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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1.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믿음의 길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길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은 아주 중요한 몇몇 일들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라고 아브라함 카이퍼가 외쳤는데, 우리의 시간 단 1분 1초도 우리의 영역 가운데 단 하나도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질문해야 한다.

다윗은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다. 블레셋 민족이 쳐들어오면 당연히 왕으로서 그 외적의 침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 그는 움직였다. 그게 다윗과 사울과의 차이점이었다. 사울은 먼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전쟁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자신이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따라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그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에봇으로, 우림과 둠밈으로, 또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게시된 하나님의 뜻은 아주 분명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했다가 그 계획을 중단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오늘날에도 종종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었는지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는데도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었다. 예전에 시한부 종말론 열풍이 불 때 다미 선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92년 10월 28일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을 계시해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재림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하게 들었다고 확신했었지만, 그들이 잘못 들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어젠다가 강하면 성경의 우물에서 자신의 얼굴만 볼 것이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것이다. 강렬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보라. 그러면 자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이 큰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을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대부분 큰 교회로 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얻게 될 것이다. 이미 그 마음에는 큰 교회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교회에 가게 되면 어떤 사역을 펼치게 될지에 대한 원대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고, 그런 그림들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 성도들이 느끼게 될 배신감이나 받게 될 상처들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판별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자신의 거룩함과 소명으로 포장된 욕망이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정치에 뛰어들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구하면 정치에 참여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하고 정치에 뛰어들게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응답을 받은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 데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과연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나 한 것일까? 그냥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한 것은 아닐까?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며 계시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계시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려고 한다면 하실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이미 성경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게시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충분한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또 다른 계시를 요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어달라고 요청하지만, 이러한 요청은 일언지하에 거부되었다.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계시를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추가적인 계시를 추구하는 것은 믿음의 자세가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표적들을 이미 많이 보여주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것으로 표적은 충분했다.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말이다. 그러한 요청은 거룩한 요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삐뚤어진 요청이었을 뿐이었다.

2. 하나님의 뜻과 계시 의존적 사색

하나님의 뜻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우리들의 문제들을 사색하면서 발견해 나가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에 속삭이신다. 음성으로 들려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소원을 주시는 방법으로 속삭이시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게 하신다(빌 2:13). 그때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에 속삭이는 것은 성령님만이 아니다. 우리의 지체 속에 다른 한 법이 있어서 성령의 소욕을 누른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애써 모른 척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롬 1:19). 그런데 마치 하나님의 뜻이 안 들리는 것처럼 마음을 억누르기 때문에 안 들린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구약 시대에도 항상 음성을 통해서 들려진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세미하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민감하게 들어야 했다. 다윗이 도망 다니던 시절에 사울 왕이 다윗이 숨어 있던 굴에 혼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다윗의 심복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이니, 사울을 죽여버리자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에게는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을 용서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었다. 이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알려주신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했고, 그 묵상의 결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과 다르게 행동했다. 언젠가 다윗이 그일라 지방으로 피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넘겼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그일라는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으로 다윗이 그 안에 들어갔다면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상황이라는 확신에서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울의 자기 확신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 왕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아갈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 많이 알 수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를 알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사울 왕은 하나님을 잘 몰랐다. 결국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게 우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오랫동안 부부로서 살아온 사람은 굳이 남편이나 아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를 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서로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을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아도, 좋아하는 음식을 시킬 줄 안다. 서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말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 알아간다면, 우리의 상황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애써 그것을 억누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였다. 기도는 정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도하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고 십자가를 지셨다. 그 기도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에게 사랑의 음성으로 들려주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신 셈이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소원에 집중한 나머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할 때까지 자기 확신의 과정을 밟는다. 그러기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보다는 주관적인 자기 확신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자기의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말씀하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기도는 반드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과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가 없는 성경 묵상이 잘못될 수 있지만, 성경 묵상이 없는 기도는 더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뜻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자명하다(신 30:11-14).

3. 가치중립적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

도덕적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기에 비교적 발견하기 쉽다. 이미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의 문제는 단순히 선과 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도덕적 선택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을 선택해도 되고 저것을 선택해도 되는 가치중립적인 선택도 있다. 예를 들어, A 대학에 입학할 것인가 B 대학에 입학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 A하고 결혼할 것인가 B하고 결혼할 것인가의 문제, A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 B 직장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 A 아파트를 구입할 것인가 B 아파트를 구입할 것인가의 문제들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예전에 김 아무개 목사는 <OOO의 기도>라는 책을 쓴 바 있다. 그 책에서 그 목사는 자신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에 따라 어느 지역으로 이사를 할 게 아니라 어느 지역으로 이사하라는 응답이 있었고 그것을 알려주었더니, 처음에는 그렇게 할 능력이 안 되어 부담스러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말대로 했다가 집값이 많이 오르게 되어 수지가 맞았다는 등 여러 가지 응답의 이야기들을 잔뜩 써놓았다. 그러한 예가 한둘이 아니고 부지기수라고 자랑스럽게 써놓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수많은 사람이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는 후문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서 비평을 한 바 있는데, 이 책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부추기도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널리 퍼트리고 있다. 이 책의 주장은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전형적인 관점일 뿐이다.

미신적인 관점은 모든 게 올바른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사하기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불길한 날이 있는 것이고, 묘지 자리로 좋은 장소가 있는가 하면 묘지로 쓰면 안 되는 흉한 터가 있는 것이고, 궁합이 맞는 좋은 배필이 있는가 하면 궁합이 맞지 않는 배필과 결혼을 하면 그 결혼은 결국 불행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성공하게 만드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늘 실패하게 만드는 이름도 있다. 모든 게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미신적인 관점에서는 정말 좋은 선택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미신적인 관점이 크리스천들 사이에도 만연하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굉장히 신앙적인 질문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미신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 말은 무엇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선택인가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적 관점은 누구를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땅을 선택했다. 아브라함에게 남은 땅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하지만 좋은 땅의 선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땅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 중요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말 좋은 배우자를 선택해야만 결혼 생활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은 누구를 선택하는가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는가이다.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하고 사랑으로 감싸준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고 더 많은 사랑을 상대방으로부터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그 가정은 파탄이 날 것이다.

따라서 A와 결혼을 할지, B와 결혼을 할지를 하나님께서 점지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면,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누구와 보다는 어떻게에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선택하는 문제도, 이사를 하는 문제도, 어느 대학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다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에 도덕적 이슈가 연결되어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선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아디아포라(adiaphora: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의 문제라면 우리의 지정의를 통해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주변의 여건들이나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조언을 청취하면서 좀 더 좋은 쪽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결정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람들의 말과 나의 생각 등등 모든 것들이 종합하여 어떠한 결정을 내리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 어떤 선택이든 완벽하게 100%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조금씩 수정해 나가면 된다. 처음에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음이 깨달아질 수도 있다.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꾸 막혔다. 그런데 나중에 마게도냐에 대한 꿈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수정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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