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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감사와 찬송이 없습니까? (눅 15:25-32 )

조금 전에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아주 유명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어느 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이렇게 집을 나가는 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일반 가출 정도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졌을 법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고, 그런 일들은 유대사회에서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정말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로 들려졌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오늘날의 이야기로 바꾸어서 오늘날의 이야기로 바꾸어 말한다고 한다면, 엄마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때려죽이고 엄마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 아들의 이야기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만일 유대 사회에서 이런 아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만일 유대 사회에서 이런 패륜아 같은 아들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그 당시의 반응이었을까요? 그것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들고일어나서, 그 패륜아를 잡아다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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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지실 텐데요. 그런데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일들이 21세기에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여성이 부르카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로 즉결 심판을 당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하는 이유로 자기 딸을 죽여버리는 황당한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유대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 즉 이런 패류나 자식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죽여버리는 일들이 있었을 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향해서 모욕을 주고 아버지에 대해서 반역하고 패륜아가 되어서 집을 떠나가 버린 그 둘째 아들이 쫄딱 망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놀랍게도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맞이합니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 모습을 보니까, 자기 아들이 맞아요. 그 걷는 모습을 보니까, 자기 둘째 아들이 맞아요.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그 둘째를 맞이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점잖은 어른이 결코 뛰는 법이 없다고 하는데, 이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을 멀리서 보고 그냥 집에서 한가롭게 기다릴 수가 없는 겁니다. 어서 뛰어나가서 그 둘째 아들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렇게 뛰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데리고 와서 환영해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 아버지가 먼저 뛰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둘째 아들에게 그의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씻기고 옷을 입혔다고 하는 이야기는 옷이 더러우니까 그냥 새 옷을 입혀주었다고 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옷을 입힌다고 하는 것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아들이 나의 상속자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겁니다. “너는 내 상속자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그 옷을 입혀주는 것이고, 가락지를 끼워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네가 우리 집의 주인이다.” “너는 종이 아니라, 종들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주인으로서, 아들로서 우리 집에 온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런 놀라운 아버지의 환영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언제 들어도 또 듣고 또 들어도, 언제나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에 보면 그 탕자의 형이 등장합니다. 그 형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형이 밭에 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일하러 간 것일 겁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돌아온 그 아들이 집에 오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기 집에서 전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풍악 소리가 울리고 있는데요. 그동안 한 번도 우리 집에서 그런 풍악 소리 글을 울려본 적이 없는데, 무슨 풍악 소리인가? 그리고 집에서부터 나오는 그 맛있는 음식 냄새에 이 큰 아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종을 불러서 그 종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그랬더니 종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동생이 너무나도 기뻐서 동생이 돌아온 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동생을 환영해 주었고, 그리고 옷을 입혀주었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형은 그 순간에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분노를 억누르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큰 아들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읽었던 말씀 29절과 30절의 말씀을 보면, 그 큰 아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아버지의 모습이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당자가 누굽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해버린 아들이오. 그 아들은 창녀들과 함께 즐기면서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켜버린 아들이오. 그리고 그 아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를 죽이는 것이 유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정당한 대우일 텐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정반대로 하는 겁니다. 나쁜 짓을 한 아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어서 환영해 주는데, 지금까지 신실하게 아버지의 집에서 한 번도 잘못을 하지 않은 나를 향해서는 아무런 대우가 없었다고 하는 이 불공평한 사실에 분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큰 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대우가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기는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집에 머물며 순종했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그에 대한 대가가 있다고 한다면, 칭찬과 그리고 정말 많은 상을 주는 것이 당연할 텐데,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잡은 적도 없고, 친구들과 함께 놀라고 하는 그런 여유와 너그러움을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는데, 나쁜 놈한테는 잔치를 베풀어주는. 저 악한 나쁜 사람에게는 환영해주고 반겨주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큰아들의 불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이 큰아들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일 것이고, 일리가 있는 불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공평하게 행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불신자로부터 늘 듣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나쁜 놈들은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는데, 왜 착한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다고 지옥에 가느냐? 우리를 향해서 자꾸만 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이 불공평한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왜 그렇게 공정하지 못한가 공평하지 못한가를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대우해 주는 것이 공평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한 달란트씩 똑같이 나누어 주거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섯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것이 그게 공평함이 아니라, 공평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받을 만한 대우를, 그의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공평함일 거잖아요? 누군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착한 일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게 공평이고, 누군가 악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악한 일을 처벌하는 것이 공평 아닙니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불만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회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죠. 정말 수고하고 애쓴 사람은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하는데, 아빠 찬스나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는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사회는 정말 불공평한 사회라고 하면서, 공평한 사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게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이 아닙니까? 악을 행하고 있는데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신신하게 살아온 사람은 결코 보상받지 못하는 이런 모순된 사회 이런 모순된 현상에서 우리들은 신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큰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서 이 공평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어쩌면 이 큰 아들의 불만은 불평은 어쩌면 당연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버지는 공평함을 잃어버린 아버지입니다. 공평한 아버지라고 한다면 수고한 아들에게 많은 상을 주고, 그리고 악한 일을 한 아들에게는 책망하는 것이 공평한 아버지일 겁니다. 하지만 그 공평함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오히려 나쁜 짓을 한 그 아들을 향해서,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시는 것인데요.

