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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품으면 (잠 6:20-35)

어떻게 하면 음행의 죄를 피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잠 6:12-19) +++ 도수장으로 가는 소 (잠 7:1-27)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특별히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잠언서의 여러 교훈들 교훈해야 될 여러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음행에 대해서 또 말하고 또 반복하고 또 강조해서 교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이 음행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빠지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여건이 주어지게 되면, 조금만 상황이 바뀌게 되면, 이러한 죄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문제가 바로 이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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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제가 예전에 설명을 드린 것처럼, 이 표현법은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같은 내용 말을 반복하는 방식의 표현법을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보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법에 대해서는 떠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법이 있고, 어머니의 법이 있는데, 아버지의 법은 지키면 되는 것이고, 어머니의 법은 떠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지키며 떠나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말고 꼭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법을 지키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는 그 아버지의 법, 어머니의 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메라” 이것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네 마음에 새기고 네 목에 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표현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좀 특이합니다. 내 마음에 새겨라. 마음의 새겨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나무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그리고 어떤 곳에 하나의 이름을 새기듯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서, 그것이 끝까지 남아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목에 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들은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죠? 목걸이를 합니다. 요즘 목걸이를 하는데, 무엇을 목걸이로 하죠? 입마개를 마스크를 목걸이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해야 되는데, 벗어놓으면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벗어놓은 마스크를 다시 한 번한번 그냥 쉽게 찾아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걸이에 걸면, 언제든지 쓰고 싶을 때, 다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목걸이라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목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경도 우리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안경을 쓰기 때문에 목걸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 아내는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다가, 그런데 글을 읽을 때만 안경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늘 찾습니다. 저는 늘 쓰고 있으니까, 찾을 일이 없지만, 제 아내는 안경을 늘 벗고 있다가 책을 읽을 때 전화기를 볼 때, 그때 안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때 안경을 찾게 되는데 안경이 도대체 어디다 놔뒀는지 화장대 위에다 놔뒀는지, 화장실에 놔뒀는지, 냉장고 속에 나뒀는지 모르니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요즘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목걸이에다 차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갖다 쓰는 것이죠.

그런 것을 설명하면서, 오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냐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또 우리들의 목걸이에 걸어두라라고 이렇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연인들이 먼 곳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나무나 바위에다가 이름을 새깁니다. 철수 영희 그리고 하트 모양을 그리면 너와 나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위에다가 그 이름을 새기고, 사랑을 새기면서, 영원히 변치 말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판의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목에 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말씀인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고,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안경이나 마스크 같은 거 경우야, 우리가 보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냥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서 그 적은 말씀을 머리 이마에 달고 다니고 혹은 그렇게 적은 그 말씀을 옷 소매에 달고 다니면,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달고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디다 잘 적어놔라. 어디다 적어서 가지고 다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혹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있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이마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고, 그리고 옷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 범죄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음란한 여인에게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써갖고 다니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써가지고 어디다 붙여가지고 다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게 됐을 때,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 세 번에 걸쳐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네가 잘 때,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새기게 되면 그 유익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해 준다고요? 보호해 준다라고 오늘 22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호해 준다고 하는 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부적을 아마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부적이라고 하는 게 뭐죠?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 써준 어떤 글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 부적이 나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적을 내가 가지고 다니게 되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 준다라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거죠. 요즘 보니까 뭐 부적 같은 걸 손에 써가지고 다닌 사람이 있어서 난리가 나던데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내가 써가지고 가지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거다. 이것을 내가 들고 다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서, 부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너희가 만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면, 그것이 너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부적과 같은 의미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부적과 이 말씀과의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적은 귀신의 힘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의 길로 걸어가 하게 될 때,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적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가 못한 거예요. 악한 사람도 부적을 들고 다니면, 보호를 받는다는 그런 개념이 이 세상 부적의 개념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에 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부적처럼 내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말씀대로 도덕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은 복된 길이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해를 입지 않는 그런 보호받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 도덕적인 차원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오. 훈계와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빛에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고, 안전하게 걷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체적으로 보면 무슨 교훈을 하고 있냐면,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행의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고요. 성적인 범죄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성이라고 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인데, 그것이 정당한 울타리 안에서 사용될 때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밖에서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악한 여인에게, 음행한 길로 따라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26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너에게 딱 떡 한 조각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음행의 결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폐가 망신당하게 될 거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음란한 여인이 나의 생명을 사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행의 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이 아니라, 처음에는 쾌락을 위해서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음행의 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정말 비참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잘 절제하고, 이러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7절과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이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불을 품으면 어떻게 되죠? 불을 품으면 다 타버립니다. 혹시 화재를 일으켜 본 분 계십니까? 불을 내 본 적 계십니까? 불이 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불이 나는 걸, 불이 나는 현장에서 있어봤습니다. 제가 몇 살 때였냐면, 아마 세 살, 세 살 정도 됐을 때, 어린아이 때였던 것 같아요. 형이랑 동네 형들이랑 어른들이 없을 때, 우리 형들이랑 같이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저 고산읍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는데요. 그 초가집으로 된 그 집에서, 타이어, 이렇게 고무 타이어, 이렇게 줄이 있는 그것을 가지고 형들이 거기다 불을 붙이더라고, 3살짜리 정도 됐으니까, 그냥 꼬마 아이로서 신기해서 다 쳐다보고 있는데 형들이 그 고무 타이어에다가 딱 붙이니까, 그 불똥이 툭툭 툭툭 툭툭 떨어지면서, 아, 신기해요. 신기한데, 신기한 건, 단 몇 초.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그 불똥들이 튀기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지푸라기로 된 문에 옮겨 붙기 시작해서, 불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집 전체를 불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그 엄청난 화재 현장 가운데, 제가 꼬마 아이였을 때 있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굉장히 컸었는데요.

