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수장으로 가는 소 (잠 7:1-27)

불을 품으면 (잠 6:20-35)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잠 8:1-21)

잠언서 7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우리가 읽으면서 깨닫게 되셨겠지만, 이 말씀은 음행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음행의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하는 말씀이 오늘 잠언서 7장 말씀에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이 잠언서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 여러 주제들 가운데서 참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음행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벌써 우리가 1장에서부터 쭉 살펴오는 가운데 음행을 경고하는 그런 메시지를 여러 번 살펴본 바가 있는데, 오늘 읽게 된 잠언서 7장에서도 다시 한번 음행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잠언서에서 음행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한 번 말하면, 그 말을 하기만 하면,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들었던 말을 잊어버립니다. 정작 유혹의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 내가 그런 영적인 교훈을 들었는가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영적인 교훈을 다 잊어버리고, 그리고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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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반복해서 말해줘야 됩니다.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정답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면, 그러면 정답을 알려줬으니까 그 정답을 잘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정답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옳은 씀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망각해 버리고, 정말 중요한 바로 그 순간에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래서 결국은 죄악의 길로 가기가 쉬운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이 교육인가? 새로운 것을 자꾸만 알려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말씀,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던 그 말씀을 또 듣고 또 듣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완전히 숙달될 때까지 귀에 딱정이가 지도록 여러 번 들어서, 그것을 완전하게 숙지할 정도로, 그렇게 반복해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제가 군대에 갔더니, 군대에서 훈련을 하는데, 이 군대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한 반복의 훈련입니다. 제가 훈련소에서 총검술을 배우고, 또 여러 가지 제식 훈련을 배우고, 여러 가지 군대의 여러 가지 교육들을 받게 되는데, 조교가 앞에서 시범을 보여줍니다. “조교 앞으로.” 그래서 조교가 나와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제식 훈련에 모범을 보이고, 시범을 보입니다. 총을 분해하고, 조립하고, 또 청소하는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내무반을 어떻게 정돈하고, 어떻게 정리해야 될 것인가를 시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조교가 그렇게 시범을 보여준 다음에, 우리 훈련생들을 향해서 그대로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까요? 못 할까요? 못 해요! 조금 전에 바로 조교가 완벽하게 시범을 보여주었는데, 그 시범을 보여줄 때는 아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한데 막상 내가 해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총을 분해하고 청소하고 기름칠하고, 그리고 다시 조립해야 되는데, 어떻게 조립해야 될지를 모르겠고, 어떻게 분해해야 될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훈련을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아주 능숙하게 그 모든 일들을 잘해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이야기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했던 그 이야기를 또 이야기해 주고, 또다시 반복하고 또다시 반복해서 완전히 숙지하고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반복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군에서 훈련받을 때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3사관 학교에서는 의사들도 군의관들도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법무관들도 훈련을 받았고, 또 군종 장교들도 훈련을 받았는데, 우리 군종 훈육 대에는 목사님들 그리고 신부님들과 법사님들이 함께 내무반 안에서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는, 아주 특이한 훈련대가 우리 군종 훈육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훈육을 받는 가운데 우리 목사님들은 대부분 다 군대를 갔다 오지 아니한, 그래서 전혀 군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제 막 입소한 훈련병들이었지만 그러나 신부님들이나 법사님들 중에는 이미 군대를 한 번 다녀온 예비역인데 다시 입대를 해서 장교 훈련을 받는 그런 분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법사님들 중에 몇 명이 있었고, 신부님들은 전부 다 예비역 병장 출신들인데, 다시 군대로 들어와 장교 훈련을 받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조교가 나와서 여러 가지 교육을 시킵니다. 훈련을 시킬 때 우리 목사님들은 조교가 어떻게 가르쳐주는가를 주시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잘 따라 할 수 있을까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해가면서 그것을 잘 따라 하기 위해서 온갖 정신을 기울이면서 그 교육을 잘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교육을 제대로 안 듣는 겁니다. 조교가 앞에서 뭐라고 하면 “아, 거참, 좀 슬슬합시다” 그러면서, “그렇게 빡세게 하지 맙시다” 그러면서 이 신부님들은 예비역 병장을 이미 다 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조교들을 아주 깔보면서 “그렇게 좀 너무 빡세게 하지 맙시다” 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훈련에 협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빙빙 놀기만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접어도 침낭이 비틀비틀비틀하고, 제대로 안 잡히는 겁니다. 총기 수리를 하는데 저는 이것을 뺄까 저것을 뺄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서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우리 신부님들은 이미 예비역 병장 출신들이기 때문에 그냥 슬슬 놀고 있다가 가만히 있다가 쑥쑥쑥 빼가지고 싹 해가지고 쫙 몇 분 만에 끝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가? 병으로 있을 때 무한 반복하면서 얻어터지면서 배웠던, 그때의 그 교육의 효과가 이미 지금 몇 년이 지난 후지만 여전히 몸에 붙어 있어서, 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잘할 수가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고, 한 번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들려주고 또 들려주고, 반복하고 반복해야 되는 거에요.

