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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6-8)

믿음은 모든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놓여져 있고 준비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연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안 믿으시나요? 믿으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정말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은총 축복을 누리는 게 맞는 것인가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 놀라운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환난이 있고,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는 겁니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때부터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할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우리들의 믿음의 길에는 이렇게 고난이 있고, 험난한 여정을 우리가 걸어가야만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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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부터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불시험과 같은 일들이 있을 것인데,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우리들 앞에 나타나게 될 건데,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고난이 오는 게 정상적인 것이지, 비정상적으로 이상하게 우리들에게 고난이 다가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스러운 정상적인 것이지,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성경은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라고 하시는 분께서 한 말 가운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요. 그래서 아주 유명해졌는데, 그런데 청춘만 아프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다 아픈 것이죠. 아프니까 인생인 것이고, 아프니까 우리들의 삶인 것이죠. 사도행전 14장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무엇이 있어야 되는가? 많은 환난이 있어야만 하고,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얼마나 많은 환난을 겪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환난이라고 하는 계급장을 얼마나 많이 달았느냐에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천성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전까지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반드시 아픔이 있고 반드시 슬픔이 있고 반드시 환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러한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그 환난을 맞이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한다면, 고난을 만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반응입니까? 1번. 짜증 내고, 절망하고, 불평하고, 신세 한탄을 하면서, 원망의 대상을 찾아서 분풀이한다. 2번. 오히려 기뻐하고, 오히려 감사한다. 몇 번이 정답입니까? 좀 크게 좀 대답해 주세요. 힘 좀 나게 몇 번이 정답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환난을 만나면,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냥 절망해버리고 쓰러질 게 아니라,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오히려 기뻐하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서부터 18절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에요. 기쁜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슬픈 일이 있어도 감사하라는 얘기고, 기뻐하라는 얘기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우리가 슬픔을 만난 사람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슬픈 마음을 무시하고 공감하지 못하면서, 그 슬퍼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겨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찬들이 욕을 많이 먹는데요. 비난을 많이 받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 사람의 슬픔에, 고난에 공감하지 못한 채, 정답만을 말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주 차갑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하기를, “슬퍼하지 마라.” “오히려 성경에 기뻐하라고 했다”라고 말하고,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건 그렇게 큰 게 아니고, 감당할 만한 것이야”라고 말하고,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왜 그래?”라고 말하고, 왜 우냐고 이야기하는 그렇게 정말 공감 능력이 떨어져 버린 채, 그냥 정답만을 앵무새처럼 말하는 그런 크리스찬들이 종종 있습니다.

내가 하는 그 말이 내가 던진 그 말이 얼마나 그 사람에게 아픔이 되고, 내가 한 그 표현이 얼마나 그 슬픔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찢어버리는지 공감하지 못한 채, 정답만을 이야기해버리는 정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크리스찬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엄청난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자녀들은 다 죽어버렸고, 모든 재산은 다 날라가 버렸고, 그리고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때, 옆에 세 친구들이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니 죄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는 그런 차가운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욥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비슷한 일들을 우리들이 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맞는 말, 2번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그게 옳은 게 아니에요.

말은 언제 해야 되는가? 때와 시기와 장소를 가려서 이야기해야 되는 건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이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대답해 버려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히려 더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제발 우리 예수 비전교회 성도님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만일 우리 가운데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우리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기뻐하라고 정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야 될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같이 울어주고 같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우셨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게 정상적인 반응인 것이죠. 그런데 공감하지 못하고 정답만을 이야기하는 입만 살아있는 크리스찬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특히 그런 실수들을 누가 많이 하냐면 우리 목회자들이 더 많이 하는 거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리고 가르치다 보니까, 그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공감하기보다는 정말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말들을 많이 해버릴 수가 있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선포하면 나는 선포를 잘했다라고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한 시간에, 제때에 전해져야 그것이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은 말씀이 되는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하는 이 말씀,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은 언제 말해야 되나요? 평상시 얘기해야 되는 거에요. 평상시. 평상시에 “환난을 당해도, 어려움을 당해도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이 있고, 환난을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앞에 가서 기뻐하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그 순간에는 함께 울어줘야 되는 거에요. 함께 울어야. 함께 정말 애통해야 하는 것이죠.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 누군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 갖다 대고, 이른 번씩 7번 뿐만 아니라, 정말 7번씩이 아니라 이른 번씩 7번까지라도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은 언제 가르쳐줘야 되는 거예요? 언제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평상시에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고,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해서 고통스럽게 정말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상황 가운데는 같이 공감해 주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때와 장소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용서하라고 하는 뜬금없는 소리 하면서, 화를 더 부추기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성폭력을 당하고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용서하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크리스션들 가운데 많이 있어요.

