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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떻게 참으셨는가?

– 이국진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받았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계신다. 이 세상이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참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느니라” (베드로 후서 3: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이사야 1:9)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죄를 지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려워 떨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5).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소멸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안성기 주연의 영화 [투캅스]에서 비리 경찰 안성기가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코믹한 장면이 나온다. 대표기도 하는 사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하면, 안성기는 코믹한 모습으로 “아멘”으로 화답한다. 여기서 웃음이 터진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컷 비리를 저지르며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그 안성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영화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무제한으로 참으심(unlimited patience)을 보였다”고 고백하였다(디모데 전서 1:16). 그가 살기가 등등하여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서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 교인들을 잡아 문초를 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마치 침묵하시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뒤로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바울을 제지할 힘이 없으실 리 없었다. 그 침묵은 하나님이 몰라서, 간과한 것도 아니었다. 전지하신 하나님인데,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것을 모르실 리 없었다. 바울의 핍박을 당하면서 교인들의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를 듣지 않으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소리 조차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참으셨고, 결국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셔서,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셨다.”(디모데 전서 1:1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결국 바울 사도를 만드셨다.

하나님도 어머니처럼, “하나—-, 둘—-”을 세신 후, 바로 “셋”을 세지 않으셨다. “둘 반—-”을 세셨고, “둘 반의 반”을 세셨다. 선지자도 보내서 말씀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셋”을 세는 그 순간 당해야 할 진노의 심판을 내리시기를 주저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참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참지 않으신 것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한 진노의 잔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수는 없습니까?” 십자가의 형벌을 피하기를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향한 심판을 거두지 않으셨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과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에게 쏟아졌다. 그 진노 앞에 선 예수님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진노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인류의 죄의 책임을 뒤집어쓴 예수님의 고뇌의 기도였다. 그의 이마에서 흐른 피땀은 그 고뇌의 깊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그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참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향해, “셋”을 세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오래 참으면서 용서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10,000 달란트(=60,000,000 데나리온; 1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의 대가)를 면제받은 종을 향해 왜 그까짓 100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면제해 주지 않느냐고 책망하는 임금의 소리를 들어보자.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빛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마태복음 18:32-33)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참으셨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생각해볼 문제 / 토론 문제

1. 참고 용서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무한히 참고 용서할 수 있는가? 나의 인내심의 한계는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2. 하고 싶은 말도 하지 않고 참아야 할 때는 언제이고, 말을 해야할 때는 언제인가?

3. 부당한 행위를 당했을 때에도, 참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오래 참음이 반드시 상대방의 개과천선을 가져오는가? 상대방의 개과천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고 용서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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