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교훈과 책망 (잠 9:1-12)

지혜를 얻는 자 (잠 8:32-36) +++ 달고 맛있는 떡 (잠 9:13-18)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집을 지었다. 그 집을 짓는데 일곱 기둥을 세우고,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고 잔칫상을 차린 후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 잔치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 그런 묘사를 1절에서부터 6절 말씀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지혜가 어떤 사람인 것인 양, 마치 지혜가 어떤 집의 집주인인 양 의인화해서, 그래서 그 지혜가 사람들을 초청해서 지혜가 베풀어주는 그 잔치 자리,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며, 즐거움을 얻으라고 하는, 그렇게 의인화해서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표현하는 법을 가리켜서 의인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리켜서 우화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솝 우화 같은 경우를 보면, 짐승들이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를 하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가정해서, 우화처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이라고 해서, 이런 식의 표현을 우화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혜를 어디에다 비유하냐면, 마치 잔치에 초대하는 집주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은 지혜를 의인화해서 집주인이 되어, 그가 집을 짓기도 하고 일곱 기둥도 세우고,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타고 상을 차려서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즐기도록 초대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데요. 이 우화를 통해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그 메시지, 우리들에게 주려고 하는 그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일 지혜의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 삶이 복된 삶이다. 풍족한 삶이다. 만족스러운 삶이 될 거다라고 하는 것을 교훈해주기 위해서, 이런 우화, 비유, 이런 의인화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

+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그 잔칫집에 가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든지 그 집 안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고, 그리고 정말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어렸을 때는 동네 잔치가 열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 집 안에 들어와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하고, 저녁을 얻어먹기도 하고,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면서 동네잔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집에 좋은 경사가 있으면, 혼인식이 있어서 잔치를 벌이거나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있어서 잔치를 벌이게 되면,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아무나 다 들어가서, 그 집에서 맛있게 먹으면서 배부르면서, 흥겹게 아주 즐거운 잔치를 벌이는,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이것과 비슷하게, 지금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혜가 지금 우리들을 향해서 잔치를 베푼 것과 같으니까, 만일 누구든지 그 지혜에게로 가서 배운다고 한다면, 지혜에게 귀를 기울이고, 지혜가 하는 말을 듣고, 지혜가 베푼 그 잔치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먹을 것을 먹을 때 우리의 육신이 배부른 것처럼,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영육 간에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면, 영육 간에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우화 같은 이야기를, 오늘 1절에서부터 6절까지 해주고 있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본문에 묘사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 때문에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자면, 지혜가 집을 짓는데 기둥을 세울 때, 왜 하필이면 일곱 기둥을 세웠을까? 일곱 기둥이라고 하는, 그 일곱이라고 하는 말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하필이면 짐승을 잡았을까? 왜 하필이면 포도주를 혼합한다고 했을까? 왜 보낼 때는 남종을 안 보내고 여종을 보낸다고 했을까? 그런 디테일한 것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너무나도 고민하신다고 한다면,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큰 그림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큰 그림을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종종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자꾸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숲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다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오늘 이 본문의 메시지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구체적인 것 일곱 개가 무엇을 의미한다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마치 어느 잔칫집에 가게 되면 배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혜가 베풀어주시는 그 향연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영적인 만족감을 누릴 수 있고, 영육 간의 강건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그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만족함이 있을 거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종류의 만족 어떤 종류의 유익이 있다고 하는 말일까요? 그것은 6절 말씀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잠언서 9장 6절 말씀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이 지혜가 주는 잔치, 지혜가 주는 그 풍성한 식탁에 가게 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혜를 얻어야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게, 바로 오늘 잠언서 9장 6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이제 주제가 약간 바뀌어서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책망해야 될 사람이 누구고, 책망하지 말아야 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누구를 책망할까요? 누구에게 징계를 내려야 될까요? 그것을 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잠언서 9장 7절의 말씀을 보시면, 제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설명을 해드렸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9장 7절에서 보면, 이 거만한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한번 9장 7절을 한번 다시 한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그랬으니까, 거만한 자가 누구라는 얘기예요? “악인”이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거만한 자가 곧 악인이고, 악인이고 거만한 자라고 하는 그 표현, 히브리 병행법적인 표현입니다. 징계한다고 하는 것은 곧 책망하는 것이고, 책망하는 것이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능욕을 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곧 우리가 흠이 잡히고, 우리가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이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했으니까, 거만한 자를 잠언서 9장 7절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악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만한 자가 바로 악인이고, 악인이 바로 거만한 자라고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만한 자라고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 단어가 “레츠”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 하고 제가 살펴보니까,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대부분 “거만한 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근데 영어 번역을 살펴보니까, 영어 번역에서는 주로 scoffers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웃는 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사실 비웃는 자나 거만한 자나 사 실은 같은 거죠. 