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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는 자 (잠 8:32-36)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잠 8:1-21) +++ 교훈과 책망 (잠 9:1-12) 

오늘 말씀을 보면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자가 여호와의 은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죠? 35절의 말씀 가운데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입니까? 지혜죠. 지혜를 얻는 자는 무엇을 얻을 것이다? “생명”을 얻을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가 무엇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혜를 얻지 못하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겠죠. 36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여기서도 “나”가 누구 무엇입니까? 지혜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이다? 영혼을 해하게 될 것이다. 근데 이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혜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떻게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죠. 지혜를 들려줘도, 그 말에 따라, 지혜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는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고,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 물건처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지혜의 말씀이 있는데, 그 지혜의 말씀대로 따라 살지 않고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죠. 사랑하지 않는 것이죠.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면 싫어하는 것이죠. 지혜에 따라 살지 않게 되면, 영원히 해함을 입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오늘 잠언서 8장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입니다. 지혜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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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가 다른 것이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따라 살고,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게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생명을 얻는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이 말씀은, 그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변경해서 다른 표현으로 표현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을 통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우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일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돈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돈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입니까? 돈으로써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그래야 내가 복을 얻는 것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내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 인기를 얻는 것이 그것이 좋은 것이고, 사람들의 박수를 얻는 것이 그게 좋은 것이라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성경 말씀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 훈련을 받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 홍해 바다를 건너고, 그리고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라고 하는 그 기간을 광야에서 지내야만 했었는데요. 이 광야 40년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키는 훈련의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킬 때 꼭 알려주고 싶은 그 훈련의 목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떡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 같고, 떡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떡이 아니다.” “떡이 아니다.” “떡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광야 40년 동안 또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켰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가지고 훈련을 시켰냐면, 만나라고 하는 것으로 훈련을 시켜주셨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광야라고 하는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서 무엇인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망할 것인가?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죠. 그 광야에서 전후 좌우를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고, 모래밖에 없는데, 황량한 들판만 보이는데,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신 것이 만나입니다.

만나가 내리면 그 만나를 거두어서 먹으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하루를 보내는 겁니다. 근데 우리 마음 가운데는 “그럼, 내일은 어떡하지?” “내일 또 만나가 내릴까?” “내일 만나가 없으면, 어떡하지?” “내일은 아무것도 없으면, 무엇을 먹고사나?” 싶은 그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은 만나를 거둘 때 하루치만 거두는 것이 아니고, 며칠 분을 거두어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수많은 만나를 거두어 드리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둬들이지 말라” “그냥 오늘 먹을 거, 오늘 준비하고, 내 이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라고 “내일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테니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라” 말씀하시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고, 염려가 되고, 걱정도 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만나를 며칠 분을 거두어 두는 겁니다. 하지만 다 썩어버리고, 냄새 나고, 그다음 날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에 또 만나를 내려주신 거예요. 그것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우리가 사는 건 떡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주시니까, 사는구나! 하나님이 살려주시니까, 사는 거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사십 년 동안 훈련하고, 훈련하면서,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 참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훈련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서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떡을 먹으니까 배가 부르고, 떡을 먹으니까 힘이 솟아오르고, 떡을 먹으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같은 그런 현상만을 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떡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 그 교훈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해주고 있는 일관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산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리는 늘 속아 넘어갑니다. “아니야, 그래도 돈이 최고야.”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잖아” “한번 기마이도 쓸 수 있고.” 돈이 있으면 그냥 마음대로,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너무나도 갈망이 되어서, 그래도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야, 물질이 많아야 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야, 그래야 내가 길을 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늘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반 성도님들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종종 제가 카톡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요즘에는 특별히 더 많은 카톡 메시지들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보낸 메시지 가운데 어떤 메시지가 있냐면 이런 메시지가 있어요.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없었으면 우리나라 망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저한테 보내줘요.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서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는데, 또 무슨 메시지를 보내주냐면, “우리나라에 이승만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어느 정도 공이 있을 것이고, 그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들의 공로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롱할 것도 아니고 존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린다고 말해야 될 목사님들에게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우리를 살린다, 사람이 우리 나라를 살린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듣는 때마다 당혹스럽고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를 잘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고 외칠 때, 돈을 벌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야 된다고 그렇게 외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외쳐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다.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전해야 될 때인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우리가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 뒤돌아서면 “그래도 돈이 최고야” 뒤돌아서면 “그래도 힘 있는 사람이 좋아” 자꾸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원하기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또 새기고 또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들 가운데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에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이 세상에서는 정말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정말 돈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고, 힘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되는 것 같고, 그리고 권력이 최고인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때도 이 세상 전부가 돈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혜를 얻는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게 안 믿겨지시면, 이걸 좀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말이 참말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집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으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돕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 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 먹어도 조금 있으면 다 뒤로 나가버리고, 다시 허기질 수밖에 없고, 마셔도 조금 있으면 또다시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헛된 것들에 우리가 목숨을 걸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기도하며 나아가고 이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지혜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32절 말씀, 잠언서 8장 3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2절 말씀 가운데서, 이제 내게 “들으라”라고 하는 말씀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누구죠? 지혜입니다. “지혜를 귀 기울여 들으라”라고 32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들으라고 말씀하신 그 표현을 주목해 보면 좋겠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들어야 지혜를 얻는 것이고, 자꾸 자꾸 듣고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지혜가 우리에게 생겨진다는 것이죠.