그 불이 있으니까, 집 전체를 완전히 살라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잠언서에서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불을 품게 되면 어떻게 된다? 다 타버린다. 숯불을 밟고 서 있으면 어떻게 된다? 발이 데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불을 절대로 품으면 안 된다. 숯불 위에 서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음행의 죄로부터 면역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라든지, 교회 지도자들도, 조금만 틈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있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 이런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조심해야 되는 건데요.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심하는 방법 불을 안 만지는 거예요. 불을 만지면 타니까, 숯불 위에 서면, 데이니까, 숯불 위에 올라가지 않아야 되고, 불을 품지 않아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성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또한 깊은 상담을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일들은 우리가 피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조그마한 문을 여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나 사이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그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그런 관심, 아내로부터 얻지 못한 그 사랑,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워서, 주변에 이성들에게 내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그 불이 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아야 돼요. 결코 결혼의 관계를 떠난 사람과 이성 간의 그런 관계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 쉽게 모든 사람들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죄가 음행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해야 됩니다. 말하기만 하면 늘 싸우고, 말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고,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서툴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서 전달하는 그런 방법들이 서툴러서,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거든요. 그럴 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이성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문제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어떻게 나에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같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조금씩 열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해 나가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닫혔던 그 모든 것들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인데, 그러한 일을 시도하지 않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에 나가서,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만을 가져옵니다.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 태워먹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분명하게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음행의 문제 외에도,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건 도둑질의 문제입니다. 30절에서부터 31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누군가가 훔치게 된다고 한다면, 힘들어서 훔쳤겠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7배나 갚아줘야 되고,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음행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도둑질의 이야기를 할까요?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음에서부터 똑같은 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정당한 내 바운더리 속에 있는 정당한 내 울타리 속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와서 만족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게 도둑질입니다.

그런데 이성에 관한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어떤 성적인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그리고 어떤 자기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사실은 같은 성격의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넘어졌다고 한다면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훌륭한 분들이 음행의 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만 보더라도 다윗이라고 하는 그런 엄청난 인물도 음행의 죄에 넘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넘어질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다 더 잘 넘어지겠습니까?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훌륭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기에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야 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주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속에 기억이 나서, 우리가 발걸음을 걸을 때, 혹시라도 불 속에 들어가지 않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잘 살펴보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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