특별히 이 음행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또 이야기하고, 잠언서에서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들어도 또 넘어지기 쉬운,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그런 잘못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이런 음행의 길로 가지 말라고, 또 반복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거의 반복을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설교를 해 왔습니다. 예수비전교회에 부임한 이래로 제가 매월 며칟날 무슨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지, 다 기록을 해 가면서, 예전에 했던 본문이 아닌 본문만을 골라가면서 그래서 설교를 해 오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그러면서 같은 본분으로 두 번 반복해서 설교한 경우가 몇 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 새로운 본문으로 내용으로 설교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전달해야 되는 그 내용은 반복해야 될 것들은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 설교를 들으면서 “예전에 했던 말씀, 또 하시는구나” “예전에 저 이야기했었는데, 또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은 필요한 것이에요. 옛날에 한 번 들려줬으면, 이제는 더 이상 안 들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들어야 되는, 또 한 번 듣고, 또 들었고, 또 들어야 되는, 사실 복음의 메시지는 매 주일마다 “영생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라고 하는 그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을 또 듣고 또 듣고 해서, 이것이 나에게 완전히 숙지될 수 있도록 반복해야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7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내 마음판에 새겨라.” 이것은 두 가지 명령이 아닙니다. “손가락에 매라 그리고 내 마음판에 새겨라”라고 하는 두 가지 명령이 아니라,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식 그런 표현으로서, 하나의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손가락에 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판의 새기라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생각이 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또 생각이 나고 또 생각이 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판에 새길 정도로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하고,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음행의 죄에서부터 벗어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부터 23절의 말씀은 음행의 길로 가게 되면, 어떻게 망하게 되고, 어떻게 그 음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젊은이가 유혹을 당하여, 그래서 음행의 길로 가는 그 과정을 6절에서부터 23절까지 묘사하고 있는데요. 먼저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음녀가 이 어리석은 사람을 유혹할 때 언제 유혹하고, 어디서 유혹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은 언제 이런 유혹이 있습니까? 9절 말씀에 보면, 잠언서 7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이라.” 지금 음녀가 한 남자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하는 시간이 언제라고 하는 겁니까?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유혹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유혹 안 하는 것이죠? 밤에만 유혹하는 건가요? 낮에만 유혹하는 건가요? 밤에만 유혹한다는 얘기인가요?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저녁때에만, 어두울 때에만, 깊은 밤에만 유혹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유혹이 있게 되는 겁니다.

12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2절 말씀에 보면,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음녀가 어떤 한 사람을 유혹할 때, 그 유혹하는 장소가 어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어떤 거리 광장 모퉁이에서 유혹한다. 서서 유혹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런 장소를 피하라는 얘기입니까? 무슨 얘기입니까? 이 장소는 피하고 다른 곳에 가 있어라라고 하는 말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유혹은 어디서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혹은 언제 나타나는가? 언제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더 거룩하고, 어떤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더 위험하다고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장소는 어떤 장소보다 더 거룩할 것이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그 더러운 장소 유혹의 장소를 떠나서, 그런 유혹이 없는 장소, 거룩한 장소 거룩한 조용한 장소로 들어가야, 그래야 우리가 영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는 말이면서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옳은 생각입니까? 우리가 가능하면 유혹이 없는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음행의 유혹이 있는 득실거리는 장소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런 유혹이 득실거리는 장소를 가능하면 피해야 된다고 하는 점에서, 유혹의 길에서부터 벗어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잘못되었는가? 그렇게 장소를 피하기만 하면, 그러면 안전한 지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유혹이 없는 곳, 더 이상 나를 죄짓지 않게 유혹하지 않는 정말 멋진 장소, 정말 완벽한 장소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정말 우리가 유혹을 받지 않을 그런 시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일주일에 7일 내내, 하루 24시간 내내, 그 어떤 시간도 유혹에서부터 자유롭고, 유혹에서부터 아무런 터치를 받지 않는, 그런 안전한 시간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소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세상에서 정말 우리가 죄의 유혹, 음행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정말 안전하고도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완전한 무균실과 같은 음압병실과 같은 무균실과 같은 그런 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곳이라는 곳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식 해법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불교식 해법은 무엇입니까? 속세에서 그렇게 살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속세를 떠나버려라. 가정을 떠나버려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참선하고, 거기서 묵상하면서, 거기서 돌을 닦으면서 있으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산속에 들어가라. 이곳에 있지 말고 출가해라. 출가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결단이다. 출가를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출가해서 저 산속에 절간 안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유혹이 없느냐? 그렇지 않아요. 거기도 유혹이 있어요. 거기도, 거기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거예요.