들어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인데요. 왜 우리는 들어야 합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왜 있을까요? 왜 우리는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꼭 들어야만 할까요?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귀에 지혜가 아닌 소리들이 너무나도 많이 계속해서 하루 24시간 내내 일주일 7일 동안 1년 365일 계속해서, 지혜가 아닌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 계속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노출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듣는 겁니다. 자꾸만 들어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우리들의 대화 가운데서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걸어가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지혜의 말씀이 아니라, 지혜와 반대되는 그 말들이 우리들의 귀에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렇게 광야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잘 믿고 섬기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 가나안 땅에서 타락해버리고, 또 그렇게 우상 숭배의 길로 가버리고, 그렇게 돼버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가나안 땅에 있는 이방인들의 가치관에 노출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 열고 나가면 이방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방인들이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매일 보는 거예요. 저 이방인들이 비가 안 오면, 바알 신에게 가서 제사드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겁니다. 자꾸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세뇌가 되어서 “아,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우상에게 저래야 되나?” 그러면서 가버리는 거예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담배 광고하는 것을 봤는데요. 담배 광고를 하기 위해서 담배 포스터를 가게마다 붙여 놓습니다. 붙여놓는데 그 담배 포스터를 어디다 붙여놓냐면, 예를 들어서 뭐 세븐일레븐이라든가 이런 편의점 있지 않아요? 그런 편의점에 들어가려고 하면, 담배 광고들이 꼭 여러 개 붙어 있는데, 어디에 붙어 있냐면 허리 아래 부분 높이에 붙어 있습니다. “말보로” 해가지고, 빨간 자극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에 담배 광고가 붙여져 있는데, 어디에 붙여져 있냐면, 제 눈높이에 붙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리 아래 정도에 붙여져 있어요. 왜 거기다 붙여놨을까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편의점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편의점 문에서 말보로 담배 광고를 먼저 보는 겁니다. 어른들이 피는 저 담배 “말보로”라는 게 있구나! 매일매일 편의점을 들락날락거리면서, 매일매일 그 담배 광고를 보면서 들어가는 그러니까 그렇게 1년 365일 광고하고 있는, 그 광고의 힘 앞에 학교에서 한 학기에 겨우 몇 시간 너희들 담배 피우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는 게 힘을 잃어버리는, 그런 그러니까 결국 아이들이 커서 그쪽으로 빠져가는 거예요. 빠져요.

근데 그게 담배 광고만이 아니에요. 담배 광고만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광고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된다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해야 된다.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광고들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입받고 있고,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친구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고, 엄청난 세뇌가 계속해서 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결국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들으라.” “지혜를 들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죠.

3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33절에서 말합니다. “훈계를 들어서” “들어서 지혜를 얻어라.” 34절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듣고 듣고 들어야, 그래야, 이 악의 세뇌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물리적으로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으면 일단은 좋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많이 듣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묵상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묵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는 거 많이 읽어서, 일독을 하고, 몇십 독을 하고, 어떤 사람은 쓰기도 해서, 성경을 전체를 다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암송하기도 하고, 정말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는 방법이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요. 많이 읽든, 많이 쓰든, 아니면 많이 암송을 하든 어떤 방법을 하든지 많이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묵상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난독증이 있어서, 난독증이 있어서 많이 읽기는 읽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예전에 제가 어떤 한 학생을 봤는데요. 그 학생의 어머니가 그 학생한테 가서 책 읽으라고 숙제를 내줬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방 안에 들어가서 엄마가 읽으라고 하는 책을 다 읽었어요. 다 읽고, “엄마, 나 엄마가 읽으라는 대로 나 책 다 읽었어요.”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 네가 책을 벌써 다 읽었구나” “그래, 그러면 그 책이 도대체 무슨 얘기하고 있던?” 물어보니까 몰라요. 이렇게 읽었는데, 몰라. 거기서 무슨 얘기 했는지, 거기에 나오는 사람이 누구니? 몰라. 거기에 무슨 무슨 주인공이 나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데 읽기는 읽었어요. 안 읽은 게, 아니에요. 읽었어요. 읽었는데 그냥 소리 내서 읽긴 읽었는데, 마음에까지 오지 않은 거죠. 내용 파악을 잘못하는 어떤 문제가 있는 학생 같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말씀을 읽기도 많이 하고, 쓰기도 많이 하고, 암송을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많이 하곤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하게 이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계셨는데, 그 말씀과는 전혀 딴판의 삶을 사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용서해야만 하잖아요? 사랑하며 살아야 되잖아요? 양보하며 살아야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아야죠! 겸손해져야죠! 그런데 그거 하고 아무 관계없이 삶을 살아요. 그냥 종교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바리새인처럼 살아가요. 그러면 그게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읽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은, 들어야 되는 것인데, 여기서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들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말은, 표현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들으라고 하는 이 말의 표현이 무슨 표현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 것을 말하는 표현으로서 “들으라.”

“여보, 아기 좀 봐” 그러면 아기만 보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고, 저의 얘기예요. 그게 아니잖아요? 아기만 보고 있는 게, 보는 게 아니잖아요. 아기를 본다는 얘기는 뭐예요? 울면 달래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아이가 기저귀를 갈아줘야 될 필요가 있으면 갈아줘야 되고, 그게 아기를 보는 거잖아요?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의 말씀 틀어놓고 들으면서 딴짓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얘기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라.” 그래서 묵상해야 되는 거지,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곧 묵상하라는 이야기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더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십자가를 지라”고하시는 그 말씀, 그것이 주님을 버리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시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나아간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가 그게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밖으로 나가면 정반대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들을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린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이 살 길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그 확신들이 마음속에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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