아버지는 왜 이 공평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돌아온 그 아들을 보니까 공평함이 사라져 버렸어요. 사랑의 크기가 너무나도 크기에, 그 공평함이라고 하는 가치가 망가져 버린 것이죠. 그래서 어쩌면 이 형의 불만은, 이 형의 불평은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불평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정말 불공평하게 대우해 주는 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 땅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인데요. 그래서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들 또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하나님도 공평하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신가? 그 문제를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까?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해 보이십니까? 불공평해 보이십니까? 어쩌면 하나님은 공평해야만 하나님일 것 같아요. 하나님이 만일 불공평하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선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공평해야만, 참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어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셔야,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며 선을 행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면 심판을 당할 것이고, 우리가 선을 행한다면, 지금은 인정받지 못해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을 바라면서, 그 공평함, 그 하나님의 공평함에서 나오는 그 상급을 바라보며,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힘들어도 참는 것이고 고통스러워도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께서 스스로 공평함을 깨트려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하나님이 되지 않으신 겁니다. 악을 행한 자에게 심판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을 행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향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 죄 많은 인생을 살리시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하나님의 불공평함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고, 큰 아들로서는 지금까지 순종하며 살아온 자들에게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 하나님의 모습인 겁니다. 죄를 지은 이 탕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겠지만, 그러나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이 큰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이 큰 아들은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향해서 불공평하게 대우해 준 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큰 아들에게도 불공평하게도 과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31절 말씀에서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내 것이로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인색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아들에게 다 주고 계셔요. “내 것이 다 네 거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큰 아들은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자기가 획득해서 그 사랑에 대한 그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사랑을 획득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아들도 과도한 사랑, 과도한 아버지의 불공평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죠.

하지만 이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는데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 항상 있기 때문에, 일상화되어 버린 하나님의 사랑은, 일상화되어 버린 부모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처럼 착각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내가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기를 향해서 베풀어주신 과분한 축복이며 과분한 사랑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었던 것이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줘야 될 무슨 이유가 있나요?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말하기를, 엄마 나 엄마 젖 빨 테니까, 만 원 낼 테니까, 엄마 젖 좀 빨게 해 줘. 돈 내고 빨았어요?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어떤 것을 한 적이 있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부모에게 해줄 수 없는 그 아이를 위하여, 부모는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사랑으로 돌보고 그리해서 일방적이고 과도한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자녀들이 지금까지 살아올 수가 있었던 것이죠.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8시간 일을 하고, 일주일에 120시간씩 일을 해서, 무엇인가 내가 돈을 바쳤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한 없는 사랑으로 지금까지 그 큰 아들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한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고,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과도한 축복을 과도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큰 아들은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유산을 아들에게 줄 텐데, 그 아들에게 유산을 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일군 것을 자녀들이 받는 거예요.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축복을 받는 것이고, 내가 수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은혜를 받는 것인데, 처음부터 아버지는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큰 아들에게도 과도하고 불공평하고 일방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큰 아들은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해 버린 것이죠.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이 살아가는 이유도 아버지께서 과도하게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준 결과입니다.

