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회오리 바람 (잠 10:22-32) +++ 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오늘은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한 절만 읽었습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주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시편을 살펴보든지, 잠언서를 살펴보든지, 아니면 욥기나 전도서나 아가서나 이런 시가서들을 보게 되면, 이렇게 같은 의미의 표현이 두 번씩 반복되어서 나오는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 오늘 이 11장 1절의 말씀도 역시 히브리 병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는 있는데 상반된 예를 대비해서, 그리고 그래서 같은, 그러나 결국에는 같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이 잠언서 11장 1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의미는 어려운 본문이 아니고 아주 쉬운 본문입니다.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 계십니까? 다 아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본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장사를 할 때 정직하게 장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손님에게 물건을 내어줄 때, 속이는 저울을 가지고, 잘못된 저울을 가지고, 응당 주어야 할 만큼의 분량을 주지 않고 적게 준다거나, 내가 받아야 마땅한 그 금액보다도 많은 돈을, 그렇게 속여서 편취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며, 우리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인 반면에, 그러나 정직하게 한다면, 공평한 추를 사용해서, 정말 공정한 추를 사용해서 장사를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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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나요?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 그런 종교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봉사를 하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 그런 신앙적인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직업을 가지고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식당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서 은행에서든, 아니면 회사에서든, 아니면 사업터에서든, 건축 현장에서든, 아니면 보험회사에서 일을 하든, 아니면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은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냐면, 내가 사는 게 바빠서, 주의 일에 힘쓰지 못하고, 정말 내가 일하는 것에 이 세상의 일에 너무 바빠서 주를 위하여 헌신하지 못하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선교를 하고 이렇게 영적인 일을 하게 되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아할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별로 그렇게 좋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언제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냐면, 중세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잠언서 11장 1절의 말씀은 어느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냐면, 예배의 현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예배의 현장이 아닌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우리가 장사를 하고, 우리가 비즈니스를 하고, 때로는 식당을 하고, 때로는 화원을 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이 세상에서 내가 직업을 가지고 하는 그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도 하고 미워하시기도 한다고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성경은 가르쳐주시기를,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경건한 일이 될 수가 있고, 동시에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직업, 이 세상에서의 일,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세속적이고 별로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 똑같은 직업이지만 어떤 직업은 경건한 일이 될 것이고, 어떤 일은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인데, 무엇이 경건한 일이며, 무엇이 경건하지 못한 일인가? 만일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속이는 저울을 사용한다고 한다면,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고,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도 공평하게 공정한 추를 사용해서 정직해서 정직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경건한 일이 될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그러면 내가 예배 안 드리고, 그냥 이 세상 일만 해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겠네요라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그러신 분은 없을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잠시 중단하고, 성경적인 원칙이 무엇이냐면, 6일 동안 이 세상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면, 하루는 그 일을 잠시 접어두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성경적인 원칙인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건한 일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와 예배하고 찬송하며 이렇게 예배의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영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혹은 수요 예배 때,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이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우리가 경건한 직업 경건한 일, 경건한 비즈니스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공평한 주를 주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공평이라고 하는 단어에 주목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평함의 반대말은 무슨 말일까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공평의 반대말은 차별 대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평하게 대하는 것에 반대 말은 차별하여 대우하는 것이 공평의 반댓말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하나님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대우해 주실 거야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날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의 공평함을 가지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대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이 세상에 그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 세상에 60억 명의 인구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 60억 명의 인구가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그 엄청난 인구들이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 숫자들을 다 세어본다고 한다면, 그 지구상에 존재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인구의 숫자가 몇 명이 되겠습니까 수천억 명 될 거 아닙니까? 아니면 수조억 명이 될 건가요? 엄청난 숫자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단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틀린데, 어떻게 틀려요? 생김새도 틀리고, 목소리도 틀리고, 지문도 틀리고, 성격도 틀리고, 똑같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기계 찍어내듯이 똑같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찍어내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게 창조하셨고 각각 다르게 대우하고 계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은사가 다르죠.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은사를,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셔서,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고, 하나님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서 함께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셨어요. 남편과 아내가 성격이 같아요? 틀려요. 틀려요. 같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한 배에서 난 아이들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어요. 어쩜 그렇게 다른지 모든 사람들을 다 다르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대우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공평의 반대는 차별하여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잠언서 11장 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평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속임수죠.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베푸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공평함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장사를 할 때 저울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공평한 저울을 사용할 때 그 공평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만 원어치 주세요 하면 만 원어치를 주는 게 공평함이죠. 정확한 저울줄을 사용해서, 정확하게 그 요구대로 주는 것이 그것이 공평함인 것이고요. 그런데 1만 원어치 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 만 원어치 약속한 것을 주지 않고 그것보다 적게 준다고 한다면 속여서 적게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고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정직하게 공평한 추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장사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다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면, 공평함이란 무엇일까요?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면, 그러면 상급자가 혹은 사장님이 나를 지켜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일하기로 되어 있는 그 시간에 성실하게 일해야 그게 공평한 거예요. 