거만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듣지 않고, 비웃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 그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은 다르지만, 아무튼 그 히브리어 단어 “레츠”를 우리 한국말에서는 “거만한 자”라고 주로 번역을 했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주로 “비웃는 자”라고 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만한 자, 악인, 비웃는 자에게 내가 책망을 하거나, 내가 좀 조언을 하거나, 내가 무슨 비판을 하거나, 내가 어떤 징계를 하거나 하게 되면, 그 거만한 자가 그 악인이 그 비웃는 자가 내 징계나 조언이나 내가 충고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오히려 반발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 사람이 좀 잘 되기 원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고,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제대로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충언을 해주고, 때로는 징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하고, 무엇인가 그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일 악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만한 자라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한다고요? 반발하는 거죠. 오히려 어떻게 한다고요? 충고해주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죠. 조언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오히려 발톱을 드러내는 것이죠. 징계나 책망도 역시 왜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이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오히려 더 반발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냐면, 그런 사람들은 “징계하지 마라.” 그런 악인들은 그런 거만한 사람들, 귀가 닫혀버린 사람들에게는 “책망하지 마라”라고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우리가 충고를 하거나, 건의를 하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거나, 뭔가 어드바이스를 주려고 한다고 하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죠. 하지만 거만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을 순순히 잘 받아들이고, 양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톱을 드러내면서 공격해 오고, 오히려 그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 발톱을 드러내는 그런 결과가 빚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거만한 사람에 의해서 능욕을 당하고, 그 거만한 사람에 의해서 수치를 당하게 되고, 상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8절 말씀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징계나 책망이나 조언을 하지 말라고 오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충고를 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징계하거나 책망하는 일은, 그럼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요? 거만한 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 지혜 있는 자에게 하라는 거에요. 9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9절 말씀을 한번 봅시다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기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으로 지혜 있는 자를 뭘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의로운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만한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는데, 우리가 충고를 한다면, 징계를 한다면, 책망을 한다면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 악한 사람, 거만한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 사람에게 하면 오히려 손해 본다. 오히려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거야. 능욕을 당하게 될 거니까, 누구에게 해라? 지혜 있는 사람에게 교훈을 더해주고, 의로운 사람을 가르쳐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아까 한 그 표현과는 정반대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바로 의로운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거만하지 않은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들은 가르칠 수 있고 교훈을 다 할 수 있고, 책망할 수도 있고 징계할 수도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이거 하나 마음속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좋은 조언을 한다거나, 혹은 건의를 한다거나, 우리가 무슨 좋은 말을 해준다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야 되는 것, 누구한테 하라고요? 받아들일 만한 지혜로운 사람에게 해야지, 그걸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거만한 자, 어리석은 자에게는 해서는 안 된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때, 신약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생각나시는 분이 혹시 계실 겁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요? 마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누구에게 주지 말며?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누구 앞에 던지지 말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갑자기 개와 돼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우리는 비판할 때 우리는 충고할 때, 어떤 마음에서 충고를 합니까? 이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하는 거죠. 이 사람이 좀 선한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비판을 하는 겁니다. 조언을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거만한 자,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 그래서 곧 악한 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런 사람들은 마치 개와 돼지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나에게 들려주는 그 진주와 같은 비판의 소리, 나에게 들려주는 그 거룩한 비판의 소리를 우리가 만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가 발전할 수가 있고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듣게 될 때에, 나에게 진주를 주는 그 상대방을 향해서 오히려 공격하고 화를 내고 그래서 그 사람을 공격하는 개, 돼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언서 9장의 말씀처럼, 그렇게 걔에게 그런 것을 주지 말라고 교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교훈의 말씀을 잘 새겨 듣고, 우리가 늘 마음속에 간직했으면 좋겠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읽었을 텐데 이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분명히 잠언서의 말씀을 읽었을 것이고 분명히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지혜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잘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막무가내로 막 이야기를 합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진리를 자꾸만 선포합니다. 왜? 진리는 진리니까 말해야 되는 거예요. 옳은 말은 옳은 것이니까, 말해야 되는 거예요. 왜? 옳은 것이니까요. 틀린 말한 게 아니거든요. 내가 잘못된 말 한 게 아니거든요.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정답은 언제든지 말해도 괜찮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어떤 열정적인 사람이, 소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법당에 가서, 사찰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저기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 어리석은 길을 버리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고, 그 잘못된 사람이 예수님 믿는 길로 돌아오는 것이 옳은 것이니까, 옳은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고서 나는 복음을 잘 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사명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요.

