 거룩해져라.”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데 그 기도를 이루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하나님이시죠. 그러니까 형은 3인칭 명령형이지만, 역시 그 기도를 이루시는 분은 2인칭, 다시 말하자면 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할 건데요.

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도도 보면 우리 합동 교단에서 하는 축도하고 통합 측 기장 측에서 하는 축도하고 그 끝이 좀 다르죠.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 합동 측 교회에서는 어떻게 축도를 하냐면, “성부와 성자의, 예수님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있을지어다”라고 그렇게 표현하는 반면에, 통합 기장 측 목사님들은 어떻게 하냐면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거죠. 그런데 보면 기장 측 통합 측에서 하는 것은 누구한테 간구하는 거예요?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라고 2인칭을 향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지만 합동 측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있을지어다” 그러는 거죠. 하나님 앞에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요? “은혜가 사랑이 교통하심이 있어라”라고 제3인칭 명령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역시 모든 걸 이루시는 분은 누가 이루셔요? 하나님께서 이루시게 되는 것이죠.

4.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의 의미

아무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 지기를 기도하는 것이죠. 명령형으로 하는 기도지만, 아무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이름이 거룩해진다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름이 거룩해진다? 거룩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구별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수만 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중에 양 한 마리를 구별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해서 제사장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 제사장을 거룩하게 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거룩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냥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에서부터 따로 떼어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얘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모독하거나, 함부로 사용하는 그냥 일상생활에서 그냥 아무렇게나 마치 개똥이 철수 영이 이름 부르듯이 막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소중하게 정말 존중해가면서, 그렇게 잘 사용하게끔 만들어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되심이 인정되는 것을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크리스천들이 아주 나쁜 짓을 하게 되면 누가 욕을 먹죠? 교회가 욕을 먹잖아요? 기독교 전체가 욕을 먹잖아요? 그러면 기독교의 이름이 더럽혀진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우리 예수비전교회 어떤 성도가 시장에서 하면서 사람들하고 싸우고 다투고 그러면, 우리 교회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지 않게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참 자상하게 그 행동을 잘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아, 하나님이 정말 존귀하신 분이구나” “하나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가 되겠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을 반대의 예를 생각한다면 어떤 예를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와서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막 욕을 해버립니다. 뭐라고 욕을 합니까? 너희 하나님은 너희들 못 도와줘. 우리 블레셋의 신이 진짜 신이야. 너희들의 신은 아무런 힘도 못 쓰는 가짜 신이야.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욕먹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정말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된다면, 그 기도의 의미가 무슨 의미예요? 하나님께서 짜잔 하고 나타나 가지고, 완전히 블레셋 민족 골리앗을 완전히 박살 내게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구나”라고 생각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게 되는 것이죠.

그 옛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불 속에 던져졌지만,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3장 28절 29절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언제 한 기도였어요? 지금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무시해 버리고 우상에게 전하라고 그렇게 명령을 내리는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감옥에 던져지고 풀무불에 던져지고 하는 그렇게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었단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살리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이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는 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다니엘도 마찬가지죠.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던져졌으나, 다니엘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백들이 나왔습니까? 다니엘 6장 6장 6장 25절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되, 원하건대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정말 하나님이 죽어서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시당했었는데, 사자굴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을 본 다음에는 사람들이, “아, 이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구나.”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기도문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인가요? 우리를 위한 기도인가요? 우리를 위한 기도예요. 흔히 주기도문을 분석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이 세 가지 기도 제목은 하나님에 관한 청원이고, “양식을 주옵소서. 죄 용서해 주옵소서.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들을 위한 기도라고 그렇게 분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기도부터 누구를 위한 기도 제목이에요? 우리를 위한 기도 제목이에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 황량한 세상에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우리를 박해하고 힘들게 할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해 달라 지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역전하는 그런 엄청난 결과들이 있게 해 달라고 하는, 우리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이기에 이것은 우리를 위한 기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제목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우리는 이 첫 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개입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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