이만큼 일하도록 기대하고 그 사람을 뽑아주었는데, 그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장님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간을 내가 내 마음대로 사용해버리고,성실하지 못하게 일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았던 종이 주인이 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도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가 있었는데요. 그 결과물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주인이 없는 동안에 얼마나 실실하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결과물을 내어 놓은 것이죠. 그래야 그런 사람들은 공평한 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맡았던 종처럼,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술을 먹고 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자신이 맡은 것을 전혀 돌보지 않고, 그래서 게으르게 일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속이는 추를 사용한 것이고, 그것은 악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심판관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만일 내가 경찰로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판검사로서 판결을 해야 한다면, 공평한 판결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공평한 법 집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권한을 가지고, 편파적인 판결을 하거나, 죄 없는 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거나, 없는 증거를 조작해서 죄가 있다고 유죄 평결을 내리거나, 죄가 있는 자들도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가게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우리나라 판 검사들의 재산이 수백억 원씩 이른다고 하는 그런 통계를 보고서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리 판검사들에게 월급을 많이 준다한들 몇십 년 일해서 모은다고 해서 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 수많은 돈을 모을 수가 있었을까? 판결을 굽게 하고, 공평한 줄을 사용하지 않고, 잘못된 판결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우리들의 유혹에 따라서 우리가 잘못된 저울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공평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간에, 우리가 우리의 일하는 현장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현장들이 어디 있든지 간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공평한 추를 사용하고 있는지, 혹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늘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하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가 너무 너무나도 쉬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당장의 보상이 따라오는 것처럼, 내가 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그런 이득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기가 쉬울 텐데, 만일 그런 잘못들을 해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것이고,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한번 던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재물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재물을 섬기게 되면, 결국 우리가 공평한 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쓸 수밖에 없어요.

재물은 무엇인가? 재물은 수단입니다. 재물의 정당한 자리는 수단이라고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이 너무나도 좋아 보여서, 그리고 그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전능자처럼 안 느껴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재물은 전능자처럼 보여요. 재물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요.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재물에는 전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죠. 재물의 전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재물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겁니다. 재물이야말로 정말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이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의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더 높여서 전능하신 자리에 올려놓고, 그 재물을 우상처럼 섬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재물이 우상이 되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을 외면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우상이 되었는가, 우상이 아직 되지 않았는가를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거에요. 예를 들자면 누가 무엇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자식이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남편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아내가 우상이 될 수가 있고, 부모님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돈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명예나 권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어떤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학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어떤 경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감투가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팀 켈러 목사님은 말하기를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 우상이 되느냐? 우상이 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과연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로 그 우상이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은 선거철이기 때문에, 이제는 선거 운동들을 많이들 하고 계시는데, 정치도 우리들에게 좋은 것입니다. 정치는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관여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반드시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고 그 정치가 우리들의 삶을 아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정치도 역시 우리들에게 우상의 자리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어떻게 우리들에게 우상으로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거부하고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들었다고 한다면 자식이 우상이 된 거예요. 자식이 너무나도 좋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배려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내 자식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한다면 자식이 우상이 된 거죠.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아라도 그 자식에게 주려고 한다고 한다면 그 자식이 우상이 된 겁니다.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정치라고 하는 것도 아주 좋은 것이지만, 정치가 우상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이 됩니까? 가짜 뉴스도 상관하지 않아요. 진리를 외면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나쁘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재물도 역시 우상이 될 수가 있는데요. 재물이 우상이 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는 거죠. 돈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장사하라고 하는데, 우상이기 때문에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평하지 못한 저울추를 사용하면서,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그런 증거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역사상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냐 하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재물을 버려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이 있으면, 부자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니까, 부자는 결코 천국에 못 가니까, 돈을 다 버려야만 하는 것이고,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고, 부자는, 결코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할 수 없듯이, 부자는 결코 천국에 못 가니까, 재물을 다 내버리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으니까, 가난해야만 천국에 가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이해하에 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신앙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로 자주 등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돈 다 갖다 내버려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표현을 세밀하게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냐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거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재물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어느 위치에다 놓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우상의 위치로 놓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물 자체가 어디에 가 있으면 돼요? 신의 위치가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제자리가 어디로? 그냥 수단으로! 나의 구세주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런 달란트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청지기인 내게 맡겨주신 물건 정도로만 그 위치를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재물을 섬기는, 재물을 왕으로 모시는 그 마음이 문제인 것인 것이죠.