그런데 그러한 행동은 성경을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막무가내로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비둘기같이 순전해야 하기도 하겠지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지혜롭다고 한다면, 내가 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이 진리의 말씀을 전했을 때, 저 사람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겸손한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거룩한 것, 진주를 받았을 때, 돌이켜 우리를 공격하는 개 돼지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인지를 분별해서, 거만한 자들에게는, 악한 자에게는 가르칠 것이 아니고, 교훈할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우리만 다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잠언서의 말씀과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의 열정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불당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소리친 후에, 그래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것도 영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악한 자들, 거만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될대로 돼라. 저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으니, 나는 복음 못 전한다. 가르칠 필요도 없다. 성경에 가르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포기해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결단코 아니에요.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하는 그 점에 있어서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마음을 악하게 하고, 그리고 그 마음을 거만하게 해서 내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 안 전한다. 그런 사람들은, 나 신경 안 쓴다라고 하고, 손 털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경우에는 막무가내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접근해야 돼요, 지혜롭게! 마음의 문이 열리도록,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전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의 마음이 꼭 닫혀 있다고 한다면, 닫혀 있는 그 사람에게 그냥 말만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도록, 그 거만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려서, 귀를 조금, 귀를 기울일 그런 상태가 되도록,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 마음을 풀어주고, 풀어주고 해서, 결국 그 사람이 마음이 거만한 상태에서 귀를 기울이는 상태로 변화되는 그 모습을 본 다음에, 그 사람에게 진리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분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시죠. 그분이 쓴 <센터처치>라고 하는 책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문화 속에서 균형 있게 상황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치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다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이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고 한다면, 충돌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어야 되는데, 문화에 맞서야 되는데, 그건 어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어서 그 안 깊숙한 곳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약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해서, 그렇게 터뜨릴 때에야 바위가 폭파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터뜨리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바위의 그 심장부에 폭약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드릴로 뚫지 않은 채,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냥 밖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너희들 나쁜 놈들이다라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욕하기만 하고, “이 나쁜 놈들”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문화의 악한 요소들을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바위가 폭발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기만 할 건데, 전도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게 듣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아직 열기도 전에 그냥 진리를 쏟아내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바위를 거슬리기만 하지 전혀 바위를 폭발시킬 수 없다는 거예요. 바위를 폭파시키려고 한다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폭파시켜야, 그래야 그들이 폭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것도 끌어내지 못한 채, 묵살되고 지워질 거다. 아무리 전도해도 귀를 닫을 거다. 이 말이에요.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은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오늘날 조롱을 당하고 있잖아요? 가장 강력한 형태로 복음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분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시죠. 그분이 쓴 <센터처치>라고 하는 책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문화 속에서 균형 있게 상황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치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다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이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고 한다면, 충돌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어야 되는데, 문화에 맞서야 되는데, 그건 어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어서 그 안 깊숙한 곳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약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해서, 그렇게 터뜨릴 때에야 바위가 폭파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터뜨리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바위의 그 심장부에 폭약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드릴로 뚫지 않은 채,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냥 밖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너희들 나쁜 놈들이다라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욕하기만 하고, “이 나쁜 놈들”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문화의 악한 요소들을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바위가 폭발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기만 할 건데, 전도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게 듣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아직 열기도 전에 그냥 진리를 쏟아내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바위를 거슬리기만 하지 전혀 바위를 폭발시킬 수 없다는 거예요. 바위를 폭파시키려고 한다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폭파시켜야, 그래야 그들이 폭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것도 끌어내지 못한 채, 묵살되고 지워질 거다. 아무리 전도해도 귀를 닫을 거다. 이 말이에요.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은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오늘날 조롱을 당하고 있잖아요? 가장 강력한 형태로 복음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마음이 닫혀버려 있는 사람들, 거만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그런 정말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다라고 백날 소리쳐봤자 듣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그런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 7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 얘기는 그런 사람들을 아예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거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거만함을 내려놓도록,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그 여는 사전 작업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마 자녀들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버린 자녀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싶은 부모님들의 그 열정들, 그 안타까움들 많을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정말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잘못된 생각으로 막 달려가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걱정하시는 분들 부모님들 가운데 많을 겁니다. 왜 이 아이가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 이 아이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괴로워하는 부모님들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부모님들이 주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옳은 것을 윽박지르고 맙니다. “너, 교회 가!” “주일이면, 교회 가야지!” 