얼마 전에 제가 친하게 지내는 형님 목사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설교 시간에 우리 나라의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협력해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는데, 자기 교회에 있던 사람들 몇 명이 굉장히 반발하더라고 하면서, 도대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왜 반발하는지 모르겠다고 저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형님, 그 이야기는 선거 전에 이야기하고, 선거 다 끝나서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마세요.”라고 얘기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나도 지금 이 말을 지금 얘기할 게 아닌데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형님, 마음이 아프겠어요”라고 얘기만 하고 끝내고 그랬어야 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시험을 망친 아이에게 가서, “그러니까 평상시 공부 열심히 해야지”라고 말해버리는 어리석은 부모가 우리들이에요. 아, 시험 망치면,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괜찮아”라고 그때는 얘기해줘야 되는 거예요. 시험 망친 아이에게 가서, “그러니까 평상시에 일찍 일어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숙제도 잘해야지. 놀지만 말고”를 그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그건 다른 때 이야기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 아이에게는 마음을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로마서 5장 3절에서는 환난 중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들이 읽고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을 로마서 5장 3절 가운데 기록했는데요. 이 말을 했던 바울 사도는 정작 자기 자신도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질병이 있었던 것이죠. 이것은 정말 바울 사도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이었는데요. 바울 사도가 기도하는 가운데 병자가 낫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하는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바울 사도의 질병은 자기가 고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방해가 되고, 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여러 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차라리 그 아픔이 있는 게 너한테 유익이다. 네 질병이 있기 때문에, 육체의 가시가 있기 때문에, 네가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겸손하게 일할 수 있으니, 약한 것이 강하게 되는 것이고, 약한 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다음에, 바울 사도가 했던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약함을 자랑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여기서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한번 제가 만든 도표를 한번 보시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리니”라고 했던 그 말씀이 헬라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동사를 사용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동사가 오늘 읽은 로마서 5장 3절에 있는 단어와 똑같아요.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나니”라고 하는 말이 “카우카오마이”라고 하는 그런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가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하는 이 말은 바울 사도가 그것을 기뻐했다라고 하는 말이에요. 나의 약함이 있는데, 나의 질병에 대해서 내가 기뻐한다. 나의 약함에 대해서 기뻐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이 아픔이 있고, 질병이 있고 환난이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환난이 그냥 환난으로 보이기만, 하지만 그러나 이 환난이 우리를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여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그 것으로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약함도, 환난도, 고난도, 슬픔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그냥 우리를 박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짓밟아버려서 우리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이 긍정적인 아주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한 것들에 대해서 환난에 대해서 기뻐한다고, “카우카오마이” 기뻐한다고 자랑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은 로마서로 강의를 아주 오랫동안 하신 목사님이신데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의가 아주 유명한데, 그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뭐라고 설명했냐면,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해야 되는 게 아니라, 환난 “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환난이 있지만, 환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환난, 그것 때문에 기뻐해야 된다고 하는 것으로 설명했는데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백신과 같은 거예요. 백신이라고 하는 것 우리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 코로나가 처음 시작되면서 우리가 간절하게 기대했던 바가 무엇이냐면, 어서 빨리 백신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다들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미국에서 백신이 이제 발명되어서 판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여러분 좋았습니까? 나빴습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 곧 코로나가 끝날 수 있겠구나”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백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그것을 예방 접종하게 되면, 그러면 결국 우리 몸의 능력이 생겨서 면역이 생겨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침투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그래서 가볍게 지나가거나 그리고 아주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줄 거라고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백신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냐 하면 굉장히 아픈 것이었어요. 여러분 아팠습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습니까? 아프더라고요. 1차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2차 때 되니까 하루 종일 아프더라고요. 열도 나기 시작하고, 이러다가 내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로, 백신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백신 때문에 사람들이 다 기뻐했어요. 왜 기뻐했어요? 이것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근데 환난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환난도 힘들어요. 아파요. 괴로워요. 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환난을 통해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되는 것이, 그러니까 백신 나왔을 때 여러분 어떻게 했습니까? “야, 백신이다”라 했던 것처럼, 환난이 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야, 환난이다.” 좀 과장돼서,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그런데, 그게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18절 말씀에서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아주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환난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이고, 결국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해 줄 거라고 하는 것이고요. 야고보서 1장 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환난이 왔을 때 어떻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 환난이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래서 환난을 당했지만 기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 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절망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환난은 환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사탄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하고 그리고 소망을 얻게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환난을 만났을 때 절망한다면, 사탄의 목적에 굴복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뻐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부터 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난이 무엇을 이룬다고요? 인내를 이룬다. 우리가 인내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데요. 환난을 경험하게 될 때 인내가 커져가는 것이죠. 누가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잠수를 해서, 그래서 숨을 얼마나 안 쉬는가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 폐활량이 커지고 그리고 숨을 오래 더 참을 수 있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연습을 할 때 그 능력이 길러지는 것처럼, 환난이 있을 때 우리의 인내가 커지는 것입니다. 인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아가게 될 때 인내가 커지는 것이고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말은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좀 아쉬운 번역입니다.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도표를 봤으면 좋겠는데요.