둘째로 큰 아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자기 자신도 불순종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들 둘째 아들만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아들도 순종한 그런 신실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역하고 있는 완고한 아들이었다고 하는 점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집을 나간 사람이 누굽니까? 집을 나간 사람은, 탕자가 집을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 큰아들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어요. 잔치가 벌어지는 그 집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부탁을 하는 겁니다. “얘야, 들어가자. 동생이 왔으니 들어가자.”라고 말하는데, 그 아들은 그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서 말하기를 무슨 얘기를 합니까? “아버지여,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습니다.”라고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자리가 어느 자리인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집 밖에 서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잘 보지만, 나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은 보지만, 내 눈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그런 편향된 시각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감사가 없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없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가득한 이유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큰아들은 지금 아버지의 사랑을 본 것이 아니라, 탕자를 바라보면서 저 탕자보다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고 저 탕자보다는 내가 더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죠.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고 행복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 같은데, 왜 저 사람은 더 나은가? 탕자를 바라보면 저 사람은 더러운 사람인데, 왜 나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느냐? 그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기쁨이 사라져 버리고, 불평과 원망과 감사가 사라지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날마다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이 당연한 줄로 믿습니다.

잭 캔필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마음을 열어주는 101 가지 이야기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모아다가 종합해서 그래서 책으로 펴내는 사람인데요. 한때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전 세계적인 베스트가 셀러가 되었던 책이 마음을 열어주는 백 한 가지의 이야기라고 하는 책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잠깐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저녁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이 부엌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앞치마로 손의 물기를 닦아낸 후 그 쪽지를 받아 읽었는데 그 쪽지는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청구서였습니다. 꼬마 아이는 그 종이에 엄마가 나에게 주어야 될 돈의 액수를 청구서를 적었습니다. 잔디 깎은 값 5불,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불,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전,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동생 봐준 값 25전,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불, 숙제를 잘 한 값 5불, 마당을 청소하고 빗자루질 한 값 이불 도합 전부 합쳐서 14불 75전짜리 청구서를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그 엄마는 그 쪽지를 받아 들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아들은 엄마로부터 돈을 용돈을 받을 기대에 부풀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엄마는 그 쪽지를 가지고 연필을 가지고 와서 아들이 내민 그 청구서 뒤에다가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새워가며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하고 눈물 흘린 값 완전 무료, 너 때문에 불안으로 지는 수많은 밤과 끝없이 염려해야 했던 시간들 모두 무료, 장난감 음식 옷 그리고 심지어 내 코를 풀어준 것까지도 몽땅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전부 무료.

아들은 그 엄마가 쓴 글을 읽고 나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그 아들은 그 종이에 연필을 들어서 큰 글씨로 썼습니다. “전부 다 지불되었음”(Paid in full.).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일 우리를 향해서 공평하셔야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저 십자가의 형에 던지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대우해 주신다고 한다면, 영원한 지옥불의 우리를 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지옥에 처넣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며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고, 죄가 많은 우리는 지옥불에서 건져내는, 불공평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것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찬양대 헌신예배로 모이게 됐는데요. 찬양대원들 한 사람 한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 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감사가 없고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찬양이 없습니까? 노래하면서 아무런 감격이 없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눈물이 없고, 그냥 힘들어서 겨우겨우 하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서 왜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일방적이고 불공평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얄팍한 그런 모습 때문에 교만해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미워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불만 가운데 가득 찼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바라보십시다. 아버지와 같은 그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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