외치고 끝나는데 아이들의 마음이 거만해서 들리지가 않아요. 오히려 반발해요. 말하면 말할수록, 오히려 더 반발하는 모습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거만한 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만하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죠.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안에 다이나마이트를 집어넣어야 되듯이, 그들의 마음에 어느 한 부분에 무엇인가를 뚫을 수 있는, 그 마음의 그 조그마한 부분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린 너무나도 급해요. 급해. 우물에서 숭늉을 찾으려고 해요. 우물에서 자꾸 왜 숭늉이 안 나오나? 왜 숭늉이 안 나오나? 하고 금새 좌절하고, 금세 절망하고 안 된다고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 어떤 장로님의 따님이 신X지에 빠진 그런 따님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보내 놓았더니, 신X지라고 하는 집단에 빠져버린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내 팽개쳐 버리고, 신X지 집단에 열정적으로 가서, 이단에 빠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본 부모님 장로님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저한테 고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우리 딸이 신X지에 빠져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때 제가 그 장로님과 권사님 앞에, 절망적으로 눈물짓고 있는 그 두 분에게 해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 따님을 한없이 사랑해 주세요.” “따님을 한없이 사랑해 주세요.” 저는 진리를 가지고, 그 딸아이와 “이X희가 뭐가 잘못됐다” 싸우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신X지의 잘못이 무엇이고, 이것이 무엇이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라고, 무엇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린 조언은 무엇이냐면, “좀, 사랑 좀 해주세요.” “사랑 좀 해주세요.” 이 아이가, 우리 아빠 우리 엄마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실감 나게 사랑을 표현해 주세요. 그래서 이 아이가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내가 어떠한 상황에 들어가고, 내가 아주 심각한 문제에 빠지더라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 나를 전혀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나를 한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한한 품이 엄마의 품이고 아빠의 품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돌아왔어요.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신X지에 빠지는 것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은 무신론에 빠져듭니다. 우리 자녀들은 포악한 성격으로 변해갑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문제 가운데 빠져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앞에서 정답을 이야기하고 바리새인처럼 책망하고, 이미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는데, 그 어떤 징계를 하고, 책망을 한다고 한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더 닫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기독교에 대해서 한국 사회의 마음이 닫혀버려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그걸 느끼십니까?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크리스천들이 아닌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미 닫아버린 이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그들이 당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제대로 된 길로 돌아오라고, 어떻게 진리를 전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정답을 반복해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 반발을 당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정답을 이야기했으니까, 나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닫혀버린 우리 남편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닫혀버린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닫혀버려 있는 이 사회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지금은 우리가 가면, 오히려 반발하고, 우리를 공격하고, 오히려 진리를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오히려 더 크게 반발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저 마음이 다친 세대에게, 어떻게 우리가 다가갈 수 있나요?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인내를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남을 가르쳐야만 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배워야 하는 입장에 서기도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책망한다면,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교훈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징계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주고, 누군가 나에게 좋은 어드바이스를 준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요?

우리들에게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책망을 주고, 교훈을 주는 사람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아내가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부모님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자식이 우리들에게 옳은 말을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것이고, 직장의 상사가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직장의 동료가, 혹은 부하 직원이 나에게 좋은 길을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가르쳐주는 사람이 어른일 수도 있고, 때로는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전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이 나에게 내가 깨달을 만한 지혜를 이야기해 줄 수도 있겠고, 심지어 불신자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훈이 우리들에게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친구의 입을 통해서, 때로는 적의 입을 통해서, 원수의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려오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누가 말했는가를 가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말을 해도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신자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은 진리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누가 이야기를 하든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만일 우리도 거만하게 비아냥거리며 비웃으며 그 조언을 물리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지혜가 없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말을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이야기하든 나보다 한참 밑에 있는 저 가지 않는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향해서 외치는 그 소리에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지혜는 무엇입니까? 겸손하게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성도님들을 바라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장로님이라도 평신도에게 배워야 합니다. 목사라고 할지라도 평신도에게 배워야 합니다. 만일 그게 배워야 할 진리라고 한다면, 그 누가 이야기를 해도 다 배워야 해요. 다 배워요.

그런데 우리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 어떻게 가르치는가?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가르쳐주고 있어요. 누군가 정말 신실하게 사는 그 모습을 본다면, 그건 우리들을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신실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 신실한 삶을 배워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라고 배워야 됩니다.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그 모습을 본다면 그 모습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배워야 되겠구나!” 마음의 문을 열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이 사람의 말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어떤 때는 좋은 모습으로, 어떤 때는 나쁜 모습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배워서 지혜가 우리들에게 늘 가까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그 지혜로운 그 교훈들이 우리 옆에 널려져 있는데, 12절 말씀에 내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로 내가 유익할 것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항상 배워나갈 수 있는 영적인 겸손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죠. 우리는 겸손하기보다는 거만해지고, 교훈의 귀를 열기보다는 마음을 열기보다는 귀를 닫아버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하는 악한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모습들을 지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다시 한번 회개하고 일어서며,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승리해 나가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