디모데전서 6장 10절의 말씀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하게 뿌리가 되나니”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하게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재물 자체가 악한 게 아니고, 재물은 그 재물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에 가 있으면, 그건 망하는 거고요. 근데 재물이 어디 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과 우리와 제물이라고 한다면, 재물은 우리와 동격이 돼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도 안 되고, 우리 밑에 있는, 하나님, 우리, 우리 밑에 최하위의 재물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면 되는 것이죠.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가 나빠요? 뭐가 나빠요? 선악과가 나빠요?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게 나빠요? 예. 하나님이 만드신 그 에덴 동산에는 선악과 나무도 있었어요. 어떻게 있었어요. 그냥 관상용으로 있어요. 보고 즐길 수 있는 그 선악가로 그냥 거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마음 가운데, 그 선악과가, 그 재물이 아니라,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와의 마음 가운데 이 선악가가 어떤 위치로 올라갔어요? 갈망의 대상이 된 거예요. 하나님을 능가하는,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먹고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케 만들고, 그 선악과를 먹어야만 하는 그런 경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을 때, 결국 그것은 이 아담과 하와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인데요. 재물이 재물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겁니다. 주의 일을 하는 데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 그 전능성을 가진 재물이 결국 신이 되어서, 하나님 그 신이 명령하는 대로 제물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다 내 팽개쳐 버리고. 우리가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하루 쉬고 하나님께 예배해라. 그런데, 다 그것도 무시해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냥 다 하나님의 말씀 다 무시해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돈을 벌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바치려야 될 것은 바치고 가야 되는데, 돈이 우상이 되다 보니까, 바치지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하는, 그냥 그것이 많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재물을 우상의 위치로 올려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공평한 추구가 아닌 속이는 저울을 불사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 버는 것 자체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되면, 지금 당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패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아만으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나아만의 나병까지도 얻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의 전리품들을 탐내고 욕심을 냈다가,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일이 탐이 나서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결국 파멸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재물을 폄훼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취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됐습니다. 초대교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물건에 대해서, 욕심을 내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망합니까? 재물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부르신 부름의 자리가 어딥니까? 오늘 잠언서 11장 1절은 장사의 세팅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공무원이면 공무원의 자리에서, 직장인이면 직장인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사역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넘어져요. 늘 미혹을 받고 늘 유혹을 당해서 늘 실패합니다. 이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감사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더욱더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면서, 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 이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또 회개하고 또 결단하고 또 결단하고 우리는 늘 넘어지지만 늘 쓰러지지만, 그때 그때마다. 아 모르겠다고 그냥 계속해서 죄악의 길로 가면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속인 그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봐야 돼요. 내가 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바라봐야 돼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실망하고, 지금 당장은 내가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다시 용기를 내야 되고, 다시 일어서야 되고, 십자가를 날마다 날마다 바라보면서 다시 힘과 용기를, 다시 회복의 역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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