천주교식 해법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천주교식 해법 가운데는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정절을 지켜가면서 수녀로 살고, 수사로 살면서, 저 수도원에서 물질을 다 내어버리고, 그곳에서 오로지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고, 노동을 하면서 거룩한 그런 훈련을 하게 되면 된다고 하는 것이 천주교식 해법인데, 그런 천주교식 해법이 통하느냐면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수도원에 들어가면 거기서 완전하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무균실이 수도원이 아니라, 거기서도 엄청난 유혹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중세 시대 때 타락의 현장이 어디였는가? 바로 수도원이 타락의 현장이었어요. 그곳에서 고아들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고아원이 생기게 되었던 것인데요. 다 겉으로는 거룩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그런 신부들이 거기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도 어떠한 곳인가? 교회라고 하는 곳도 안전지대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회는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발각이 되고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똑같은 유혹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당에서든 법당에서든, 그리고 군대에서든, 회사에서든, 민주적인 정당에서든, 그리고 보수적인 정당에서든, 학교에서든 고아원에서든 병원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든 안전지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곳이 다 죄악의 유혹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전염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그런 유혹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요. 목사와 장로라고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유혹이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목사와 장로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인 것이고, 심지어 선교 여행을 가는 과정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며, 구제를 하고 이웃을 돕고 심방을 하는 중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곳에도 안전지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만일 이 세상에 안전지대가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 버리면 간단하죠. 그런데 안전지대가 없어요. 모든 곳이 다 지뢰밭이에요. 거기서 다 감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언제 어디서든 감염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현장 모두가 다 영적인 지뢰밭이고, 영적인 바이러스 감염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완벽하게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온 세상이 지뢰밭이고 유혹의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이런 음행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고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의 방법은 우리가 음행의 길로 가게 되었을 경우에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될 처참한 결과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냐면, 그저 좋은 면만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자. 쾌락을 즐기자. 외로움을 달래 보자라고 하는 그 쾌락의 몇만을 보여주고, 좋을 것 같은 면만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끌어 드리는 것이죠. 마치. 고기를 낚을 때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는데 그 낚시 바늘은 미끼가 속에 숨겨져 있는, 물고기가 그 미끼를 보면서 저걸 보면 먹으면 배부를 것 같고 저걸 먹고 싶도록 그렇게 냄새도 나고 맛있어 보이고 보암직도 하고 너무나도 탐스러운 먹이가 내 눈앞에 보이는데, 그 먹이 속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 있어서 내가 저걸 무는 그 순간에, 내가 잡아당겨져서 나는 육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게 되고 회쳐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판단할 때는 항상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됩니다. 장단점을 다 파악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좋은 점은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장단점을 알 때 우리가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데, 유혹은 어떻게 되는가? 단점에 대해서는 숨겨져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우리를 향해서 음행의 길로 가게 되었을 경우에 어떤 처참한 결과가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서 7장 22절의 말씀에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도살장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죠? 죽는 겁니다. 유혹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23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라고 음행의 길로 가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참된 사랑도 아니고, 그것은 기쁨도 아니고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조심해야 되고, 부단히 그 음행의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혹이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려야 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성경에서는 음란의 죄를 육체적인 죄이기 때문에 금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음란을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영적으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또 그러한 영적인 음행의 결과가 똑같이 비참하다고 하는 것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따라가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영적인 음행이든 육체적인 음행이든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이 잘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될 것이고, 또 우리 자녀들이 이런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가르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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