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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 (눅 15:25-32)

성실하게 살아온 아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집을 뛰쳐나가고 패륜을 저지른 아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어주는 게 과연 공평한 일일까? 하나님도 그렇게 불공평한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일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주 유명한 탕자의 비유의 일부분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는데요. 탕자가 집을 나간 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가출 정도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은 정말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가지고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해가며 다 써버리고 낭비하는 것, 정말 그 이야기를 유대 사회에서 들었다고 한다면, ‘정말 이런 몹쓸 자식이 있는가?’ 하면서 다같이 분노하고 다같이 치를 떨면서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아주 끔찍한 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만일 이 탕자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 현대에 맞는 21세기 상황에 맞는 이야기로 재구성하자면, 어느 날 어떤 아들이 엄마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로 엄마를 죽여버리고, 그리고 돈을 빼앗아 유흥업소에 가서 마음껏 써버렸다고 하는 그런 패륜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패륜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하면,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로 서니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를 죽이고 그렇게 허랑방탕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충격에 빠질 만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 탕자가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바로 그런 행동과 똑같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그렇게 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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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유대 사회에 이런 탕자가 있다고 한다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었을까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그 탕자를 잡아다가 재판을 하고 그리고 그 아이를 가운데 세워놓고 돌을 던져서 그 아이를 죽이는 일이 발생해도 아무 할 말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설마 그렇기로서니, 그 아들을 돌에 던져 죽일 수 있을까?’ 아마 의심하시는 성도님들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한 일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일들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잘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여성들이 온몸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로 즉결 심판을 당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자신의 딸을 죽여버리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가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유대 사회도 그와 비슷한 현상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탕자가 있었다고 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탕자의 이야기를 해줄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수많은 청중들은 분노하면서 반응했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못된 놈이 있는가? 그런 나쁜 자식이 있는가?’ 하면서 모두가 다 그 탕자를 향해서 분노하고 욕을 해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바로 탕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쫄딱 망하고 돌아온 그 탕자를 아빠는 받아 주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그 모습을 멀리서 아버지가 바라보고 뛰어가서 아들을 맞이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점잖은 어른은 결코 뛰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바라보고서 뛰어나가는 겁니다. 체통이고 뭐고 상관 없이 뛰어나가는데, 뛰어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아이를 잡아다가 죽일까 봐. 그 아이를 쫓아낼까 봐. 그 동네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뛰어가서 그 아이를 안고 데리고 와서 그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웠다고 하는 얘기는 이 아이의 옷이 더러우니까 그냥 옷을 새로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서 옷을 입힌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이 12 아들들 가운데서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나의 상속자는 요셉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리게 만들었던 것처럼 내 옷을 입히고 그 아이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또한 가락지를 끼운다고 하는 것은 ‘네가 우리 집안의 모든 창고의 권리를 가지고 그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이 집안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한 유산 상속자’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사건이었는데요. 아버지는 이 둘째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정당한 자식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인데, 언제 들어도 또다시 들어도 감동적이고 또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이야기 이후에 일어나는 두 번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막에서는 탕자의 형이 등장합니다. 그 형은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형이 밭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고 밭에 일을 하러 간 겁니다. 매일매일을 아버지의 뜻 따라 성실하게 일하는 너무나도 모범생인 아들이 큰 아들인 것이고, 그날 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밭에 가서 하루 종일 수고하고 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일한 그 아들이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부터 들려오는 풍악 소리를 듣게 된 것이고 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큰 아들은 종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우리 집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풍악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맛있는 고기 냄새가, 이게 무슨 냄새인가?” 종에게 묻는데 종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동생이 돌아온 것을 너무나도 기뻐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형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솟아오릅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하는 소식에 그리고 아버지가 그 동생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소식에 이 형이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공평의 문제였습니다. 29절에서부터 3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거니와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빠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공평하게 행동해야 되는데 공평하지 않게 행동하는 겁니다. 탕자가 누굽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가 버린 사람입니다. 허비해 버린 사람입니다. 그것도 장기와 함께 놀아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켜 버렸는데, 그 탕자가 받아야 될 당연한 대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되는 것이고, 유대 사회라고 한다면 그런 아들은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대우라고 할 수 있겠는데, 더군다나 자기 큰 아들을 향해서는, 나를 향해서는 대우가 불공평한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열심히 순종하면서 매일매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했는데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나에게는 잘했다고 하는 아무런 칭찬도 없는데, 저 몹쓸 놈이 돌아오니까 보상을 해주는 거예요. 저 나쁜 놈이 돌아오니까, 송아지를 잡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억울한 일이,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우리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큰 아들의 불평에 대해서 여러분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쩌면 일리 있는 불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지 못한 대접을 받으면 불만이 생겨나는 겁니다. 공평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주는 것이 공평이 아닙니다. 이 사람도 한 달란트, 이 사람도 한 달란트, 이 사람도 한 한 달란트,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주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공평인 것이죠. 누군가가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면 누군가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상을 주는 게 맞는 것이고, 누군가가 악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죠.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 공평한 세상에 살고 싶어요.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처벌을 받는 사유에 살고 싶은 것이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는 사회, 그런데 땅땅 놀기만 하고 악한 짓을 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사회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불공평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탕자를 향해서 과도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고 과도한 영접을 해주고 있는 것이죠. 정당한 대접이라고 한다면 쫓아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리고 그 가져간 돈을 다 회복해서 그렇게 해서 가져와야만 받아주겠다고 하는 것이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가 될 텐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공평하지 않은 아버지인 겁니다. 수고하고 애쓴 아들을 향해서는 이런 대우를 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집을 나간 아들.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그 아들을 향해서는 정말 환대 중에 큰 환대, 환영 잔치를 하면서 그 아들을 맞이하는 그 아버지를 보면서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아버지의 공평함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공평을 무너뜨려버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에 공평함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죠. 