여기서 연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도키메”라고 하는 단어는 무엇을 나타내냐면, 연단이라기보다는 “단련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 결과” 그래서 “진짜라고 하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 9절에서,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도키메_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라고 하는, 그렇게 번역했는데 로마서 5장 4절에서,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고 그렇게 번역했는데, 여기서 연단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은 어떻게 번역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냐 하면, 메시지 성경처럼 번역하는 게 훨씬 더 이해하기가 편할 겁니다. 메시지 성경에서 번역한 게 무엇이냐면, 쇠를 연마하듯 우리를 단련시켜준다는, 그러니까 어떤 것이 진짜냐 가짜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불속에 넣어가지고 단련을 시키면, 연단을 시키면 진짜는 진짜로 증명이 되는 거죠. 불을 통과하는데, 가짜는 다 다 벌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고, 진짜는 순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이 환난의 역할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소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가짜가 아니라 참된 믿음이라고 한다면, 가짜 믿음은 낙망해버리겠지만, 참된 믿음은 참고 견디고 이기며,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해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죠. 환난이 좋을 이유는 없습니다. 고통스럽죠. 달갑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십자가를 내가 지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좀 지나가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는 거에요. 십자가에 달리셔서, “별것도 아니네” 하면서 달린 게 아니라,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으면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던 것이 고난이에요.

우리가 만나는 고난이 그렇게 아픈 거죠. 쓰라린 거죠. 하지만 아무리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인내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진짜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소망을 붙잡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이루어질 것이기에,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 보호하시고,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랑하는데,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더 많이 신경을 쓰고 더 많이 애정을 쏟았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언제였죠? 늘 사랑하고 늘 신경을 쓰지만, 특별히 더 신경 썼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였냐면, 우리 아이들이 아플 때예요. 우리 아이들의 몸에서 열이 나고, 그래서 아이가 죽겠다고 신음하고 있으면 부모는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는 겁니다. 밤새도록 뜬눈을 세우고, 피곤한 몸이지만 눈 한숨 붙이지 못하고, 그 자녀를 향해서 물수건을 갈아치워 가면서 아이의 몸에 물을 발라주면서, 그 아이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 이 아이의 상태를 계속 뜬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아이를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그냥 내 팽개쳐 버리고, 외면해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오셔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져주셔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신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당하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땅해야 될 그 죄의 책임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이 환난이 나에게 어떠한 놀라운 은혜와 소망으로 이끌지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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