둘째 아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니까, 너무나도 기뻐서 내가 공평하게 아이들을 대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공평함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형의 불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불평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의 눈에 멀어서 정말 아이들에게 공평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공평하게 오히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별로 대우를 하지 않는 반면에 정말 집을 나간 아들을 향해서는 과도한 대접을 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 어쩌면 이 형의 불만은 정당한 불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요. 아니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공평해야만 할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고 수고한 자에게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어주시고 게으른 자에게 악을 행한 자에게는 처벌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이 계신 결과로 나타나야만 당연할 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그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도 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공평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악을 행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죠. 영원히 멸망받을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멸망받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아무 죄가 없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이것이 공평한 것이냐면 공평하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보면 못 믿겠다는 겁니다. 정말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죄인들은 천국 간다는데,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큰 아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지점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만 과도하게 불공평하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아들을 향해서도 과도하고 또한 불공평하게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대답을 합니다. 31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되.” 아들은 큰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거야.’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인색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서 큰 아들을 향해서 공정하게만 대우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베풀어주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아버지의 수고와 땀으로 얻은 결과란 말이에요. 큰 아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큰 아들은 조금 도와줬을지 모르지만, 그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형성하는데 아버지의 공로고 아버지의 힘으로 모든 재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 재산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은 그걸 알지 못하는 거죠. 느끼지 못하는 거죠. 왜냐하면 일상화되어버린 은혜는 은혜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이 사실 나에게도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어 있을 만큼의 그런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셔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게 마땅히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을 맡겨 놨습니까? 저축을 해놨습니까? 아니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 그냥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주는 거예요.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엄마한테 엄마 1만 원 줄 테니까 나 젖 빨게 해 줘.” 엄마한테 돈 준 적 있어요? 좀 먹겠다고 대가로 지불한 적이 있어요?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거죠. 자녀가 아빠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준 것이 아니고, 자녀가 하루 8시간 일해서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120시간씩 일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세끼 밥을 먹을 권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이고 입히고 채워주고 돌봐주는 그 불공평한 사랑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과도한 사랑을 우리 모두가 받았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큰 아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다 불공평한 것이고 자기가 힘써서 애써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고 구하고 지금까지 주어진 것이고 그 과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 아빠가 작은 아들에게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과도한 배려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큰 아들은 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큰 아들도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를 불순종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큰 아들은 탕자를 바라보면서 집을 나간 자식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먹은 자식이고, 그 탕자의 온갖 비난할 거리만을 바라보았지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그 아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어디서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죠? 집 밖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집을 나간 게, 둘째 아들만 나간 게 아니고 첫째 아들도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를 거부하면서 안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명을 거부하면서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둘째 아들만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큰아들도 지금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서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나는 그 아버지의 품에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의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큰 아들도 잘못한 것이고, 큰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탕자의 형과 같이 큰 아들과 같이 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을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허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고 그리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신실하게 살았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정직하게 살았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는데, 하나님, 그런데 왜 나한테는 돈을 안 주세요? 하나님, 그런데 왜 나한테는 건강을 안 주세요? 하나님,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줍니까? 왜 저 사람한테는 과도하게 축복을 주는데 왜 나한테는 안 주는 겁니까?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서 감사가 사라지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불공평하게 억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사랑해 주셔서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날마다 감사와 찬송으로 기뻐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잭 캔필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의 이야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때 굉장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인데요. 그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에피소드들 가운데 어떤 한 에피소드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글을 받아 가지고 엮어서 낸 책인데요. 어떤 한 사람이 보낸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부엌으로 와서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저녁 준비를 하던 그 엄마는 앞치마로 손에 있는 물기를 닦아 닦은 후 그 아이가 준 쪽지를 받아서 읽었는데요. 그 쪽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청구서. 잔디 깎은 값 5불.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불.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전.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동생 돌보아 준 값, 25전.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불. 숙제를 잘한 값 5불. 마당을 청소하고 빗자루질 한 값 2불. 전부 합쳐서 14불 75전”짜리 청구서를 꼬마 아이가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그 청구서를 바라보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기대에 차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그 아들의 얼굴을, 엄마는 쳐다보고 그리고 연필을 가지고 와서 아들이 쓴 종이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내가 아플 때 밤을 세워가며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하고 눈물 흘린 값, 완전 무료. 너 때문에 불안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과 끝없이 염려해야 했던 시간들, 모두 무료. 장난감 음식 옷 그리고 심지어 네 코를 풀어준 것까지도, 몽땅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모두 무료.”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했습니다. “Mom. I love you. 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서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Paid in full. 다 지불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셔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형의 현장에 내어 보내는 거예요. 우리는 거룩하고 완벽하고 깨끗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니에요. 발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검사 250명과 압수수색 70회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탈탈 털지 않아서 그렇지, 탈탈 우리를 털면 얼굴이 부끄러워서 전혀 다닐 수 없는 인생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불에 처넣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고 너희가 내 상속자라 말씀하시고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불공평하게, 하나님의 그 공평을 내어버리시면서까지 예수님에게는 과도한 십자가를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게 우리 왔는지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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